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헌터 쇼퍼: B급이 구매한 S급 보상

2화: 첫 번째 주문
강현우는 자취방 현관문을 잠근 뒤에도 한동안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낡은 원룸의 냉장고가 낮게 웅웅거렸다. 그는 신발도 벗지 않은 채 침대 끝에 앉았다.
[보유 포인트: 107 HP]
관리비는 사흘 뒤였다. 포인트는 고지서의 계좌로 송금할 수 없었다.
마나스톤 값으로 바꿔 줬으면 훨씬 편했을 텐데.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추천 상품 쪽을 눌렀다.
[초진동 분자 커터칼]
[생활용 절단 기구 / 100 HP]
상품 후기의 낯선 글자는 자연스럽게 뜻이 들어왔다.
[냉동 운석고기 손질 시간이 절반으로 줄었습니다.]
[보호 장갑 미착용 시 손가락도 재료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안전 버튼을 반드시 누르세요.]
현우의 손끝이 멈췄다.
"사용 후기치고는 너무 살벌한데."
상세 설명에는 절단 기능이 손잡이 안쪽의 안전 버튼을 누르는 동안만 유지된다고 적혀 있었다. 절단할 재료를 정확히 의식해야 하며 단순 변심 환불은 불가능했다.
마지막 문장이 특히 눈에 밟혔다.
[신규 이용자 추천 상품은 구매 후 30일 동안 재구매 할인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신중한 소비를 권장합니다.]
할인 행사 때도 배송비를 아끼려고 장바구니를 며칠씩 묵혀 두던 현우에게는 낯선 경고가 아니었다. 다만 지금 장바구니에 든 것은 양말도 치약도 아니었다.
"안 사면 그냥 숫자고. 사서 쓸 만하면 다음 던전부터 덜 죽겠지."
이건 충동구매가 아니었다. 살아남기 위한 장비 투자였다.
그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결론을 내린 뒤 결제 버튼을 눌렀다.
[100 HP를 사용합니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차원 퀵배송을 준비합니다. 구매자 반경 1미터 내의 낙하 위험물을 치워 주세요.]
현우는 재빨리 침대 아래에 굴러다니던 빈 캔과 빨래 바구니를 밀어 냈다.
"이걸 미리 말해 줬어야지."
허공이 동전만 하게 움푹 꺼졌다.
빛이 없는 균열이었다. 검은 원이 손바닥만 하게 넓어지더니 안쪽에서 은빛 선이 번쩍였다.
툭.
손바닥 두 개를 포갠 만큼의 하얀 상자가 이불 위로 떨어졌다. 균열은 상자가 닿기도 전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닫혔다.
테이프는 손으로도 쉽게 뜯겼다. 완충재 사이에 든 물건은 지나치게 평범했다.
검은 손잡이. 은색 칼날. 과일칼보다 조금 길고 주방칼보다 한참 짧았다. 칼등에는 제조사 이름도 각인도 없었다.
"이게 100 HP짜리라고?"
손잡이를 쥔 손가락이 안쪽의 작은 돌기를 눌렀다. 그 순간 칼날 가장자리에 아주 가는 푸른 선이 흘렀다.
현우는 숨을 죽였다.
책상 위의 영수증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종이를 자르는 데 이 물건을 쓸 이유는 없었지만 다른 시험 재료도 없었다.
안전 버튼을 누른 채 종이 한쪽에 칼날을 댔다.
스르륵.
힘을 준 적이 없는데 영수증이 둘로 미끄러져 나뉘었다. 절단면은 가위로 자른 것보다 곧았다.
현우는 종이를 세 장 겹쳤다. 또 잘렸다.
이번에는 대여 검의 낡은 검집을 꺼냈다. 협회 장비실에서 빌린 싸구려 합성가죽 검집이었다. 돈을 물어내게 될까 봐 망설였지만 끝부분만 아주 얇게 대 보기로 했다.
칼날이 닿자 검집 끝이 버터처럼 갈라졌다.
"미친."
현우는 즉시 버튼을 놓았다. 푸른 선이 꺼지자 칼날은 그저 매끈한 금속 조각으로 돌아왔다.
손가락을 가까이 가져가도 아무 일도 없었다. 더 시험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현우는 종이와 검집이 갈라진 자국을 다시 봤다. 답을 내려면 마수 가죽에 대 봐야 했다.
그는 대여 검과 커터칼을 가방 안쪽에 나란히 넣었다.
다음 날 아침, 현우는 서울 외곽 헌터 협회 접수처에 섰다.
전광판의 모집 글을 훑던 현우는 D급 표기 앞에서 발을 멈췄다.
