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 최후의 헌터 쇼퍼: B급이 구매한 S급 보상

시놉시스
E급 헌터 강현우는 폐물류센터 게이트에서 목숨값도 안 되는 전리품을 챙기려 한다. 그런데 손에 쥔 마나스톤이 사라지며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포인트가 적립된다.
1화: 던전 부산물 대신 포인트?
강현우는 게이트 앞에서 관리비 고지서를 반으로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빗물에 젖었던 종이는 이미 가장자리가 울어 있었다. 고지서 맨 아래에는 빨간 글씨가 선명했다. 납부 기한, 사흘 뒤.
E급 게이트의 마나스톤은 개당 몇 만 원이었다. 장비 대여비와 협회 수수료를 떼고 나면 하루 종일 피 냄새를 맡은 값이 편의점 도시락 몇 개였다.
그래도 안 갈 수는 없었다.
현우는 허리춤에 찬 대여 검을 손으로 눌렀다. 날이 조금 휘어 있었다.
"신입 둘은 앞에서 설치지 마."
회색 방수 재킷을 입은 임태식이 인원을 훑었다. 오늘의 임시 파티장인 그는 현우보다 열 살은 많아 보였다. 손목에는 C급 던전 출입증이 달린 팔찌가 보였다.
"고블린 나오면 방패 든 놈부터 묶는다. 준호는 뒤에서 가방 들어. 현우는 준호 옆. 그리고 부산물은 발견 즉시 내게 넘겨."
박준호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분배는 사전에 말씀하신 대로 균등하게요?"
태식은 헛웃음을 흘렸다.
"운반 인원은 반 배분이다. 위험한 자리 서는 사람들이 더 가져가는 게 당연하지."
"그럼 저는 왜 앞에 섭니까?"
현우가 물었다.
태식의 시선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앞은 아니고 옆이야. 싫으면 지금 나가든가."
등록 시간을 넘기면 오늘 일당은 날아간다. 현우는 고지서가 든 주머니를 한 번 눌렀다.
"반 배분은 못 받습니다. 대신 운반은 하죠. 전투는 제 목숨 챙기는 선에서만 하겠습니다."
태식의 눈썹이 꿈틀했다. 그는 잠시 현우를 노려보다가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그래. 죽지만 마라. 죽으면 정산도 귀찮으니까."
현우는 대꾸하지 않았다.
폐물류센터를 닮은 던전이었다. 깨진 형광등 아래 젖은 박스와 비닐이 발목을 잡았다.
"들어온다."
태식이 낮게 말했다.
녹슨 철제 선반 뒤에서 초록빛 얼굴 셋이 튀어나왔다. 녹슨 식칼을 든 고블린 병사들이었다. 가장 앞선 놈은 찌그러진 냄비뚜껑을 방패처럼 들고 있었다.
"왼쪽 하나, 오른쪽 둘!"
태식이 소리치며 달려들었다. 다른 파티원 하나가 화살을 날렸다. 화살은 고블린의 어깨에 박혔지만 놈은 멈추지 않았다.
현우는 준호의 가방끈을 잡아 뒤로 당겼다.
"선반 뒤로 가요. 짐은 버리고."
"아니, 이거 대여품인데."
준호가 가방을 붙잡은 채 뒷걸음질 쳤다. 그 발밑에 젖은 비닐이 깔려 있었다.
쭉.
준호의 발이 미끄러졌다. 몸이 앞으로 기울며 고블린의 식칼이 목을 향해 날아왔다.
현우는 생각할 틈 없이 끼어들었다.
대여 검으로 식칼을 밀어 올리자 손목까지 충격이 파고들었다. 검날에는 금방 흠집이 생겼다. 고블린이 이를 드러내며 다시 방패를 들이밀었다.
현우는 정면으로 받지 않았다. 놈의 발등을 걷어차 균형을 무너뜨린 뒤 방패 옆 빈틈을 찔렀다. 검끝이 갈비뼈 사이로 들어갔다.
고블린이 끽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일어나요!"
현우가 외치자 준호가 허둥지둥 몸을 굴렸다. 뒤늦게 태식이 남은 둘 중 하나의 목을 베었다. 마지막 놈은 화살을 맞고 박스 더미 위로 넘어졌다.
잠깐의 싸움이 끝났다.
현우는 거칠어진 숨을 삼켰다. 약한 마수에게도 한 번만 실수하면 사람 목은 똑같이 떨어졌다.
태식은 쓰러진 고블린을 발로 뒤집었다.
