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겜 시녀장은 식단표로 반란을 막는다

1화: 첫 식단표
세탁실 바닥은 차가웠다.
한서윤은 젖은 천 냄새 속에서 눈을 떴다. 천장에는 한국 원룸의 누런 형광등 대신 검게 그을린 들보와 거미줄이 걸려 있었다.
"시녀장님?"
문밖에서 어린 하녀가 숨 가쁘게 불렀다.
"아침 세탁물 분류가 밀렸습니다. 주방에서도 저녁 식단 확인을 재촉하고요."
시녀장.
서윤은 그 단어에서 숨이 멎었다. 마지막 기억은 서버 종료 화면이었다. 아무도 클리어하지 못한 망겜, 라스트 베일의 귀족가. 검은 화면 위에 뜬 미공개 문구.
시녀장 루트 개방.
그리고 지금, 누군가 그녀를 시녀장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손을 짚고 일어나자 손등에 작은 흉터들이 보였다. 그녀의 손이 아니었다. 그러나 손가락은 낯선 열쇠 꾸러미를 자연스럽게 더듬었다. 허리춤 오른쪽 두 번째 고리. 세탁실 열쇠. 왼쪽 안쪽 주머니. 시녀장 사무실 열쇠.
몸이 알고 있었다.
"곧 간다."
입에서 나온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서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하녀는 더 묻지 않았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이 짧게 명령하는 사람이었다는 뜻이었다.
엘나 로웬.
게임에서 첫날 독살 누명을 쓰고 처형되는 시녀장 NPC. 대사 세 줄도 없던 이름.
서윤은 세탁실 문을 열었다. 하인 구역 복도는 좁고 축축했다. 젖은 앞치마를 든 소녀들이 벽에 붙어 고개를 숙였다. 누구도 그녀를 낯선 사람처럼 보지 않았다.
그러니까 문제는 하나였다.
오늘이 며칠째인가.
시녀장 사무실은 복도 끝에 있었다. 서윤은 몸의 기억을 따라 책상 서랍을 열었다. 장부, 식단표, 동선표가 칼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손끝이 떨렸다. 그래도 식단표부터 펼쳤다.
벨라노르 공작 실종 17일째.
저녁. 막내 후계자 이안 벨라노르. 오리 수프, 구운 뿌리채소, 흰 빵, 꿀물.
서윤의 머릿속에서 원작 첫날이 맞물렸다.
이안은 오리 수프를 먹고 쓰러진다. 엘나는 검식 책임자로 잡혀 처형된다. 저택은 후계자 독살 소문으로 무너지고, 30일차 하인 파업 루트가 앞당겨진다.
"미친."
작게 욕이 샜다.
그때 식단표 글자 위로 흐릿한 회색 선이 겹쳤다.
[영양 결핍: 하인 식당 72%]
[소문 압력: 후계자 식사 46%]
[암살 동선: 남쪽 복도-소식당 81%]
[독 노출 위험: 오리 수프 89%]
상태창은 아니었다. 레벨도, 스킬도, 체력도 없었다. 문서 위에만 번지는 얼룩 같은 로그였다.
범인 이름은 없었다. 독 이름도 없었다.
다만 방향은 충분했다.
서윤은 식단표를 움켜쥐었다.
"칼 없이 시작하라는 거지."
그녀는 장부 옆의 검식표를 끌어왔다.
"좋아. 그럼 냄비부터 움직인다."
주방은 이미 전쟁터였다.
마리 도일은 밀가루 묻은 앞치마 차림으로 큰 냄비 앞에 서 있었다. 둥근 얼굴에는 피곤함과 짜증이 같이 얹혀 있었다.
"시녀장님, 늦으셨습니다. 오리 수프는 두 시간 끓였습니다. 이제 와서 손대면 저녁 시간이 밀립니다."
"오리 수프는 후계자 식탁에서 뺀다."
주방의 칼질 소리가 끊겼다.
마리의 눈썹이 올라갔다.
"뭐라고요?"
"후계자 식탁에는 보리죽과 닭육수를 올린다. 오리 수프는 세 냄비로 나누고, 검식 순서는 바꾼다."
"하인 검식으로 돌리겠다는 뜻입니까?"
마리가 웃지 않는 얼굴로 다가왔다.
"하인들이 독 먹어도 된다는 말이면, 제가 먼저 반대합니다."
그 말에 서윤은 마리를 다시 보았다. 주방장은 거칠었지만, 자기 사람을 소모품으로 내놓을 사람은 아니었다.
"아니. 아무도 바로 먹지 않는다."
