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벨 1로 지구를 구하는 법

시놉시스
게이트가 열리고 시스템이 도입된 지 15년.
F급 던전에서 짐꾼으로 살아가던 차강현은 던전 브레이크 사고로 죽음의 위기에 몰린 순간 시스템 오류로 특수 규칙 [절대 상쇄: 1]을 각성한다.
대가는 가혹했다.
레벨도 스탯도 영원히 1.
대신 그에게 들어오는 모든 피해도 1이 되고 그가 건드린 적의 마력도 1이 된다.
가장 낮은 숫자로 가장 높은 괴물들을 끌어내리는 레벨 1 짐꾼의 생존기가 시작된다.
1화: 짐꾼은 한 번만 죽는다
차강현은 오늘도 제일 뒤에서 걸었다.
앞에는 검을 든 헌터 셋이 있었다. 가운데에는 화염술사 민재가 있었고 맨 앞에서는 박도윤 팀장이 손전등처럼 생긴 탐지기를 흔들었다.
강현의 등에만 배낭이 두 개였다.
물. 붕대. 싸구려 포션. 빈 마석 포대. 예비 탄창. 헌터들이 전투 중에 떨어뜨린 장비를 주워 담을 보조 가방까지.
짐꾼이라는 이름은 그럴듯했다.
실제 업무는 살아 있는 창고였다.
"짐꾼. 처지지 마라."
도윤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강현은 어깨끈을 고쳐 멨다. 끈이 땀에 젖은 옷을 파고들었다.
"처지면 제가 먼저 죽는데요."
"아니까 빨리 걸어."
농담으로 던진 말이 명령으로 돌아왔다.
강현은 대꾸를 삼켰다. 던전 안에서 팀장에게 말대꾸해 봐야 돌아오는 건 다음 계약 배제뿐이었다.
F급 균열 던전.
위험도 낮음. 출현 몬스터는 쇠비늘 쥐와 잿빛 고블린. 의뢰서에는 그렇게 적혀 있었다.
문제는 의뢰서가 짐꾼의 목숨값을 계산해 주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강현은 다섯 해 동안 남의 물통을 들고 남의 칼집을 챙기고 남이 떨어뜨린 마석을 주웠다. 각성 검사는 세 번 받았다. 결과는 늘 비슷했다.
전투 적성 없음.
보조 적성 미미.
시스템 반응 불안정.
협회 직원은 최대한 정중하게 웃었다.
너는 헌터가 아니니 짐이나 들어라.
그 말을 듣고 강현은 진짜로 짐을 들었다. 굶어 죽는 것보다는 던전에서 욕먹는 쪽이 조금 더 늦게 죽었다.
"왼쪽 통로 정리."
도윤이 손짓했다.
검을 든 헌터 둘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잿빛 고블린 두 마리가 비명을 지르기도 전에 쓰러졌다. 민재가 손끝에서 불꽃을 튕겨 남은 마기를 태웠다.
"마석."
도윤이 짧게 말했다.
강현은 그제야 앞으로 갔다. 무릎을 굽히고 포대 입구를 벌렸다. 아직 따뜻한 몬스터 사체에서 작은 마석을 뽑아 넣었다.
사체 냄새는 몇 년을 맡아도 익숙해지지 않았다.
그때 벽이 울었다.
처음에는 먼 곳의 천둥 같았다.
다음에는 동굴 전체가 숨을 쉬는 듯했다.
검은 벽면 사이로 붉은 금이 가늘게 번졌다. 금은 살아 있는 핏줄처럼 꿈틀거리더니 순식간에 천장까지 올라갔다.
"팀장님."
민재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졌다.
"마력 농도 이상합니다. F급 수치가 아닌데요."
"탐지기 멀쩡해?"
"정상입니다. 수치가 계속 뜁니다."
도윤이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여기 재측정 끝난 던전이야."
말이 끝나기 전에 바닥이 꺼졌다.
뒤쪽 통로에서 굉음이 터졌다. 출구로 향하던 길이 돌무더기 아래로 사라졌다. 먼지와 자갈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강현은 본능적으로 배낭끈을 풀었다.
"짐 버리지 마!"
도윤이 소리쳤다.
"포션이랑 마석 놓고 튀면 네 일당 없다."
강현은 잠깐 웃었다.