"가죽 안 찢어졌지? 준호, 빨리 담아. 현우는 마나스톤 찾아."
현우는 말없이 바닥을 살폈다. 피가 묻은 박스 밑에서 손톱만 한 푸른 돌 하나가 보였다. 그는 쪼그려 앉아 돌을 집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바닥에 닿았다.
띵.
귀에 직접 울린 것 같은 맑은 소리였다.
[정산 가능한 던전 자원이 감지되었습니다.]
현우의 손이 굳었다.
눈앞에 반투명한 글자가 떠 있었다. 마력 감지기를 볼 때도 이런 창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눈을 세게 비볐다.
글자는 지워지지 않았다.
[전환을 시작합니다.]
마나스톤이 손안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푸른빛이 실처럼 풀리더니 손바닥 안으로 스며들었다. 순간 뒤에는 피 묻은 장갑 위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차원 헌터 포인트 7 HP가 적립되었습니다.]
현우는 손을 뒤집었다.
빈 손이었다.
"뭐 해?"
태식이 고개를 들었다.
현우는 본능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돌 하나가 깨졌습니다."
"깨져? 마나스톤이 과자냐?"
"고블린 피에 오래 묻어 있었으니 불량일 수도 있죠."
태식이 다가왔다. 현우는 손을 펴 보였다. 피와 먼지뿐이었다.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태식은 혀를 차고 다음부터는 제대로 보라고 쏘아붙였다. 현우는 대답 대신 허공을 흘끗 봤다.
글자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대신 머릿속에 숫자 하나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7 HP.
돈이 아니라 포인트라고 했다. 무엇에 쓰는 포인트인지 알 길이 없었다.
그때 복도 깊숙한 곳에서 철판이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콰앙!
철제 선반 하나가 옆으로 쓰러졌다. 박스와 비닐 사이에서 검은 덩치가 모습을 드러냈다. 등에 바늘 같은 가시를 잔뜩 세운 멧돼지였다. 누런 눈이 다섯 사람을 차례로 훑었다.
"가시등껍질이다. 다 붙어!"
태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E급 게이트에도 가끔 튀어나오는 변종이었다. 등껍질이 두꺼워서 정면에서는 검이 잘 먹히지 않는다. 대신 돌진을 피하지 못하면 갈비뼈가 먼저 부러진다.
멧돼지가 앞발로 바닥을 긁었다.
태식은 제일 가까운 파티원을 향해 손짓했다.
"네가 유인해! 내가 옆구리 노린다."
"왜 제가요?"
"방금 고블린 잡았잖아. 움직임 빠르더만."
현우는 어이가 없었다. 전리품은 같이 나누면서 위험은 먼저 잡은 사람 몫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멧돼지는 이미 고개를 낮추고 있었다. 여기서 말싸움을 하면 준호가 또 표적이 될 뿐이었다.
현우는 천천히 한 걸음 앞으로 나갔다.
"선반 기둥으로 유도할 겁니다. 부딪치면 오른쪽 목덜미만 보세요. 등은 치지 말고."
태식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멧돼지가 달려들었다.
현우는 마지막 순간까지 자리를 지켰다. 놈의 뿔이 허벅지를 스칠 듯 가까워졌을 때 왼쪽으로 몸을 던졌다.
쿵!
멧돼지의 뿔이 철제 선반 기둥을 꿰뚫었다. 기둥이 휘면서 선반 전체가 덜컹거렸다. 놈은 고개를 빼려 했지만 뿔이 단단히 끼었다.
"지금!"
태식의 검은 비스듬히 미끄러져 멧돼지의 가시에 튕겨 나갔다.
멧돼지가 난폭하게 몸을 비틀었다. 기둥이 뽑히며 선반이 현우 쪽으로 기울었다.
현우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멧돼지가 고개를 들어 올리는 찰나, 턱 아래쪽에 살빛이 드러났다. 그는 흠집 난 대여 검을 양손으로 쥐고 그 틈을 향해 밀어 넣었다.
푹.
손끝에 걸리는 감각이 달랐다. 검날이 깊이 들어갔다.
멧돼지가 짧고 굵은 비명을 질렀다. 거대한 몸이 두 번 경련하더니 현우의 발치로 무너졌다.
복도 안이 조용해졌다.
현우는 검자루를 놓지 못한 채 멧돼지를 바라봤다.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늦게 밀려온 공포 때문에 무릎이 조금 떨렸다.
그때였다.
띵.
[정산 가능한 던전 자원이 감지되었습니다.]
푸른 창이 다시 떠올랐다.
