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귀환 무신의 백수 생활

시놉시스
무림에서 천하제일인의 자리에 올랐던 강한얼, 꿈에 그리던 고향 지구로 귀환하다!
하지만 돌아온 지구는 게이트와 헌터가 판치는 세상.
피 튀기는 전장은 이제 지긋지긋하다.
그의 목표는 오직 하나, 정년이 보장되는 평범한 9급 공무원으로서의 삶!
하지만 세상은 그를 가만두지 않는데...
무심한 무신의 파란만장한 현대 주민센터 적응기.
1화. 무신(武神), 동사무소로 출근하다.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거대한 세계의 축이 뒤틀리는 진동에 가까웠다.
피로 물든 대지 위, 수만 명의 무사들이 숨을 죽인 채 단 한 사람을 우러러보고 있었다.
강한얼.
사람들은 그를 '무신(武神)'이라 불렀고, 적들은 그를 '만마의 왕'이라 부르며 두려워했다.
오십 년.
그가 이 낯선 땅, 중원무림에 떨어져 검 한 자루로 천하를 제패하기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드디어... 때가 되었군."
한얼의 눈앞에 거대한 백색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었다.
차원 이동의 문.
그토록 갈망하던 고향, 지구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그의 도포자락은 이미 적들의 선혈로 검붉게 변해 있었고, 손에 쥔 검날은 수천 번의 합을 겨룬 끝에 이가 빠져 있었다.
-정말로 가시겠습니까? 이곳의 모든 부귀영화와 권력을 버리고?
허공에서 들려오는 시스템의 무기질적인 목소리에 한얼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의 발치에는 천하를 호령하던 신검(神劍) 조각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지긋지긋하다는 듯 검 손잡이를 바닥에 버렸다.
"부귀영화? 그런 건 너나 많이 해라. 난 가서 따뜻한 바닥에 등 지지고 배달 음식이나 시켜 먹을 거니까. 아, 차가운 캔커피도 그립네."
한얼은 망설임 없이 소용돌이 속으로 몸을 던졌다.
등 뒤에서 수많은 추종자가 오열하며 그의 이름을 연호했다.
"주군! 어찌 저희를 버리시나이까!"
"무신각하! 돌아오소서!"
처절한 외침들이 귓가를 때렸지만, 그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전쟁, 매일같이 반복되는 살육, 그리고 어깨를 짓누르던 천하제일인의 무게.
이제는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코끝을 간지럽히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였다.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소리, 옆방에서 들려오는 희미한 TV 소음.
"하아... 하아..."
한얼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상체를 일으켰다.
시야에 들어온 것은 낡은 노란 벽지와 삐걱거리는 싱글 침대, 그리고 구석에 쌓인 먼지 섞인 전공 서적들.
서울 관악구의 어느 허름한 고시원 방이었다.
"돌아... 왔어."
그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무림에서의 오십 년 세월이 꿈이었던 것처럼, 그의 몸은 차원을 넘어오며 다시 스무 살 청년의 매끄러운 피부로 되돌아가 있었다.
하지만 피부 아래 흐르는 기운은 달랐다.
비록 명시적인 내공의 바다는 증발한 듯 보였으나, 뼈 마디마디에 새겨진 무의 정수와 뇌리에 각인된 초감각은 여전히 서늘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한얼은 떨리는 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낡은 스마트폰을 켰다.
[202X년 6월 3일 수요일]
그가 실종된 지 딱 2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2년이라... 거기선 50년이었는데. 세상 참..."
그는 헛웃음을 터뜨리며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다.
하지만 안도의 한숨도 잠시, 인터넷 창을 메운 뉴스 헤드라인들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속보: 강남역 인근에 S급 게이트 출현... 인명 피해 속출]
[신성 길드, 이번 분기 몬스터 부산물 수출액 1조 돌파]
[당신도 각성할 수 있다! 헌터 아카데미 수강생 모집 중]
세상은 그가 알던 것보다 훨씬 더 미쳐 있었다.
