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파 약초꾼이 죽질 않음

4화: 독초는 맛이 달다
"그건 손도 대지 마라!"
석 노인의 고함이 약방 지붕을 울렸다.
백운휘는 검은 잎을 든 손을 멈췄다. 잎 끝에 얹힌 희끗한 서리가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코끝으로 스며든 향은 달았다.
"향이 좋은데요. 흑설초는 말려서 쓰는 겁니까?"
석 노인은 약재 바구니를 내려놓고 다가왔다.
"그 풀은 약으로 쓰지 않는다. 독을 만들 때나 쓴다. 그것도 사람 손에 닿지 않게 봉해 둔다."
"독초도 잘 쓰면 약이 되지 않습니까?"
"흑설초는 한 잎만 씹어도 혈맥이 얼어붙는다. 숨을 들이쉬려 해도 가슴이 움직이지 않는다."
운휘가 잎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윤기 나는 검은 빛과 달큰한 향. 보기에는 제법 싱싱했다.
"그 사냥꾼은 너무 많이 드셨겠지요. 이건 잎도 작고 아직 어린데요."
"어리다고 독이 약해지는 풀이 아니다."
그때 진료방에서 나오던 백향란이 두 사람 사이로 들어섰다. 그녀는 운휘의 손에 든 흑설초를 보자마자 눈살을 찌푸렸다.
"내게 이상한 걸 입에 넣기 전에 먼저 보여라 했지. 내려놔."
"사형께 보여 드리는 중입니다."
"보여 주고 난 뒤에 먹을 생각이었느냐?"
운휘는 잠시 생각하다가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쓴 약 먹고 나면 입이 텁텁하잖습니까. 이건 향이 좋아서 입가심으로 괜찮을 듯합니다."
백향란의 관자놀이가 움찔했다. 석 노인은 운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 잎을 이리 내라. 내가 바로 태워 버리겠다."
운휘는 아쉬운 얼굴로 잎 끝을 살폈다.
"태우기는 너무 아깝습니다. 맛만 보면 되는데요."
"안 된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겹쳤다.
운휘는 그제야 자기 고집이 심했나 싶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만 맛보겠다는 뜻으로 잎을 반으로 접었다.
그러나 흑설초는 얇았다. 접힌 잎이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사각.
한 번 씹자 서리가 혀끝에서 녹았다. 박하보다 차가운 기운이 입안을 훑더니 곧 달큼한 맛이 퍼졌다. 약간 쌉싸래한 끝맛도 있었지만 오래 씹은 감초보다 훨씬 부드러웠다.
"정말 달군요."
운휘는 씹던 것을 삼켰다.
"끝맛이 조금 쓰긴 한데 입가심으로 괜찮겠습니다."
석 노인의 입이 벌어졌다. 백향란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뱉어!"
"이미 삼켰습니다."
"손가락을 넣어서라도 토해 내!"
석 노인이 탁자 위의 해독환 통을 쓸어 담았다. 작은 사기병이 덜그럭거렸고 마른 약재가 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는 엉덩이도 의자에 붙이지 못한 채 운휘의 입가를 살폈다.
"혀가 저리냐? 목이 조이냐? 손끝이 차가워지지 않느냐?"
"혀는 시원합니다. 손끝도 멀쩡하고요."
운휘는 양손을 펴 보였다.
백향란은 더 듣지 않고 그의 어깨를 잡았다.
"안으로 들어가."
"제가 약초를 잘못 먹은 겁니까?"
"그러니 들어가서 확인한다."
운휘는 고개를 숙인 채 진료방으로 끌려갔다.
석 노인은 대답 대신 양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진료방 문이 닫히자 백향란은 운휘를 의자에 앉혔다.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들였다. 독이 혈맥을 얼린다면 손발 끝에서부터 빛이 빠질 터였다.
그녀는 운휘의 손목을 잡았다.
맥은 고르고 힘찼다.
한 식경이 지나도 맥박은 흔들리지 않았다. 손등은 따뜻했고 손톱 밑도 붉었다. 운휘는 숨을 세 번 크게 쉬어 보라는 말에 순순히 따랐다. 숨소리는 멀쩡했고 가슴도 막힘없이 오르내렸다.
"답답한 곳은 없습니까?"
"없습니다."
"속이 쓰리거나 식은땀이 나지는 않고?"
"아뇨. 오히려 아침에 먹은 죽이 잘 내려간 느낌입니다."
"그런 느낌을 묻는 게 아니다."
운휘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럼 독이 없다는 뜻입니까?"
