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천재 발명가는 은퇴하고 싶다

4화: 땅의 숨을 빌리는 창고
공방 문턱에는 젖은 짚 냄새가 배어 있었다.
소은은 아침부터 문짝을 반쯤만 열어 두었다. 물을 산으로 올린다는 소문이 읍내까지 갔다는 사실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낚싯대를 꺼내려던 그는 사립문 앞에 멈춘 짐수레를 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붉은 치마 끝을 단정히 여민 젊은 여인이 수레에서 내렸다. 그 뒤에는 돌쇠와 약초꾼 하나가 나무 상자 두 개를 들고 있었다.
“한소은 장인께 뵙습니다. 저는 설향이라 합니다.”
소은은 그 이름보다 상자 틈으로 흘러나온 눅눅한 흙 냄새를 먼저 맡았다.
“바가지 수리는 저쪽에 놓으십시오.”
“바가지가 아니라 인삼입니다.”
설향이 뚜껑을 열었다. 하얀 인삼 몇 뿌리가 젖은 종이 사이에서 누렇게 물러 있었다. 한 뿌리는 손가락으로 살짝 눌렀을 뿐인데 껍질이 밀려났다.
“관아 약초 곳간에 둔 물건입니다. 비가 이어지자 이 모양이 되었습니다. 더 썩기 전에 손을 써야 합니다.”
소은은 고개를 저었다.
“관아 일은 받지 않습니다.”
돌쇠가 눈치를 보며 뒤로 물러났다. 설향은 상자를 닫지 않았다.
“장인께서 물을 위로 보내셨다 들었습니다. 저는 인삼을 마른 곳에 두고 싶을 뿐입니다.”
“나는 물레방아를 조금 고친 겁니다.”
“그 조금이 겨울 약값을 지킵니다.”
설향의 목소리는 높지 않았다. 그러나 상자 옆에 선 약초꾼의 갈라진 손은 말보다 많은 것을 보였다.
“저이는 만복입니다. 산에서 인삼을 캐는 이들이 올가을에 관아로 넘길 물건을 제게 맡겼습니다. 이게 상하면 관아는 값이 떨어졌다 하고 약초꾼들은 겨울 양식을 잃습니다.”
만복이 모자를 벗어 쥐었다.
“아씨가 관기라서 관아 일이 된 것이지 저희 물건입니다. 장인께서 싫으시면 그냥 가겠습니다.”
소은은 그 말에서 걸음을 멈췄다. 관기라면 관아의 소유물처럼 부려질 신분이었다. 그럼에도 설향은 제 몫이 아닌 물건의 값을 지키려 이른 아침 산길을 넘어온 셈이다.
그는 물러진 인삼을 집었다. 겉만 젖은 것이 아니었다. 상자 바닥의 젖은 종이가 습기를 붙들고 있었다. 햇볕을 피해 문을 닫아 둔 곳간이라면 안에 찬 공기가 빠질 길도 없었을 것이다.
“곳간은 어디 있습니까?”
설향의 눈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와 주시겠습니까?”
“고쳐 주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썩는 이유만 보겠습니다. 관아 사람 앞에서 내 이름은 부르지 말고요.”
설향은 잠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 공방 간판을 올려다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연장장이 나리.”
관아 뒤편 곳간은 낮은 담 안에 있었다. 문을 여는 순간 퀴퀴한 냄새가 밀려왔다. 벽에는 이슬이 맺혀 있었고 볏짚 위 인삼 상자에는 젖은 기운이 올라왔다.
살림꾼 하나가 화로를 끌어안고 말했다.
“불을 더 피우면 마르지 않겠습니까? 어젯밤에도 두 번 갈았습니다.”
“인삼을 말리는 게 아니라 삶을 셈입니까.”
소은은 화로를 문밖으로 밀었다. 불을 피운 자리의 인삼은 향이 옅고 껍질이 쭈글쭈글했다. 더운 공기는 위로 오르지만 빠져나갈 구멍이 없었다. 밤에는 식은 벽이 그 물기를 다시 떨어뜨릴 터였다.
그는 촛불을 켜 들고 문틈과 들보 아래를 훑었다. 불꽃은 잠시 흔들리다가 곧장 섰다. 공기가 죽어 있었다.
“문을 닫아 볕만 막으면 물기도 함께 가둡니다. 여긴 창고가 아니라 젖은 항아리입니다.”