웃음이 나올 상황이 아니어서 더 웃겼다.
"일당 받을 사람이 살아 있어야죠."
"입 다물고 들어. 네가 앞에 서."
"예?"
"보급품 내려놓고 몬스터 시선만 끌어. 우리가 길 뚫는다."
강현은 도윤을 바라봤다.
그 눈빛은 이미 계산을 끝낸 사람의 눈빛이었다. 검을 든 헌터들도 강현을 보지 않았다. 그들의 시선은 막힌 출구와 강현의 배낭 사이를 오갔다.
짐꾼이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위험해서 돈을 조금 더 줬다. 위험해서 계약서에 책임 면제 조항이 빽빽했다.
그래도 사람을 방패처럼 세우겠다는 말을 이렇게 쉽게 들을 줄은 몰랐다.
통로 끝에서 무언가 걸어 나왔다.
붉은 턱뼈가 먼저 보였다.
그다음은 사람 키의 두 배가 넘는 몸집이었다. 어깨 위로 타오르는 불꽃이 갈기처럼 흔들렸다. 발을 디딜 때마다 돌바닥이 움푹 꺼졌다.
오우거였다.
그것도 F급 던전에서 나올 리 없는 놈이었다.
민재가 창백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붉은턱 오우거... C급 보스잖아."
"전원 후퇴!"
도윤이 가장 먼저 몸을 돌렸다.
그는 무너진 출구 쪽으로 뛰다가 돌무더기 앞에서 멈췄다. 막힌 길을 보자 눈동자가 빠르게 굴렀다.
강현은 그 눈빛을 보고 다음 명령을 먼저 알았다.
"짐꾼. 저쪽으로 뛰어."
"싫습니다."
"뭐?"
"저도 죽기 싫습니다."
오우거가 숨을 들이마셨다.
동굴 안의 열기가 한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강현의 목덜미에 난 땀이 순식간에 말랐다. 목구멍이 뜨거운 모래로 막히는 느낌이었다.
도윤이 강현의 어깨를 밀쳤다.
강현은 앞으로 넘어졌다. 배낭 속 포션 병들이 등에서 깨지는 소리가 났다. 유리 조각이 옆구리를 긁었다.
"야!"
강현이 몸을 일으키려는 순간 붉은 불길이 눈앞을 채웠다.
죽는구나.
생각은 짧았다.
억울함도 짧았다.
부모님 장례식 때 빌린 돈을 아직 다 갚지 못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반지하 방 싱크대 밑에 숨겨 둔 라면 두 봉지도 떠올랐다. 그 사소한 것들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더 억울했다.
그 뒤로 아주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시스템 응답 지연]
[생존 개체 확인]
[권한 충돌]
[오류 코드 0001]
강현은 눈을 감고 있었다.
뜨거워야 할 살갗이 뜨겁지 않았다. 숨이 끊어져야 할 폐가 아직 움직였다. 탄 냄새는 났지만 자신의 몸이 타는 냄새는 아니었다.
[각성 조건 강제 충족]
[특수 규칙 부여]
[절대 상쇄: 1]
[대가 적용]
[레벨: 1]
[근력: 1]
[민첩: 1]
[체력: 1]
[마력: 1]
[최대 체력: 10]
강현은 눈을 떴다.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 자신만 엎드려 있었다. 벽 쪽으로 튕겨 나간 헌터들이 신음했다. 민재의 소매에는 불이 붙었다가 저절로 꺼지고 있었다.
강현의 눈앞에는 반투명한 상태창이 떠 있었다.
[피해량: 1]
[현재 체력: 9/10]
"뭐야."
목소리가 갈라졌다.
살아 있었다.
옷은 그을렸고 머리카락 끝은 탔다. 그런데 팔도 다리도 붙어 있었다. 브레스가 직격했는데 화상 하나 제대로 없었다.
강현은 자신이 꿈을 꾸는 건지 의심했다.
오우거가 다시 입을 벌렸다.
그 의심은 오래가지 않았다.
체력 9.
한 번에 1.
그러면 아홉 번 더 버틴다.
하지만 여러 번 맞으면 죽는다.
그 계산이 머리를 차갑게 만들었다. 죽음이 사라진 게 아니었다. 죽음까지 가는 횟수가 표시됐을 뿐이었다.