[한빛 실내체육관 게이트 / 단기 공략 / 전리품 균등 분배 / 3인 모집]
D급은 변종 하나만 잘못 만나도 대여 검으로 버티기 어렵다. 커터칼을 확인하기 좋은 곳이기도 했다.
"현우 씨?"
뒤에서 들린 목소리에 현우가 돌아봤다. 박준호가 두꺼운 방패와 커다란 배낭을 멘 채 서 있었다.
준호는 현우의 표정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웃었다.
"어제 일은 괜찮았어요? 그 파티장 아저씨가 협회에 이상한 소리 하진 않았고요?"
"아직 연락은 없네요. 준호 씨는요?"
"저도요. 다행이죠."
준호는 전광판의 D급 모집 글을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저기 들어가려고요? 저도 신청했는데 한 명이 펑크 냈대요. 둘이서라도 갈 생각이었어요."
"둘이서요?"
"입구 쪽만 돌 생각입니다. 비늘등개만 나온다는 보고가 있어서요. 가죽이 잘 팔리거든요."
등 비늘이 D급 보급 검에도 잘리지 않는 마수였다. 커터칼의 시험 재료로는 더할 나위 없었다.
현우는 모집 글과 준호의 방패를 번갈아 봤다.
"가죠. 대신 전리품은 현장에서 각자 챙깁시다. 저는 필요한 부분만 가져갈게요."
"정말요?"
"가죽은 준호 씨가 챙겨요. 대신 제 물건에 대해서는 묻지 말고."
준호가 눈을 크게 떴다.
"무슨 물건인데요?"
"아직은 저도 잘 몰라서요."
그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한빛 실내체육관 게이트는 오래된 수영장 입구처럼 생겼다. 출입구 너머로 들어가자 염소 땀 냄새와 젖은 타일 냄새가 섞여 코를 찔렀다.
관중석 대신 검은 돌계단이 층층이 솟아 있었다. 경기장 중앙에는 탁한 안개가 허리 높이까지 차 있었다.
준호가 방패 끈을 조였다.
"등만 안 치면 돼요. 턱 아래가 약점이긴 한데 가까이 붙어야 하죠."
현우는 가방 안의 상자를 가볍게 눌렀다.
안개 속에서 발톱이 타일을 긁었다. 준호가 방패를 들어 올렸다.
검은 그림자 둘이 안개를 찢고 튀어나왔다. 몸통은 큰 들개만 했지만 등 비늘은 물고기 갑옷처럼 겹쳐 있었다. 누런 눈동자가 둘을 향해 고정됐다.
"둘입니다. 제가 하나 막을게요!"
준호가 앞선 놈을 향해 방패를 세웠다. 비늘등개가 낮게 울며 몸을 날렸다.
쾅!
방패가 크게 흔들렸다. 준호의 팔이 뒤로 밀렸지만 그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다른 한 마리가 옆으로 돌아 현우를 노렸다. 현우는 대여 검을 뽑아 들었다. 시험은 하되 너무 빠르게 정체를 드러낼 수는 없었다.
비늘등개가 덮쳐 왔다.
현우는 옆으로 비켜서며 검을 휘둘렀다. 날은 놈의 옆구리에 닿았지만 비늘 세 장만 튕겨 나갔다. 손목까지 충격이 올라왔다.
"역시 안 먹히네."
놈은 상처 하나 없는 몸으로 다시 몸을 틀었다. 그 사이 준호 쪽에서 짧은 신음이 들렸다.
방패에 붙은 비늘등개가 발톱을 세워 가장자리를 긁어 내고 있었다. 준호가 밀려나며 계단 끝에 발을 헛디뎠다.
현우는 이를 악물었다.
커터칼을 시험할 때가 아니다. 지금 쓰지 않으면 준호의 목이 먼저 시험대에 오른다.
그는 가방에서 검은 손잡이를 꺼냈다. 비늘등개 한 마리가 그를 보고 다시 달려들었다.
현우는 도망치지 않았다. 놈의 머리가 허벅지 높이까지 올라왔을 때 몸을 비틀어 옆으로 흘렸다.
안전 버튼을 누른 손에 땀이 밴다.
푸른 선이 칼날에 살아났다.
현우는 비늘등개의 등과 목이 맞닿은 틈에 칼을 댔다. 찌르지도 베지도 않았다. 손목을 조금 당겼을 뿐이었다.
서걱.
두꺼운 비늘이 소리 없이 갈라졌다.
칼날이 지나간 자리에서 피가 한 박자 늦게 솟았다. 비늘등개는 두 걸음을 더 달리다가 옆으로 굴렀다.