백향란은 대답하지 않았다. 흑설초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결론은 더 이상했다. 그녀는 눈을 감고 가느다란 내력을 그의 손목으로 흘려 보냈다.
내력은 운휘의 맥을 타고 들어갔다. 그러나 손목을 지나 팔을 오를수록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피부 아래로 흩어진 기운은 뼈와 살 사이에서 안개처럼 풀어졌다.
반발은 없었다.
막힘도 없었다.
그저 어디에도 붙잡히지 않았다.
백향란은 손끝에 힘을 더 주었다. 그 순간 운휘의 몸속 깊은 곳에서 미지근한 기운이 한 번 일렁이는 듯했다.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아닌 이상한 감촉이었다. 그녀가 느낀 것은 그것뿐이었다.
내력은 다시 흔적 없이 사라졌다.
"사형?"
운휘가 조심스레 불렀다. 백향란은 얼른 손을 뗐다.
"나쁜 겁니까?"
"아니다."
답은 짧았지만 그녀의 눈빛은 조금도 편안하지 않았다.
석 노인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손에는 해독환과 은침, 따뜻한 물이 든 사발이 들려 있었다.
"어떻습니까?"
"독의 기운이 잡히지 않습니다."
"그럴 리가. 흑설초는 잘못 말린 것이어도 독성이 남습니다."
석 노인은 운휘의 손바닥에 은침을 살짝 댔다. 침 끝은 맑은 은빛이었다. 그는 아까 흑설초를 쥐었던 손가락 끝을 침으로 긁어 작은 핏방울을 냈다.
운휘가 눈을 크게 떴다.
"아이고. 그럴 필요까지는 없는데요."
"가만있어라."
석 노인은 핏방울을 흰 사기 접시에 떨어뜨렸다. 독이 남아 있다면 피가 어둡게 굳거나 침 끝이 검어질 것이었다.
하지만 피는 맑은 붉은색으로 번졌다. 은침도 빛을 잃지 않았다.
그보다 이상한 것은 상처였다.
운휘가 손을 들어 들여다보는 사이 가느다란 침 자국이 스르르 닫혔다. 피가 묻은 자리만 남고 살갗은 매끈했다.
석 노인의 손에서 은침이 떨어졌다.
운휘는 손가락을 문질렀다.
"침이 워낙 가늘어서 안 아프네요."
석 노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가 아는 의술로는 흑설초를 삼킨 사람의 맥이 이렇게 안정적일 수 없었다. 손바닥의 상처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일은 더더욱 설명할 수 없었다.
백향란은 침묵 끝에 말했다.
"당분간 약방 밖으로 나가지 마라."
"또요?"
"또가 아니다. 내 허락 없이 독초 칸에는 가까이도 가지 마라."
운휘는 시무룩해졌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황련은 뒤집어야 합니다. 오늘 볕이 좋습니다."
백향란은 그 말에 잠깐 입을 다물었다. 운휘에게 약방 일을 못 하게 하는 것은 가장 확실한 방법이면서도 가장 어려운 방법이었다. 이 아이는 검을 잃은 검수보다 약초를 잃은 약초꾼에 가까웠다.
"약방 안에서만 해라."
"정말입니까?"
"도윤을 붙일 테니 혼자 다니지 마라."
운휘의 얼굴이 금세 밝아졌다.
"도윤 사제가 약초를 좀 압니까?"
"모릅니다."
문밖에서 들린 대답에 운휘가 웃었다.
"그럼 오늘부터 배우면 됩니다."
진료방 바깥에는 도윤과 외문 제자 몇 명이 멀찍이 서 있었다. 문이 열리자 모두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석 노인이 들고 나온 깨끗한 은침과 텅 빈 해독환 사발은 이미 그들의 눈에 들어온 뒤였다.
한 제자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흑설초를 먹었답니까?"
도윤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 잎을 통째로."
"그런데 멀쩡하다고?"
"대사형께서 물도 마시게 하셨고 맥도 보셨다. 멀쩡했다."
다른 제자가 흑설초 선반 쪽을 힐끗거렸다.
"혹시 백 사제가 독공을 익힌 게 아닐까? 기운을 숨기는 고수라면 그럴 수도 있잖아."
도윤은 대답하지 못했다. 도끼가 목에서 부러진 장면과 방금 본 깨끗한 은침이 머릿속에서 겹쳤다. 무공의 기운이 없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 말이 이제는 더 믿기 어려웠다.
"그만."
백향란이 문턱에 섰다.
그녀는 제자들을 차례로 바라봤다. 목소리는 크지 않았으나 약방 마당이 조용해질 만큼 단호했다.