실종 기간 동안 지구에는 '대각성 시대'가 열렸고, 세계 곳곳에 게이트가 생겨났으며 몬스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에 맞춰 초능력을 가진 '헌터'들이 영웅 대접을 받는 시대.
한얼은 조용히 스마트폰을 내려놓았다.
"헌터? 웃기고 있네. 또 사람 죽이고 칼 휘두르는 일을 하라고? 절대 안 해."
그는 결심했다.
이번 생은 가늘고 길게 살겠다고.
남들의 눈에 띄지 않고, 국가가 보장해주는 정년을 꽉 채우며 평범하게 늙어 죽겠다고.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월급날의 소소한 치맥이 유일한 낙인 그런 삶.
그날 이후, 한얼은 고시원에 처박혀 공부에 매진했다.
무림에서 생사를 넘나들며 다져진 집중력은 수험 공부 따위엔 과분할 정도였다.
두꺼운 행정법 교재를 한 번 읽으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웠고, 영어 단어 수천 개를 하루 만에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주위 수험생들이 "저 친구는 귀신이 들린 게 분명해"라며 수군거릴 때도, 그는 오직 공무원 연금법만을 생각하며 펜을 굴렸다.
결국 귀환 1년 만에, 그는 '9급 일반행정직' 공무원 시험에 전 과목 만점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당당히 합격했다.
"좋아, 완벽해. 이보다 더 평범해 보일 순 없지."
거울 앞에 선 한얼은 만족스러운 듯 넥타이를 매만졌다.
적당히 시장에서 파는 저렴한 흰 와이셔츠에 남색 정장 바지, 그리고 반짝거리는 검은 구두.
무신의 안광은 뿔테 안경 너머로 숨겼고, 맹수 같은 근육은 넉넉한 핏의 자켓 아래 감추었다.
누가 봐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풋풋하고 조금은 어리숙해 보이는 신입 공무원의 모습이었다.
오늘은 그의 역사적인 첫 출근일이었다.
발령지는 동작구의 어느 조용한 주민센터.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신규 발령받은 강한얼입니다!"
주민센터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후끈한 에어컨 열기와 함께 종이 넘기는 소리, 쉴 새 없이 울려대는 전화 벨소리가 섞여 들어왔다.
복사기에서는 특유의 탄내가 풍겼고, 창구 너머에서는 민원인 몇몇이 지루한 표정으로 번호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오, 강한얼 씨? 이쪽으로 와요. 기다리고 있었어."
한얼을 반긴 사람은 배가 약간 나오고 인상이 좋아 보이는 중년 남성이었다.
"반가워요. 난 박석두 과장이라고 해요. 우리 센터에 남직원이 귀했는데 잘됐네. 인상이 아주 선해 보여서 마음에 들어."
"잘 부탁드립니다, 과장님! 시키시는 일은 무엇이든 열심히 하겠습니다!"
한얼은 허리를 폴더처럼 굽혀 인사했다.
과거 무림맹의 원로들이 이 광경을 봤다면 기겁하며 뒷목을 잡았겠지만, 지금의 한얼에게 박 과장은 천마보다 더 무서운 인사권자일 뿐이었다.
"자, 강한얼 씨는 일단 여기 민원 창구 옆자리에 앉아서 업무 좀 배워봐요. 박 서기, 우리 신규 좀 잘 챙겨주고. 오늘 점심은 짜장면 곱빼기로 내가 쏜다!"
"오예! 과장님 최고! 한얼 씨, 이쪽으로 오세요."
한얼은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의자를 당겼다.
책상 위에 놓인 모니터와 키보드, 그리고 '강한얼'이라는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박힌 아크릴 이름표.
그는 가슴 한구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이거야. 피 냄새 없는, 종이 냄새와 커피 냄새가 가득한 평화로운 삶.'