현우도 눈을 크게 떴다.
"현우 씨!"
준호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다.
방패를 밀어낸 다른 비늘등개가 준호의 어깨를 향해 입을 벌리고 있었다. 현우는 쓰러진 마수의 피를 피하며 달렸다.
준호는 방패를 들고 있었지만 자세가 무너져 있었다. 이대로 물리면 방패 뒤의 팔부터 부러질 터였다.
현우는 마수의 옆으로 파고들었다.
"팔 빼요!"
준호가 반사적으로 팔을 당겼다. 현우는 벌어진 턱 아래의 연한 살을 겨눴다.
칼날을 댄 순간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사라졌다.
스르륵.
마수의 목이 지나치게 깨끗한 선을 남기며 벌어졌다. 비늘등개는 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하고 타일 바닥에 처박혔다.
안개가 핏빛으로 번졌다.
준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방패 위에 남은 발톱 자국과 현우 손의 작은 커터칼을 번갈아 봤다.
"그거… 대여 검 아니었죠?"
현우는 버튼을 놓고 칼날을 소매로 닦았다. 푸른 선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주방용품이에요."
"주방용품이요?"
"고기 손질할 때 편하다고 해서 샀어요. 가격은 좀 셌고."
준호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러다 쓰러진 비늘등개의 목을 보고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요즘 고기는 위험하네요."
현우는 피식 웃었다.
"그러게요."
웃음은 짧았다. 쓰러진 두 마수의 사체를 보자 창이 시야에 떠올랐다.
[정산 가능한 던전 자원이 감지되었습니다.]
[비늘등개 2체, 마나스톤 2개, 잔류 환경 에너지.]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전환하면 포인트는 늘어난다. 대신 오늘은 현금 한 푼도 못 건진다. 게다가 준호는 눈앞에서 비늘이 잘려 나가는 것을 봤다. 사체까지 통째로 사라지면 어제의 태식처럼 의심할 사람이 하나 더 생긴다.
현우는 시스템 창을 꺼 두고 쪼그려 앉았다.
"준호 씨. 가죽은 챙겨요. 깨끗하게 잘린 쪽은 특히 따로 담고."
"이걸 다요? 현우 씨가 거의 잡았는데."
"오늘은 제가 필요한 게 따로 있어서요. 대신 여기 있는 마나스톤은 제가 가져가도 되죠?"
준호는 잠깐 망설이다가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당연하죠. 이 가죽이면 제 몫이 훨씬 커요. 근데 이렇게 잘린 건 처음 봐요. 상처도 안 났으니 가공비도 덜 들겠는데요."
준호가 칼집을 낸 비늘을 벗기는 동안 현우는 기둥 뒤로 물러났다.
그는 바닥에 굴러다니던 마나스톤 두 개와 목 쪽에서 떨어진 피 묻은 살점, 남은 뼈 조각을 손으로 모았다.
[전환을 시작합니다.]
빛이 짧게 손바닥에 모였다.
[정산 완료. 36 HP가 적립되었습니다.]
[보유 포인트: 43 HP]
현우는 숫자를 확인하고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100 HP를 쓰고 36 HP를 채웠다. 커터칼 하나가 만들어 낸 결과였다. 마수 가죽을 전부 전환했더라면 더 얻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준호가 챙긴 부산물은 곧 현금이 된다.
관리비도 언젠가는 원화로 내야 한다.
그때 시스템 창 아래에 닫혀 있던 안내 하나가 새로 떠올랐다.
[회원 등급 안내]
[다음 등급까지 누적 구매 893 HP가 필요합니다.]
[등급 상승 시 전용 카테고리가 확장됩니다.]
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893 HP.
막연히 포인트를 모으는 것과 목표가 생긴 것은 달랐다. 커터칼 하나가 이 정도라면 전용 카테고리에는 대체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준호가 묵직한 가죽 봉투를 들고 다가왔다.
"현우 씨, 이거 진짜로 제가 가져가도 되는 거죠?"
현우는 시스템 창을 닫고 평소처럼 가방끈을 고쳐 잡았다.
"대신 오늘 본 건 비밀입니다. 주방용품을 무슨 유물처럼 떠들면 곤란하니까."
"누가 믿겠어요."
준호는 웃었다. 현우도 따라 웃었지만 속은 바빠졌다.
누가 믿든 상관없다.
다음 던전에서는 더 많이 벌어야 했다. 포인트도 현금도.
그리고 그보다 먼저, 이 쇼핑몰이 다음에는 무엇을 팔아 줄지 확인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