괴물 대공과의 이혼은 거절합니다

53화: 닫힌 문 너머의 장부
북쪽 회복동의 문을 두 번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에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창가에 놓인 빈 화분과 약초 건조실의 반쯤 열린 문을 한참 바라보았다. 밤새 창문 틈으로 스며든 찬 공기 속에도 말린 잎의 씁쓸한 향은 남아 있었다.
미나는 물그릇을 든 채 침대 곁에 서 있었다. 문밖에서는 누구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시안은 약속대로 문 앞에 오래 머물지 않는 모양이었다.
"미나만 들어와도 돼요."
문이 조용히 열렸다.
미나는 쟁반을 들고 들어왔다. 연한 약초차와 미지근한 죽이 놓여 있었다. 쟁반 아래에는 붉은 실로 묶인 종이 뭉치가 보였다.
"대공 전하께서 아침 약을 보내셨어요. 이건 회복동으로 옮기다 남은 문서인데요. 북쪽 문성 표식이 보여서 따로 두었습니다."
에리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잠시 숨을 골랐다.
"가져와 봐요."
미나는 베개를 받쳐 주고 종이 뭉치를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맨 위에는 물자 수레의 도착 예정표가 있었다. 그 아래에 접힌 메모 하나가 끼어 있었다.
북쪽 문성 앞 수레 대기 이틀째. 확인표 없는 수레만 통과.
에리나의 손끝이 종이 가장자리에서 멈췄다.
"이틀째요?"
"어제 늦게 온 메모라고 했어요. 문성 쪽 전달원이 눈보라 때문에 더 빨리 오지 못했다고요."
문성은 겨울이면 길이 끊기는 곳이었다. 그래서 늦가을부터 곡물과 장작을 쌓아 두고 열병 약초도 넉넉히 말려 두었다. 그런데 수레가 성문 밖에 멈췄다면 안에 든 물건도 얼어 가고 있을 터였다.
에리나는 표식을 다시 보았다. 붉은 실은 대공비가 확인해야 할 민원과 물자 장부에만 쓰는 것이었다.
"문성 물자 장부가 더 있나요?"
미나가 망설였다.
"지금 보시려고요? 아직 열도 완전히 내리지 않았는데요."
"전부는 아니에요. 수레 목록만요."
미나는 한숨을 삼켰다. 그러나 에리나의 눈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문밖에 로젤리 님이 계세요. 대공 전하께서 장부가 필요하면 보내라고 하셨대요. 전하께서 들어오지는 않으시고요."
에리나는 잠시 문을 바라보았다. 카시안이 문밖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그가 자신의 요청을 미리 정하지 않고 남겨 두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로젤리 님에게 물자 장부만 부탁해요. 담당자들은 회랑에 두고요."
미나가 나갔다.
잠시 후 문밖에서 로젤리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공비 전하. 문성 물자 장부와 확인표 사본을 문 앞 탁자에 두겠습니다. 읽을 사람이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감사해요."
문이 다시 닫힌 뒤 미나가 장부를 들고 들어왔다. 장부의 종이는 습기를 먹어 가장자리가 물결처럼 울어 있었다. 에리나는 손가락으로 줄을 따라 내려갔다.
곡물 열두 수레. 겨울 담요 다섯 수레. 장작 세 수레.
그리고 열병 약초 두 상자와 설백 뿌리 한 상자.
"열병 약초가 왜 문성으로 가요?"
미나가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지난달부터 성문 밖 마을에 기침하는 아이들이 늘었다고 들었어요. 큰 병은 아니지만 추위가 심해지면 열이 오를 수 있다고요."
에리나는 다음 장을 넘겼다. 수레마다 도장이 찍혀 있었는데 멈춘 수레의 표식만 달랐다. 황실의 검은 밀랍이 찍힌 좁은 확인표가 묶여 있었다.
종이를 펼치자 잉크가 마른 자리에서 검은 글자가 떠올랐다.
대공비 지위 정지 심의 준비 중. 북부 자원 이동 재검토.
에리나는 한동안 그 문구를 읽지 못했다.
황태후궁은 그녀가 삼 일 안에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린다고 했다. 그러나 기다리는 동안 북부의 수레를 멈추고 있었다. 그녀의 침묵을 핑계로 다른 사람들의 겨울까지 묶어 두려는 것이었다.
"미나."
"예."
"로젤리 님을 다시 불러 줘요. 그리고 대공님께도요."
미나의 눈이 커졌다.
"문을 여실까요?"
에리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문밖에서 들으면 돼요."
로젤리가 먼저 왔다. 그 뒤로 카시안의 낮은 목소리가 회랑에 닿았다.