옆자리 박 서기가 건네준 업무 매뉴얼을 훑어보며, 한얼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주민등록등본 발급, 전입신고 수리, 대형 폐기물 스티커 판매...
이 얼마나 숭고하고 평화로운 업무인가.
그는 진심으로 이 생활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신은, 아니 이 망할 시스템은 그를 가만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우우우웅!
갑자기 발밑에서 기분 나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에는 대형 트럭이 지나가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진동은 점점 강해졌고,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미친 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한얼의 목덜미에 돋은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이것은 살기(殺氣)였다.
무림의 피비린내와는 또 다른, 차갑고 습한 재앙의 기운.
"응? 뭐야, 지진인가? 어어, 저기 봐!"
"세상에, 또 시작이야?"
민원인들과 직원들이 웅성거리며 창가로 몰려들었다.
한얼의 미간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주민센터 바로 앞, 노란색 학원 버스가 서 있던 횡단보도 한복판.
공간이 마치 유리창이 깨지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일그러지더니, 거대한 검은 구멍이 뚫리고 있었다.
그 구멍 속에서는 마치 썩은 고기 냄새 같은 악취가 쏟아져 나왔다.
[경보: 인근 지역에 C급 게이트가 발생했습니다. 시민 여러분께서는 즉시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립니다...]
스피커에서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평화롭던 주민센터는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겁에 질린 할머니의 비명 소리, 아이를 안고 뛰는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좁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아이고, 하필이면 우리 앞이야! 박 서기! 빨리 민원인들 뒷문으로 대피시켜! 헌터 관리국에 연락하고!"
박 과장이 당황하며 서류 뭉치를 떨어뜨렸다.
하지만 한얼은 자리에 가만히 앉아 검게 변해가는 하늘을 응시했다.
'C급...? 장난하나.'
정부의 감지 장치는 속을지 몰라도, 무신의 직감은 속일 수 없었다.
저 균열 너머에서 꿈틀대는 것은 결코 하찮은 C급 따위가 아니었다.
공간을 찢고 나오는 그 서늘한 마력의 압력은, 최소 A급 이상의 재앙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리고 있었다.
"한얼 씨! 멍하니 뭐 해요! 빨리 대피해야지!"
박 서기가 겁에 질린 얼굴로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얼은 한숨을 깊게 내쉬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첫 출근 1시간 만에 게이트.
그것도 내 직장 바로 앞에서.
이건 우연이라기엔 너무나도 악의적인 운명의 장난이었다.
"나 진짜... 조용히 살고 싶었는데."
한얼이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 순간,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어리숙해 보이던 신입 공무원의 눈매가, 천하를 호령하던 무신의 서늘하고도 깊은 안광으로 변했다.
그는 소매를 걷어붙였다.
셔츠 아래 숨겨져 있던 그의 팔 근육이 강철처럼 단단하게 조여지며 꿈틀댔다.
아무래도 오늘 정시 퇴근은 물 건너간 것 같았다.
아니, 자칫하면 이 소중한 주민센터 건물 자체가 날아가게 생겼다.
"과장님."
한얼의 낮은 목소리가 혼란스러운 공간 속을 뚫고 박 과장의 귓가에 정확히 꽂혔다.
"어, 어? 왜 그래, 한얼 씨?"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배가 좀 아파서요."
"아니, 지금 이 상황에 화장실이...! 야! 강한얼!"
박 과장의 외침을 뒤로한 채, 한얼은 유유히 화장실이 아닌, 게이트가 열리고 있는 정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걸음걸이는 소리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가벼웠지만, 그 발걸음 하나하나에 대기가 무겁게 눌리고 있었다.
'평화로운 백수 생활을 방해하는 놈들은... 다 뒤졌어.'
주민센터 문을 열고 나가는 무신의 뒷모습 위로, 검은 게이트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졌다.
지구 귀환 후 첫 번째 '참교육'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