살림꾼이 입술을 삐죽였다.
“그럼 문을 열어 두라는 겁니까? 볕 들면 약재가 상한다던데요.”
“열고 닫는 것 말고 공기가 오갈 길을 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벽을 뚫으면 관아 어른들이 좋아하지 않겠지요.”
그 말에 살림꾼은 입을 다물었다. 소은은 더 말하지 않고 담 너머 언덕을 가리켰다. 예전에 숯을 묻어 두던 버려진 토굴이 있었다.
“저 굴을 씁시다. 관아 안은 손대지 않겠습니다.”
설향이 언덕을 올려다봤다.
“사람이 들어가기도 싫어하는 굴입니다.”
“그래서 볕과 불을 피해 둔 물건을 넣기 좋습니다. 단 그냥 넣지는 않습니다.”
토굴 안은 서늘했다. 소은은 바닥 흙을 한 줌 쥐었다. 축축했지만 물기가 손에 묻어날 정도는 아니었다. 그는 젖은 종이 조각을 관 입구에 매달고 촛불 연기를 피웠다.
북쪽 낮은 틈으로 들어온 연기가 바닥을 훑었다. 반대쪽 높은 균열에서는 연기가 가늘게 빠져나갔다.
“땅속은 낮에 덥고 밤에 차가워지는 폭이 작습니다. 이 굴의 숨길을 살리면 됩니다.”
만복이 굴 벽을 두드렸다.
“흙굴은 비만 오면 더 축축해집니다. 인삼을 이 안에 두면 지금보다 나을 게 있습니까?”
“흙에 붙여 두면 안 낫습니다. 그래서 띄웁니다.”
소은은 막대기로 바닥에 선을 그었다. 북쪽 낮은 곳에는 대나무 흡기 관을 묻고 남쪽 높은 곳에는 지붕 위로 솟는 배기통을 세울 생각이었다. 관 사이에는 숯 상자와 마른 왕겨를 깔고 인삼 상자는 나무 선반 위에 올린다.
“아래 관으로 들어온 공기는 흙벽을 지나며 너무 차갑거나 덥지 않게 됩니다. 높은 관이 그 공기를 끌어냅니다. 숯은 물기를 먹고 왕겨는 바닥 냉기를 막습니다.”
설향이 선을 따라 걸었다.
“인삼 상자는 어느 쪽에 둡니까?”
“벽에서 손바닥 하나만큼 띄우고 관 바로 앞은 피하십시오. 바람이 너무 세면 뿌리가 마릅니다.”
설향은 고개를 끄덕이고 제 손으로 선반 자리를 표시했다. 만복은 낮은 관이 들어갈 북쪽 벽을 살폈다.
“여기는 비 올 때 물이 흐릅니다.”
“좋은 말입니다. 관 입구를 한 자 높이고 빗물받이를 달죠.”
소은은 처음에는 관 하나만 묻을 생각이었다. 만복의 말대로라면 비가 쏟아질 때 흡기구로 물이 들어올 수 있었다. 그는 막대 끝으로 선을 고쳐 그렸다. 말 한마디가 설계를 살릴 때도 있었다.
“그걸 누가 압니까?”
만복이 물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배웁니다. 내가 매일 관아를 드나들 일은 없습니다.”
설향은 잠시 소은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대금은 약초 값으로 드리겠습니다. 관리도 제가 배우겠습니다. 장인께서 싫어하는 일까지 떠넘기지는 않겠습니다.”
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금은 나중에 말하고요. 대나무와 마른 왕겨를 먼저 구하세요. 왕겨는 비 맞은 것을 가져오면 안 됩니다.”
만복과 돌쇠가 뛰어 나갔다. 설향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삽을 들었다. 소은이 말릴 새도 없이 그녀는 흡기 관이 들어갈 자리를 팠다.
“손 다칩니다.”
“인삼을 만지는 손입니다. 흙도 만질 줄 압니다.”
그 말에 소은은 더 말하지 못했다. 대신 삽날이 벽에 닿기 전에 손잡이를 잡아 방향을 바로잡았다.
“여기보다 조금 왼쪽입니다. 관이 너무 가파르면 비가 밀려듭니다.”
“이만큼입니까?”
“네. 잘하셨습니다.”
설향의 눈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칭찬을 들으려 기다린 얼굴은 아니었지만 그 말은 분명 그녀의 손에 힘을 보탰다.