강현은 깨진 배낭을 더듬었다.
유리 조각 사이에서 멀쩡한 빨간 포션 하나가 손에 잡혔다. 평소라면 남의 물건이라 만지지도 못할 물건이었다. 오늘은 그런 걸 따질 사람이 없었다.
뚜껑을 이로 물어 뜯고 한 모금 마셨다.
[체력이 1 회복되었습니다]
[현재 체력: 10/10]
강현의 눈이 커졌다.
"이건 좀 괜찮네."
일반 헌터에게는 생채기나 막아 주는 싸구려 포션이었다. 강현에게는 목숨 하나의 십분의 일이었다.
오우거가 팔을 휘둘렀다.
강현은 옆으로 구르려 했다. 마음은 빨랐지만 몸은 느렸다. 새 상태창이 말한 근력 1과 민첩 1은 농담이 아니었다.
두꺼운 손등이 강현의 옆구리를 때렸다.
뼈가 울리는 충격이 왔다. 몸이 바닥을 굴렀다.
[피해량: 1]
[현재 체력: 9/10]
아프긴 아팠다.
죽을 만큼은 아니었다.
강현은 바닥을 짚고 일어났다. 무릎이 후들거렸다. 몸은 여전히 약했고 숨은 가빴다. 그런데 공포 사이로 이상한 계산이 계속 떠올랐다.
한 방은 1.
포션은 1 회복.
저놈의 불은 아직 문제.
오우거가 세 번째로 숨을 들이마셨다. 턱뼈 사이에 붉은 빛이 모였다. 강현은 뒤로 도망치려다 멈췄다.
도망칠 속도가 없었다.
막을 방패도 없었다.
그러면 붙어야 했다.
"씨."
강현은 욕을 삼키고 앞으로 뛰었다. 뛰었다기보다는 넘어지듯 달렸다. 오우거의 발목까지 닿는 데 세 걸음이 걸렸다. 그 세 걸음이 평생처럼 길었다.
오우거의 입안에서 불꽃이 터지기 직전.
강현은 두 손으로 그놈의 발목을 붙잡았다.
뜨거운 털 아래 근육이 꿈틀거렸다.
다음 순간 오우거 몸을 감싸던 불꽃이 꺼졌다.
[대상 접촉]
[절대 마력 억제 적용]
[대상 현재 마력: 1/1]
오우거가 멍청한 소리를 냈다.
"크룩?"
방금까지 동굴을 녹일 듯 타오르던 불꽃이 재처럼 사라졌다. 입안에 모이던 브레스도 꺼졌다. 오우거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민재가 벽에 기대 눈을 깜빡였다.
"마력이... 없어졌어?"
도윤도 입을 벌렸다. 방금 강현을 밀친 손이 떨리고 있었다.
강현은 발목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심장은 여전히 미친 듯 뛰었다.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다. 저 주먹에 한 대씩 맞으면 숫자가 줄어든다. 열 번이면 끝이다.
그래도 처음으로 조건이 보였다.
상대도 뭔가를 잃었다.
강현은 바닥에 떨어진 짐꾼용 단검을 집었다.
칼날은 짧고 싸구려였다. 보스 몬스터에게는 이쑤시개나 다름없었다. 원래라면 붉은턱 오우거의 피부에 흠집도 못 냈을 물건이었다.
하지만 원래라는 말은 방금 불에 타 버렸다.
오우거가 불꽃 없는 주먹을 들었다.
강현은 포션 병을 주머니에 밀어 넣고 단검을 고쳐 쥐었다. 손이 떨렸다. 그래서 더 세게 쥐었다.
"너도 마력 1."
오우거가 낮게 으르렁거렸다.
"나도 마력 1."
강현은 웃을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이제부터 공평하게 하자."
오우거의 주먹이 떨어졌다.
강현은 옆으로 굴러 피했다. 완벽하게 피하지는 못했다. 어깨를 스치며 상태창이 다시 떴다.
[피해량: 1]
[현재 체력: 8/10]
강현은 이를 악물었다.
아홉 번도 아니고 이제 여덟 번.
그래도 죽지 않았다.
그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오우거의 발등을 향해 찔러 넣었다.
칼끝이 두꺼운 가죽에 닿았다.
상태창이 아주 작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