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산파 약초꾼이 죽질 않음

시놉시스
화산파 외문 제자 백운휘는 단전이 막혀 무공을 익히지 못한다. 대신 산을 타고 약초를 캐며 살아남는 법을 익힌 그는 이름 모를 영약과 독초를 몸에 좋다는 이유로 한 솥에 달여 마시기 시작한다.
본인은 그저 자양강장제를 만들었다고 믿지만 그 탕약은 화산의 운명을 바꿀 첫 불씨가 된다.
1화: 약초꾼의 자양강장제
새벽 종이 울리자 화산파 외문 제자들이 연무장에 모였다.
백운휘도 그 틈에 앉아 있었다. 허리를 곧게 세우고 손바닥을 무릎 위에 올렸다. 다른 제자들의 숨이 일정해지고 기운이 아랫배로 가라앉을 때 운휘의 속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문제였다.
"또 비었네."
운휘는 자기 배를 슬쩍 눌렀다. 단전이라 부르는 자리는 언제나 빈 항아리 같았다. 물을 부으면 밑 빠진 곳으로 새는 항아리였다.
앞줄의 외문 제자는 벌써 손끝에 희미한 열기를 피웠다. 옆의 아이는 처음으로 기감이 왔는지 코끝을 벌름거렸다.
운휘는 눈을 감았다.
오늘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 생각은 반각도 가지 못했다. 아랫배 대신 등허리가 따뜻해졌다. 햇볕이 거기로 먼저 닿았기 때문이다. 따뜻하니 잠이 왔다.
"백운휘."
낮은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운휘는 번쩍 눈을 떴다. 백향란이 팔짱을 낀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화산파 대제자답게 눈매가 매서웠고 허리의 검은 아직 뽑히지도 않았는데 사람을 베는 듯했다.
"기초 심법 시간에 잠을 자는 외문 제자는 네가 처음이다."
"사형, 잠든 것이 아닙니다. 안쪽을 깊이 들여다보다가 잠시 바깥을 잊었습니다."
"그걸 잠이라고 한다."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운휘는 머리를 긁었다.
백향란은 한숨을 삼켰다. 꾸중은 날카로웠지만 눈빛에는 걱정이 있었다. 운휘의 단전이 막힌 일은 외문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재능이 없다는 말보다 더 잔인한 판정이었다.
"오늘은 약방으로 가라. 석 노인이 장작 패고 약재 말릴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다."
"예. 그쪽이 제게는 더 빠릅니다."
"빠르다고 좋아할 일이냐?"
백향란이 손을 들어 꿀밤을 먹이려다 멈췄다. 운휘는 익숙하게 고개를 숙였고 머리 위로 손바닥 그림자가 지나갔다.
"몸조심해라. 산비탈에 올라가지 말고."
"약초가 산비탈에 있는데 어찌 안 올라갑니까?"
"그 말대꾸가 문제다."
운휘는 광주리를 등에 멨다. 연무장에서는 다시 숨 고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는 그 소리를 뒤로하고 약방으로 걸었다. 마음 한쪽이 쓰렸지만 발걸음은 가벼웠다. 무공은 안 되어도 약초 이름은 누구보다 빨리 외웠다.
석 노인은 약방 뒤뜰에서 말린 잎을 뒤집고 있었다.
"왔느냐. 오늘은 동쪽 골짜기다. 황련 뿌리하고 자소엽이 모자란다."
"동쪽이면 낭떠러지 아래쪽입니까?"
"그 위쪽만 훑어라. 아래쪽에는 이상한 버섯이 난다. 색이 붉고 냄새가 단데 손대지 마라."
운휘의 눈이 반짝였다.
"냄새가 단 버섯이면 약성이 있겠습니다."
"독이 있을 수도 있지."
"독도 쓰기 나름이지요."
석 노인은 이마를 짚었다. 운휘가 약초를 보는 눈은 좋았다. 문제는 겁이 없다는 점이었다. 독초도 한 번 맡아보고 잎을 찢어보고 물에 우려보면 대충 성질을 안다고 생각했다.
"캐오라는 것만 캐와라."
"예."
대답은 공손했다. 그러나 석 노인은 운휘의 등이 골목을 벗어나기도 전에 벌써 불안해졌다.