[가시등껍질 멧돼지 1체, 마나스톤 4개, 잔류 환경 에너지.]
[전환을 시작합니다.]
"잠깐."
현우가 낮게 말했지만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도 몰랐다.
멧돼지의 사체가 희미한 빛을 뿜었다. 피와 털, 가시, 바닥에 굴러다니던 돌까지 모두 잿빛 입자가 되어 허공으로 빨려 들어갔다.
눈 깜짝할 사이였다.
[정산 완료. 100 HP가 적립되었습니다.]
현우의 머릿속 숫자가 바뀌었다.
107 HP.
"뭐야?"
준호가 비명을 삼켰다. 멧돼지가 있던 자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바닥에는 눌린 비닐과 검은 피 자국만 남아 있었다.
태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보스가 어디로 갔어?"
"저도 모릅니다."
"네가 마지막으로 찔렀잖아! 무슨 스킬 쓴 거야?"
현우는 즉시 고개를 저었다.
"E급이 무슨 스킬을 씁니까. 선반이 쓰러지면서 아래로 빠진 것 아닙니까?"
"사체가 통째로? 마나스톤까지?"
태식은 선반 밑을 들춰 보려 했지만 기둥이 엉켜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파티원도 복도를 훑었으나 멧돼지 한 마리가 지나갈 틈은 보이지 않았다.
현우는 억지로 무표정을 유지했다.
그의 시야 한가운데에서 새로운 창이 열렸다.
[셀레스티얼 헌터 복지몰]
[신규 이용자를 환영합니다.]
[보유 포인트: 107 HP]
현우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바라봤다.
태식이 불쾌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거기 보고 있지 말고 밖으로 나가. 이 건은 협회에 신고한다. 전리품 손실은 전원 정산에서 뺄 거니까 알아 둬."
현우는 그 말을 듣고도 반박하지 않았다. 보스 사체 값이 얼마인지 따질 여유가 없었다. 지금은 눈앞의 창이 더 비쌌다.
게이트 밖으로 나오자 비는 그쳐 있었다. 파티원들은 각자 협회에 낼 보고를 걱정하며 흩어졌다. 준호만 현우 곁에 잠깐 남았다.
"아까 고마웠습니다. 가방 버리라고 한 말 못 들었으면 큰일 날 뻔했어요."
"다음엔 가방보다 발밑부터 보세요. 대여품은 다시 빌리면 되니까."
준호는 씁쓸하게 웃었다. 현우도 웃지 못했다.
준호가 떠난 뒤 현우는 지하철역으로 걸었다. 주머니 속 고지서는 여전히 얇았고 통장 잔고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발걸음은 아까보다 가벼웠다.
지하철 맨 끝자리에 앉은 현우는 아무도 자신을 보지 않는 것을 확인한 뒤 허공의 창을 손가락으로 눌렀다.
푸른 창이 화면처럼 넓어졌다.
[셀레스티얼 헌터 복지몰에 접속합니다.]
검은 바탕 위로 은빛 글자가 흘렀다. 낯선 별자리와 알아볼 수 없는 문양이 지나간 뒤, 예상 밖으로 친숙한 화면이 떠올랐다.
검색창.
카테고리.
장바구니 모양의 작은 아이콘.
현우는 멍하니 그 아이콘을 봤다.
"쇼핑몰?"
화면 아래에는 짧은 안내문이 떠 있었다.
[사냥으로 적립하고 더 안전한 삶을 구매하세요.]
그 밑에는 현재 포인트가 표시됐다.
107 HP.
현우는 저 숫자가 원화로 얼마인지 몰랐다. 관리비를 낼 현금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손끝은 떨렸다. 평생 현우에게 쇼핑은 필요한 것 중 가장 싼 것을 고르고 결국 장바구니를 비우는 일이었다.
던전을 돌면 쌓인다. 그리고 그걸로 무언가를 살 수 있다.
현우가 첫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신규 이용자 추천]
[초진동 분자 커터칼]
[생활용 절단 기구 / 100 HP]
상품 사진 속 칼은 과일칼보다 조금 큰 정도였다. 검은 손잡이와 은색 칼날이 전부였다.
그러나 설명 첫 줄을 읽은 현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분자 결합을 정밀하게 분리합니다. 단단한 재료일수록 깔끔한 절단감을 보장합니다.]
현우는 지하철 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봤다.
흠집 난 대여 검을 들고 멧돼지 턱밑을 겨우 찔렀던 E급 헌터의 얼굴이었다.
그는 다시 상품 화면으로 시선을 옮겼다.
장바구니 버튼이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