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세계 기획실장으로 살아남는 법

75화: 황실과의 긴장 관계
로제타 황녀가 기획실장실의 문을 닫고 들어와, 민우의 급진적인 귀족 영지 국유화 조치에 깊은 우려를 표명했다.
집무실 밖은 여전히 구시대의 특권을 사수하려는 귀족 세력과의 '장부상의 냉전(Cold War of Ledgers)'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숫자의 전선에서 벌어지는 이 소리 없는 전쟁은 제국의 권력이 황실의 권위에서 설계자의 행정 시스템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갈등이었다.
이세계의 화려하고 환상적인 겉모습 뒤에 굳건하게 웅크리고 있는 전근대적 토지 소유 체계는 강민우라는 '시스템 디자이너'에게는 왕권 강화와 자본의 효율적 배치를 위해 반드시 해체해야 할 구시대의 잔재였다.
민우의 손가락 사이에서 리드미컬하게 회전하는 은빛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를 넘어, 구습의 부조리를 도려내고 국가 자산의 새로운 아키텍처를 설계하는 설계자의 메스와도 같았다.
그는 우려 섞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황녀를 마주하며, 서울 대기업 기획실에서 공기업 민영화와 국가 전략 자산의 재배치를 조율하며 겪었던 고도의 정치적 역학 관계를 떠올렸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자본의 뿌리를 누가 움켜쥐고 있는가에서 나온다.
"국가는 거대한 기계 장치와 같다. 그 엔진을 돌리는 연료인 자본을 황실의 시스템 아래 국유화하지 않는다면, 제국의 평화는 언제든 귀족들의 탐욕에 의해 무너질 수 있다."
민우는 차갑게 식어 가던 마력 홍차를 한 모금 들이켜며, 집무실의 조명 마법 조도를 최적의 상태로 조절했다.
현재 민우가 정면에 맞닥뜨린 가장 거대하고도 시급한 핵심 행정 과제는 황녀에게 귀족의 잔존 경제력이 왕권에 미치는 실질적인 잠재적 위협 수준을 데이터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는 '오피스 워커의 눈(Office Worker's Eye)'을 활성화했다.
[라피아 홀딩스 & 제국 국정 재정 정밀 모니터링 시스템]
- 프로젝트: 국가 전략 자산 국유화 및 황실 경제권 강화
- 현재 통합 행정 및 금융 프로세스 효율성 지표: 72.50%
- 제국 황실 가용 유동 자본금: 905.0백만 골드
- 오피스 워커의 특수 분석: '로제타 황녀의 전통적 온정주의를 시스템적 위기 데이터로 설득하고, 귀족 자본의 원천 차단을 위한 강제 국유화 조치의 정당성을 확보할 것.'
이윽고 로제타 황녀가 낮은 목소리로 우려를 표했다.
민우는 아주 자연스럽고 예의 바른 태도로 미리 준비해 둔 귀족 가문들의 잠재적 반란 시나리오와 자본 흐름 분석 보고서를 내밀었다.
"바쁘신 와중에 발걸음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녀 전하. 하지만 올려주신 귀족 구제 기안서는 승인 결재를 해드릴 수가 없군요. 내역이 불분명한 온정주의적 예산 집행은 제 시스템 안에서는 그저 '보안 취약점'일 뿐입니다."
황녀가 가문의 전통적인 유대와 황실의 자비로움을 언급하며 고심했지만, 민우는 흔들림 없는 눈빛으로 상대를 직시했다.
"황녀님이 말씀하시는 자비는 귀족들의 재무장 자금으로 쓰일 뿐입니다. 그들을 용서하면 그들은 다시 군대를 모아 황녀님을 유폐하려 들 것입니다. 자본의 뿌리를 국유화하여 황실의 통제 아래 두셔야 합니다. 합의하지 않으신다면, 오늘부로 귀하의 부서와 관련된 모든 중앙은행 예산 유입 경로는 무기한 '동결' 처리될 것입니다."
설계자의 냉혹한 구조조정 플랜이 현실로 투입되자 제국 전체의 권력 지형도가 재편되기 시작했다.
민우는 현대 기업 경영의 전술을 고도로 활용해 황실에 충성하는 관리들에게는 강력한 행정권을, 태업을 일삼던 귀족들에게는 자산 압류라는 경제적 교수형을 선고했다.
이제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동력원은 기사의 검이 아닌, 한 직장인이 밤을 새워 기안한 엑셀식 기획서와 국유화 가이드라인이었다.
자본의 적재적소 재배치와 투명한 국가 시스템 제어라는 행정 마법 앞에서, 수백 년간 이어져 온 귀족들의 위세는 질서 정연한 톱니바퀴처럼 황실의 권위 아래로 편입되고 있었다.
분기 결산 보고서 상단에 기획실장의 전결 인장이 붉게 안착했다.
창밖으로는 중앙은행이 통제하는 새로운 경제 시스템이 제국 전역으로 뻗어 나가고 있었다.
시스템 인터페이스가 등급 상승을 알리는 완료 메시지를 띄웠다.
황녀가 민우의 확고한 개혁 방향성에 다시 한번 승복하고 전폭적인 체포권을 승인했다는 메시지가 민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다음은 국유 자산의 효율적 운용을 위한 투자 신탁 기획인가. 설계자의 야근은 차원을 넘어도 변치 않는군."
세상을 평화롭게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정의가 아닌, 매일 아침 성실하게 작성되는 서류와 차가운 숫자의 행정이라는 사실을 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