"듣고 있다."
그 말에 에리나는 아주 잠깐 눈을 감았다. 그가 문을 열라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지금은 고마웠다.
"문성 수레가 이틀째 멈췄어요. 황태후궁 확인표 때문이에요."
문밖의 기척이 굳었다.
"내 명령으로 통과시키겠다."
"잠깐만요."
에리나는 장부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대공님 명령으로만 열면 저들은 또 제 자리를 빌려 대공님을 공격할 거예요. 제가 남겠다고 정했다거나 대공님이 제 뜻을 대신했다고 할 거고요."
카시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침묵은 망설임이 아니라 듣기 위한 것이었다. 에리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럼 무엇을 기록하지."
"제가 장부를 확인했고 북부 주민에게 도착해야 할 물자가 있다고 말했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이건 제 자리를 정하는 말이 아니에요. 지금 성문 밖에 멈춘 수레에 대한 말이에요."
로젤리의 펜촉이 종이를 스쳤다.
회랑 끝에서 마르바 라운이 한 걸음 나왔다.
"대공비 전하께서 대공비 권한으로 물자 이동을 요청하신다면, 황태후궁은 그것을 지위 유지 의사로 기록할 수 있습니다."
에리나는 문을 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제가 한 말을 전부 기록해 주세요. 저는 지위를 유지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요. 떠나겠다고도 말하지 않았고요. 다만 약초가 얼면 아픈 사람들이 생긴다고 말했어요."
"마르바 라운의 말도 기록해라."
카시안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대공비의 긴급 물자 확인을 지위 유지 의사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마르바가 입을 다물었다.
그때 다른 발소리가 회랑을 급히 가로질렀다. 아르웬이었다. 그의 망토 끝에는 녹지 않은 눈이 엉겨 있었다.
"전하. 북쪽 문성에서 두 번째 전서입니다."
에리나는 미나를 보았다. 미나가 문을 열어 전서를 받았다. 아르웬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턱 밖에서 봉투를 내밀었다.
"읽어 줘요."
미나가 봉투를 열었다. 종이 위에는 급하게 눌러 쓴 글씨가 번져 있었다.
"성문 동쪽 돌틈에 검은 서리가 번진다고 합니다. 밤부터 병사 몇 명의 손이 저리고 감각이 둔해졌대요. 수레 말들도 그쪽 길을 밟으려 하지 않고요."
에리나의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검은 서리.
그 말은 대공성 지하의 흙과 서쪽 탑 아래 배수로를 떠올리게 했다. 썩은 뿌리처럼 기어 나오던 검은 기운과는 모양이 달랐다. 가까이 가면 생명력이 얇아지던 그 감각만은 닮아 있었다.
"원인을 알 수 있나요?"
"아직입니다. 문성 의무관은 동상일 수도 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불을 피워도 저림이 가시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카시안의 목소리가 더 낮아졌다.
"아르웬. 정찰대를 보낸다. 수레 호위도 늘려라."
"예."
"기다려요."
에리나가 말했다.
아르웬이 멈췄다.
"호위대는 보내되 성문 돌틈에 손대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먼저 주변에 은빛 가루나 이상한 냄새가 있는지 기록하고요. 약초 상자는 불 가까이에 두지 말고 마른 천으로 감싸요."
카시안이 물었다.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나."
에리나는 손목을 감싼 소매를 조용히 쥐었다.
"확실하지 않아요. 다만 대공성에서 본 것과 닮았어요. 닮았다고 같은 것은 아니니까 함부로 정하면 안 돼요."
"알겠다. 기록만 먼저 하겠다."
그 짧은 대답에 에리나는 숨을 내쉬었다.
마르바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그래도 문성 대응은 대공의 명령으로 진행하는 편이 절차상 안전합니다. 대공비 전하의 상태가 온전하지 않다는 주장이 나올 수 있습니다."
카시안이 말을 잇기 전에 에리나가 먼저 입을 열었다.
"대공님 명령으로 보내세요."
회랑이 잠시 조용해졌다.
에리나는 말을 고르며 장부를 덮었다.
"하지만 제 말을 빼지는 말아 주세요. 제가 지휘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장부를 봤어요. 약초가 도착해야 한다고 말한 사람이 있다는 걸 남겨 주세요. 제 이름이 심의 문서에서만 쓰이지 않게요."
카시안은 문밖에서 오래 침묵했다.
그는 아마 그 문을 열고 싶을 것이다. 에리나가 창백한 얼굴로 장부를 붙드는 모습을 직접 보고 싶을 것이다. 아니면 장부를 치우고 쉬라고 말하고 싶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
"로젤리."