서윤은 냄비 주변을 훑었다. 소금 항아리는 오른쪽, 향신료 주머니는 창가, 검식 숟가락은 물통 옆. 원작 공략글에서 수십 번 본 주방 배치와 비슷했다.
식단표를 다시 들자 회색 문장이 더 얇게 떠올랐다.
[독 노출 위험: 오리 수프 89%]
[검식 순서 신뢰도: 18%]
[향신료 출처 불일치]
"저 향신료 주머니 봉인해. 오리 수프는 세 냄비로 나누고, 첫 확인은 은수저로 한다. 사람 입에 들어가기 전 색부터 본다."
"은수저는 후계자 식기입니다."
"그래서 쓰는 거다."
마리의 표정이 험해졌다. 그러나 서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오리 수프를 그대로 올리면 저녁 종이 울리기 전에 주방에서 누군가 죽거나, 후계자가 죽는다. 둘 중 하나다."
"근거는요?"
"식재료 장부."
서윤은 시녀장 장부를 펼쳐 마리 앞에 밀었다. 실제로는 로그를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장부는 빈약한 근거였다. 그래도 숫자는 있었다.
"어제 들어온 월계수 잎은 두 묶음. 오늘 남은 건 반 묶음. 오리 한 마리에 쓸 양이 아니야. 소금 항아리 위치도 검식대보다 후계자 배식대에 가깝다. 누군가 검식 이후에 손댈 수 있어."
마리의 입술이 굳었다.
"그걸 왜 이제 말합니까?"
"나도 방금 봤으니까."
너무 솔직했나 싶었다. 하지만 마리는 그 말보다 장부의 수량에 먼저 반응했다. 피곤한 주방장은 변명보다 숫자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닭육수는 묽습니다. 귀족 식탁에 올릴 꼴이 아닙니다."
"흰 빵을 잘게 찢어 넣어. 꿀물은 빼고 따뜻한 보리차로 바꾼다. 이안 님은 오늘 속이 불편하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적어."
"그런 보고 없었습니다."
"지금부터 생긴다."
마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시녀장님, 오늘 이상하십니다."
그 말에 심장이 한 번 내려앉았다. 서윤은 장부를 덮었다.
"이상해도 살아 있는 편이 낫지."
주방 뒤쪽에서 누군가 작은 웃음을 삼켰다. 긴장이 아주 조금 깨졌다.
서윤은 바로 지시를 쏟았다.
"남쪽 복도로 후계자 식사를 옮기지 않는다. 동쪽 계단으로 돌아가. 촛대 두 개는 치우고 물통을 복도 중앙에 둬. 식사 전후로 주방 하인 교대 시간을 15분 늦춘다."
"동선까지요?"
"수프가 아니라 길이 문제일 수도 있다."
그때 문서철을 든 남자가 주방 입구에 섰다. 은테 안경, 장갑, 정중한 목소리.
"시녀장님. 후계자 식사 동선을 임의로 바꾸는 건 집사실 승인 사안입니다."
카일 브렌.
서윤은 이름을 떠올리는 동시에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원작에서 카일은 엘나 처형 문서에 서명하는 집사 대리였다.
"승인해."
"저는 질문했습니다."
"나는 명령했다."
카일의 시선이 장부로 내려갔다.
"평소보다 거칠군요."
"평소대로면 오늘 저녁이 더 거칠어진다."
카일은 잠시 침묵했다.
"공작 실종 이후 후계자 식사 절차는 정치적 의미가 큽니다. 보리죽을 올리면 저택 안에 병색 소문이 돕니다."
서윤은 식단표를 들어 보였다.
"오리 수프를 올리면 장례 소문이 돈다."
주방이 다시 조용해졌다.
카일은 그녀의 얼굴을 오래 보았다. 의심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집사 대리는 저택의 위험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공작이 사라진 뒤, 모든 기록은 누군가의 칼집이 되었다.
"절차 변경 사유를 기록하겠습니다."
"남겨. '시녀장 엘나 로웬의 판단으로 검식 절차 강화'라고."
"책임을 지겠다는 뜻입니까?"
서윤은 손끝의 떨림을 주먹으로 눌렀다.
엘나 로웬은 원작에서 책임을 지고 죽었다. 이번에도 책임은 이 몸으로 올 것이다.
"책임질 사람이 살아 있으려면 후계자부터 살아 있어야지."
저녁 종이 울리기 전, 동쪽 계단 쪽 촛대가 치워졌다. 물통은 복도 중앙에 놓였고 하녀 둘이 흘린 물을 닦는다는 명목으로 남쪽 복도 입구를 막았다.
이안 벨라노르는 소식당 앞에서 멈춰 섰다.