"흑설초는 장문인 허가 아래 보관하던 물건이다. 오늘부터 그 선반은 봉한다. 누구든 운휘를 떠보려 들거나 이 일을 밖에 흘리면 내가 직접 벌을 내리겠다."
제자들은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대사형. 백운휘 사제가 정말..."
"화산파 제자다. 그 이상으로 부르지 마라."
제자들은 흩어졌지만 걸음은 전보다 조심스러웠다.
운휘는 그 광경을 보며 괜히 미안해졌다.
"제가 잎을 먹어서 일이 커졌네요."
"그걸 이제 알았느냐."
"남은 흑설초는 제가 새로 캐 오겠습니다. 화산 북쪽 그늘진 바위틈에 비슷한 풀이 있습니다."
백향란의 눈썹이 움직였다.
"그 말을 누구에게도 하지 마라."
"그 풀을 찾는 자들은 약을 만들 생각보다 사람을 해칠 생각부터 할 거다."
운휘는 잠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약초는 값을 노리는 장사치와 나쁜 짓을 하려는 자를 함께 부른다.
"그럼 제가 아는 자리에는 표식을 하지 않겠습니다."
백향란은 그제야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오후가 되자 운휘는 약초 건조장으로 나갔다. 햇빛이 널찍한 나무 발 위에 쏟아졌다. 황련 뿌리와 자소엽을 한 줌씩 뒤집는 손놀림은 익숙하고 빨랐다.
도윤은 그 옆에서 바구니를 들고 서 있었다. 호위라기보다 낯선 약재 더미 앞에서 길을 잃은 사람 같았다.
"이건 뭡니까?"
"황련입니다. 쓴맛이 좋습니다."
"그건 알아요. 왜 잎과 뿌리를 나누는지 묻는 겁니다."
"잎은 향이 빨리 날아가고 뿌리는 볕을 오래 받으면 딱딱해집니다. 저쪽을 맡으십시오."
도윤은 얼떨결에 황련 바구니를 받았다. 그러다 약방 벽에 붙은 독초 보관함 쪽으로 시선이 멎었다.
보관함 문에는 붉은 봉인이 새로 붙어 있었다. 그런데 그 아래 나무 결 사이에 엷은 회색 가루가 묻어 있었다. 운휘는 가까이 가서 냄새를 맡았다.
낯선 기름 냄새였다. 약방에서 쓰는 동백기름보다 훨씬 묽고 쇠 냄새가 섞여 있었다.
"도윤 사제. 오늘 아침에 보관함을 열었습니까?"
"아니요. 저는 아침부터 연무장에 있었습니다. 왜요?"
운휘는 문틀 아래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가루 사이에는 손톱으로 긁은 듯한 얕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약초를 다루는 손이라면 남기지 않을 흔적이었다.
"누가 독초 칸을 뒤진 것 같습니다."
도윤의 얼굴이 굳었다.
"확실합니까?"
"모르겠습니다. 다만 약초를 꺼내려던 사람이라면 흑설초만 보지 않았을 겁니다. 옆 칸의 칠보등도 손자국이 있거든요."
도윤은 곧장 백향란을 불렀다. 그녀는 자국을 확인한 뒤 보관함 주변을 한참 살폈다. 겉봉인은 아침에 새로 붙인 것이라 멀쩡했다. 하지만 낡은 문틈 안쪽에는 누군가 가는 쇠붙이를 넣었다 뺀 흔적이 있었다.
"오늘 밤부터 약방 경계를 세운다."
백향란은 도윤에게 말했다.
"운휘는 건조장 뒤편 방에서 재워라. 감시가 아니라 보호다. 밖으로 혼자 나가게 하지 마라."
운휘는 황련을 뒤집던 손을 들었다.
"제가 여기서 자도 됩니까? 약초가 밤이슬 먹는 걸 바로 볼 수 있겠네요."
"그걸 좋아할 일이 아니다."
"그래도 약초는 잘 마르겠습니다."
백향란은 더 말하지 못했다. 운휘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약초 걱정이 더 컸다.
해가 화산 봉우리 뒤로 넘어갔다. 건조장에 남은 볕이 붉게 식고 약초 향이 저녁바람에 섞였다.
운휘는 창가에 놓인 황련 바구니를 마지막으로 확인한 뒤 작은 방에 들어갔다. 도윤은 문밖에 앉아 검자루를 쥐었다.
담장 너머 숲에서는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 듯 고요했다.
잠시 뒤, 마른 나뭇가지 하나가 아주 낮게 부러졌다.
도윤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 속에서 약방을 향한 낯선 발자국이 멈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