"예, 전하."
"적어라. 대공비 에리나 발레리우스는 북쪽 문성 물자 장부를 확인하고 열병 약초와 겨울 물자가 주민에게 도착해야 한다고 알렸다. 이 기록은 혼인, 지위, 삼 일 뒤 발언에 대한 의사 표시가 아니다."
펜이 멈추지 않고 움직였다.
"그리고 대공의 명령. 북쪽 문성 긴급 물자는 즉시 통과시킨다. 황태후궁의 확인표는 최종 봉쇄 명령이 아니며 주민의 생명과 난방을 늦출 근거가 되지 않는다."
에커리 몬르디아가 지금까지 침묵하던 입을 열었다.
"전하. 확인표의 문장상 재검토는 보류에 가깝습니다. 대공가의 긴급 통과권을 멈추라는 직접 명령은 아닙니다. 다만 황태후궁은 전하께서 절차를 무시했다고 주장할 겁니다."
"주장하라고 해라."
카시안의 대답은 차가웠다.
"기록에는 절차보다 먼저 멈춘 수레와 약초 상자가 있었다고 남긴다."
에리나는 창밖을 보았다. 겨울 하늘은 낮게 내려앉아 있었고 정원 끝 나뭇가지에는 성에가 희게 맺혀 있었다. 북쪽 문성도 저런 하늘 아래 있을 것이다.
그곳의 아이들은 누군가의 심의가 끝날 때까지 기침을 멈출 수 없을 터였다.
"미나."
"예."
"약초 목록을 한 장 더 써 줄래요? 수레 안 상자 순서를 바꿔야 해요. 열병 약초와 설백 뿌리는 가장 안쪽에 넣어요. 담요 사이에 끼워 두라고요."
미나는 이내 작은 탁자를 가져왔다. 에리나는 손이 떨려 글자를 직접 쓰지 못했다. 대신 하나씩 불러 주었다.
"말린 해열초 두 상자. 설백 뿌리 한 상자. 수지 병은 흔들리지 않게 장작 수레에 싣지 말고요."
"알겠어요."
카시안이 문밖에서 물었다.
"그 목록도 전서에 넣겠다. 더 필요한 것이 있나."
에리나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필요한 것은 많았다. 문성이 안전한지 확인할 사람도 필요했다. 검은 서리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그곳에 가서 돌틈에 손을 대고 싶은 충동도 있었다.
하지만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지금 무리해 쓰러지면 누군가 또 그녀의 말을 대신 정하려 할 것이다.
"제가 문성에 가겠다고 정하지는 말아 주세요."
카시안의 숨이 아주 작게 멎었다.
"정하지 않는다."
"지금은 수레가 먼저예요. 호위대가 돌아오면 기록을 가져와 주세요. 제가 볼 수 있을 때요."
"두드리고 기다린 뒤에."
에리나는 그 말에 아주 조금 웃었다.
"네."
아르웬이 전서를 받아 들었다.
"즉시 보내겠습니다."
그가 돌아서려는 순간 에리나가 다시 불렀다.
"아르웬 경."
"말씀하십시오."
"문성에 전해 주세요. 제가 장부를 봤다고요."
아르웬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대공비 전하께서요?"
"네. 아직 제가 무엇을 선택할지는 말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북부 사람들이 기다리는 수레가 있다는 건 봤어요. 그건 전해도 돼요."
아르웬은 검을 쥔 손을 가슴 앞에 올렸다.
"반드시 전하겠습니다."
발소리가 멀어졌다. 로젤리와 에커리도 뒤따라 회랑 끝으로 물러났다. 마르바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문밖에는 카시안만 남아 있었다.
에리나는 그의 그림자가 바닥에 길게 드리운 것을 보았다. 그는 문턱을 넘지 않았다. 들어와도 되느냐고 묻지도 않았다.
"대공님."
"듣고 있다."
"오늘 장부를 본 걸... 잘했다고 말해 주지 않아도 돼요."
카시안은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럼 무엇을 말하면 되지."
에리나는 창가의 빈 화분을 바라보았다.
"수레가 가게 됐다고만 말해 주세요."
문밖에서 낮은 숨소리가 들렸다.
"수레는 간다."
그 말은 칭찬도 약속도 아니었다.
에리나가 장부 위에 손을 올렸다. 창밖의 바람이 유리창을 가볍게 울렸다. 북쪽 문성까지 닿기에는 아직 멀었다. 적어도 얼어붙은 성문 앞의 수레는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그 성문 돌틈에 번진 검은 서리는, 대공성 바닥 아래에 남아 있던 어둠처럼 조용히 다음 길을 기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