화산의 동쪽 골짜기는 바람이 사납다. 절벽 사이를 지나는 바람은 옷깃을 잡아당기고 돌부리를 느슨하게 만든다.
운휘는 그 길을 익숙하게 올랐다. 왼손에는 낡은 곡괭이, 오른손에는 짧은 약칼을 들었다. 발밑의 흙 냄새와 잎의 윤기를 보며 방향을 잡았다.
"황련은 여기."
그는 바위 틈에서 노란 뿌리를 조심스럽게 캤다. 이어 자소엽을 따고 상처 난 잎은 따로 빼냈다. 약방에 낼 것은 깨끗한 것뿐이었다. 못난 잎은 자기 탕약에 넣으면 됐다.
점심 무렵, 운휘는 낭떠러지 아래쪽에서 달큰한 향을 맡았다.
석 노인의 말이 떠올랐다.
손대지 마라.
운휘는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붉은 버섯이 그늘 속에 돋아 있었다. 갓은 어린아이 주먹만 했고 표면에는 금빛 점이 박혀 있었다. 옆에는 마른 소나무 뿌리를 감고 자란 오래된 삼 한 뿌리가 보였다.
"저건 그냥 두면 산짐승이 먹겠는데."
그건 아까운 일이었다. 외문 약방에서 삼은 늘 귀했다. 제대로 묵은 삼 한 뿌리는 은자 몇 닢으로도 못 구했고 장문인의 손님상에 올라가는 약탕에도 잘 들어가지 않았다.
운휘는 배낭에서 밧줄을 꺼냈다.
바람이 세게 불었다. 돌이 떨어졌다. 그는 나무뿌리에 밧줄을 묶고 몸을 내렸다. 아래로 내려갈수록 향이 짙어졌다. 매운 향과 단 향이 같이 났다.
"몸 허한 데 좋을 냄새군."
운휘는 버섯 주변의 흙을 손으로 걷었다. 독초가 섞여 있었다. 잎 끝이 검푸른 귀면초였다. 보통 사람은 뿌리 냄새만 맡아도 속이 뒤집히는 풀이다.
운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운맛을 잡아줄 게 필요했는데 잘됐네."
그는 붉은 버섯과 귀면초, 오래된 삼 뿌리를 함께 챙겼다. 손끝이 살짝 저릿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겨울에 장작 패다 생기는 감각과 비슷했다.
해가 기울 때 약방의 굴뚝에서 연기가 올랐다.
석 노인은 운휘가 내민 광주리를 보고 만족하다가 맨 아래의 붉은 버섯을 보고 굳었다.
"이놈아. 손대지 말라 했지."
"만지기만 했습니다."
"캤잖느냐."
"그건 손보다 약칼로 했습니다."
석 노인은 말문이 막혔다. 운휘는 진심으로 억울해 보였다.
"그걸 어찌할 생각이냐?"
"조금 달여 보려고 합니다. 요즘 아침마다 기운이 모자랍니다. 심법 시간에 자꾸 눈이 감깁니다."
"그건 네가 밤마다 약재 장부를 보느라 늦게 자서 그렇다."
"그래도 몸을 보해야 합니다."
운휘는 작은 가마솥을 걸었다. 오래 묵은 삼 뿌리를 얇게 저몄고 붉은 버섯은 반만 넣었다. 귀면초는 독하니 잎 세 장만 넣었다. 대신 황련과 감초 비슷한 단맛 나는 뿌리를 더했다.
석 노인은 보다 못해 물었다.
"그 비율은 어디서 배웠느냐?"
"입에 들어갔을 때 싸우지 않을 것 같은 순서입니다."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
"약도 결국 배 속에서 화목해야 하지 않습니까."
솥 안의 물이 붉게 변했다. 곧 검게 가라앉았다가 다시 맑아졌다. 운휘는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잡탕 약재는 원래 색이 잘 변한다.
석 노인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약방에서 쉰 해를 보낸 노인의 눈에도 저렇게 색이 숨었다 드러나는 약탕은 처음이었다. 독기가 끓어오르면 냄새가 코를 찔러야 했지만 솥에서는 봄 꿀과 탄 솔잎을 섞은 듯한 향만 났다.