은발의 소년은 단추를 목 끝까지 잠그고 있었다. 얼굴은 창백했지만 등은 꼿꼿했다.
"엘나."
어린 목소리인데도 일부러 낮췄다.
"내 식사가 바뀌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픈 적 없다."
"아프기 전에 바꿨습니다."
이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린 후계자는 겁을 숨기려고 예의를 썼다.
"공작가답지 않은 식사군."
"공작가답게 살아남는 식사입니다."
옆에서 카일이 작게 숨을 들이켰다. 마리도 쟁반을 든 채 표정을 굳혔다.
서윤은 무릎을 굽히지 않았다. 아이를 안심시키는 말을 할 자신도 없었다. 대신 검식표를 내밀었다.
"오늘부터 후계자 식사는 검식 순서를 바꿉니다. 은수저 확인, 시녀장 확인, 주방장 확인, 마지막으로 후계자 식탁입니다."
"나를 못 믿는다는 뜻인가?"
"후계자님을 노리는 환경을 믿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주방 쪽에서 짧은 비명이 들렸다.
마리가 쟁반을 내려놓고 달려갔다. 서윤도 따라 움직였다.
원래 이안의 식탁에 오를 예정이던 오리 수프 냄비 옆, 은수저 하나가 검게 죽어 있었다. 완전히 검은색은 아니었다. 수저 끝부터 잿빛 얼룩이 퍼져 있었다.
주방 하인들이 뒤로 물러났다.
"독입니까?"
누군가 속삭였다.
서윤은 냄비를 보았다. 식단표 없이도 목이 말랐다. 그러나 장부를 펼치자 로그가 떠올랐다.
[독 노출 위험: 오리 수프 89% -> 21%]
[암살 동선: 남쪽 복도-소식당 81% -> 43%]
[소문 압력: 주방 46% -> 63%]
[대연회 반란: 측정 불가]
마지막 줄은 너무 흐려서 눈을 찡그려야 보였다.
대연회.
150일차. 원작의 몰살 루트.
서윤은 냄비 뚜껑을 닫았다.
"이 냄비는 폐기하지 않는다. 봉인한다. 향신료 주머니, 검식 수저, 배식표도 같이 묶어."
마리가 낮게 물었다.
"범인을 찾으시려는 겁니까?"
"아니."
서윤은 주방 입구와 남쪽 복도를 번갈아 봤다. 누군가는 지금 이 혼란을 보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지 모른다. 로그도 알려 주지 않는다.
"먼저 다음 식사를 망치지 않게 할 거야."
이안이 문가에 서 있었다. 아이의 얼굴은 더 창백해져 있었다.
"내가 먹을 거였나?"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서윤은 거짓말하지 않았다.
"예."
이안의 손이 소매 끝을 움켜쥐었다. 그래도 울지 않았다.
"그럼 나는 보리죽을 먹겠다."
그 말은 명령이라기보다 버티는 선언이었다.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따뜻할 때 드셔야 합니다."
이안이 돌아서자, 카일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시녀장님은 오늘 저녁 많은 적을 만드셨습니다."
"하나 줄였어."
"무엇을 말입니까?"
서윤은 검게 변한 은수저를 보았다.
"시체."
밤이 내려앉을 무렵, 주방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마리는 오리 수프 냄비를 천으로 싸고 밀랍을 찍었다. 카일은 기록을 남겼다. 하녀들은 남쪽 복도를 닦는 척 서성였다.
서윤은 시녀장 사무실로 돌아와 새 식단표를 썼다.
내일 아침. 하인 식당 죽 농도 조정.
주방 창고 실사.
향신료 출처 확인.
후계자 식사 동선 동쪽 계단 고정.
손이 멈췄다.
이건 게임 공략이 아니었다. 수치가 낮아져도 사람들의 눈빛은 남았다. 마리의 의심, 카일의 기록, 이안의 창백한 얼굴.
서윤은 펜 끝을 다시 눌렀다.
그래도 첫날은 넘겼다.
그때 문이 아주 작게 두 번 두드려졌다. 마리였다. 밀가루 묻은 앞치마는 그대로였고 얼굴에는 아까보다 깊은 주름이 져 있었다.
"시녀장님."
"말해."
마리는 문밖을 한 번 살피고 낮게 말했다.
"장부하고 창고 수량이 안 맞습니다. 오늘만 그런 게 아닙니다."
서윤은 새 장부를 펼쳤다.
회색 로그가 종이 위로 번졌다.
[식재료 누락: 18일 누적]
[하인 불만: 상승]
[다음 위험: 주방]
서윤은 숨을 길게 내쉬었다.
첫 수프는 막았다.
하지만 저택은 아직 굶주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