해가 기울 무렵 관이 두 개 세워졌다. 낮은 관 입구에는 빗물이 들지 않게 처마 같은 나무판을 달았다. 높은 관에는 바람막이 뚜껑을 얹었다. 소은은 선반 다리를 돌 위에 올려 바닥에서 띄웠다.
설향은 물러지지 않은 인삼을 젖은 종이에서 꺼냈다. 얇은 삼베 위에 한 줄씩 눕히고 뿌리가 서로 닿지 않게 벌렸다. 그 손놀림은 소은이 나무 결을 살피는 것만큼 망설임이 없었다.
“향이 달라졌습니다.”
소은이 말했다.
“상하기 시작하면 단내가 먼저 탁해집니다. 이건 아직 살릴 수 있습니다.”
“그걸 아는데도 그곳간은 그냥 뒀습니까?”
“제가 문을 뚫을 권한은 없으니까요.”
그 한마디가 토굴 안에 오래 남았다. 소은은 말없이 마지막 선반 못을 박았다. 벼슬을 피해 달아난 자신도 어떤 문 하나는 손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빗방울이 토굴 입구를 두드리기 시작했을 때 관 안의 바람이 약해졌다. 소은은 즉시 촛불을 관 앞에 대 보았다. 불꽃이 아래로 처졌다.
“숯 상자 빼세요.”
설향이 선반 아래로 손을 넣었다. 비에 젖은 왕겨가 낮은 관 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소은은 관 입구를 더 높이는 일을 미뤘던 자신을 속으로 욕했다.
“이건 내가 잘못 봤습니다. 왕겨를 너무 가까이 뒀어요.”
설향은 젖은 왕겨를 걷어 내며 물었다.
“다음에는 떨어뜨려 놓으면 됩니까?”
“그리고 격자를 댑니다. 비가 들면 왕겨부터 치우고요.”
“그럼 다음 비에는 제가 먼저 하겠습니다.”
실패를 탓하지 않고 손볼 자리를 묻는 사람은 드물었다. 소은은 마른 숯을 더 넣고 관 앞에 얇은 나무 격자를 달았다. 한참 뒤 촛불 연기가 천천히 높은 관으로 빨려 나갔다.
다음 날 설향은 가장 무르던 인삼 한 뿌리를 꺼내 보였다. 단면의 누런 번짐은 더 퍼지지 않았고 뿌리도 어제보다 단단했다.
“살았습니다.”
만복이 인삼을 두 손으로 받들었다. 소은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직 살았다고 말하긴 이릅니다. 더 상하지 않은 겁니다. 사흘은 보고 숯도 매일 만져 보세요. 눅눅하면 햇볕에 말리고 관에서 바람이 안 나면 입구부터 살피고요.”
“그래도 어제보다 낫습니다.”
설향은 인삼을 바라본 채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기쁨이 있었지만 들뜸은 없었다. 소은은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도구 하나로 세상이 끝났다고 떠들지 않는 사람은 함께 일하기 편했다.
설향은 작은 보자기를 내밀었다. 말린 대추와 생강 그리고 향 좋은 잎사귀가 들어 있었다.
“사흘 뒤에 다시 오겠습니다. 인삼 상태를 보여 드리고 차도 달여 드리겠습니다. 장인께서도 쇠 냄새만 맡고 사시면 속이 차가울 테니까요.”
소은은 보자기를 받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생강 향이 비 오는 흙 냄새를 밀어내자 손이 멈췄다.
“공방까지 오는 길은 아십니까?”
“돌쇠에게 물었습니다.”
돌쇠가 멋쩍게 웃었다. 소은은 그를 노려봤지만 이미 늦었다. 설향은 관의 바람 소리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언덕을 내려갔다.
소은은 토굴 앞에 홀로 남았다. 땅속에서 빠져나온 공기가 높은 관을 지나 가늘게 울었다.
그 소리는 물레방아보다 조용했다.
그래서 더 오래 들릴 것 같았다.
그는 공방으로 돌아와 낚싯대를 꺼냈다. 그러나 줄을 냇물에 드리우기 전부터 사흘 뒤에 찾아올 손님과 그 보자기 속 약초 냄새가 자꾸 떠올랐다.
조용히 살겠다는 계획은 늘 물레방아 소리보다 먼저 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