백향란이 약방 앞을 지나가다 냄새를 맡고 들어왔다.
"무슨 냄새냐. 매운 꿀을 태우는 것 같은데."
"자양강장제입니다."
"누가 먹는데?"
"제가요."
백향란의 눈썹이 꿈틀했다.
"네가 또 이상한 걸 끓였구나."
"이상하지 않습니다. 삼도 들어갔습니다."
"삼만 들어가면 다 약이냐?"
운휘는 대답 대신 사발을 들었다. 김이 얼굴을 덮었다. 혀끝에 닿은 맛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처음에는 쓰고 끝에는 달았다. 목으로 넘어가자 배 속에서 작은 숯불이 켜진 듯했다.
"오."
"왜. 아프냐?"
"따뜻합니다."
"그건 뜨거운 걸 마셔서 그렇다."
운휘는 한 사발을 더 마셨다. 석 노인은 기겁했고 백향란은 손을 뻗어 사발을 빼앗으려 했다. 그러나 운휘는 이미 마지막 한 방울까지 털어 넣었다.
잠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운휘는 자기 배를 눌렀다. 단전은 여전히 조용했다. 내공이 생긴 느낌도 없었다. 대신 어깨가 가벼웠고 손끝의 저림이 사라졌다.
"역시 몸이 허했던 모양입니다."
그때 가마솥 안쪽에서 뚝 하는 소리가 났다. 솥 옆구리에 실금이 갔다. 끓던 약물이 틈으로 새어 나와 화덕 위에 떨어졌다.
"앗, 아깝다."
운휘는 맨손으로 솥을 잡았다.
"야!"
백향란이 소리쳤다. 달궈진 쇠솥은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손바닥이 타야 했다. 살 냄새가 나야 했다.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운휘는 솥을 옆으로 들어 옮기며 투덜거렸다.
"석 노인, 이 솥도 이제 바꿀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약이 조금 샙니다."
석 노인은 입을 벌렸다. 백향란은 운휘의 손을 낚아채 살폈다. 손바닥은 멀쩡했다. 물집 하나 없었다.
"아프지 않으냐?"
"조금 뜨겁긴 합니다."
"조금?"
"장작불 쬘 때 정도입니다."
백향란은 말없이 운휘의 손바닥을 눌렀다. 운휘는 간지러운 듯 웃었다.
"사형, 왜 그러십니까?"
"아니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무공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전도 비어 있었다. 그런데 쇠솥을 맨손으로 잡고 멀쩡했다.
운휘는 그녀의 심각한 표정을 눈치채지 못했다. 관심은 깨진 솥과 남은 약재에 가 있었다.
"내일 하산길에 새 솥을 하나 사 와야겠습니다. 약방에 보낼 말린 황련도 있고."
"내일 내려간다고?"
"예. 약재가 상하기 전에 객잔 쪽 의원에게 넘겨야 합니다."
백향란의 얼굴이 굳었다.
"요 며칠 하산길에 흑풍채 놈들이 얼씬거린다는 말이 있다. 산적들이야. 혼자 가지 마라."
"산적이면 더 일찍 가야겠군요. 길이 막히면 약재가 눅눅해집니다."
"백운휘."
"예."
"사람 말 좀 들어라."
운휘는 곤란한 얼굴로 배낭을 정리했다. 백향란이 걱정하는 마음은 알았다. 그러나 약초는 때를 놓치면 향을 잃었다. 그건 약초꾼에게 큰일이었다.
밤이 깊었다. 화산의 산등성이 위로 달이 걸렸다.
운휘는 잠들기 전 빈 사발을 내려다보았다. 배 속의 따뜻함은 아직 남아 있었다. 단전은 비었지만 몸 어딘가가 단단해진 듯했다.
"내일은 덜 졸겠네."
그는 만족하며 눈을 감았다.
새벽이 오기 전, 약방 문이 조용히 열렸다. 운휘는 말린 황련과 자소엽, 남은 붉은 버섯 조각을 배낭 깊숙이 넣었다. 낡은 솥값까지 벌려면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다.
하산길 아래쪽에서는 검은 그림자 셋이 숲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도끼날이 희미한 달빛을 받아 번뜩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