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 상담 간 천마님이 유통망을 독점함

12화: 학부모 상담실의 천마식 장부
낙도 만물상 카운터 위에는 하은이가 적어 준 작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 말씀 끊지 않기. 무서운 눈으로 보지 않기. 상담 끝나고 화난 말 하지 않기.]
독고현은 종이를 두 손으로 들고 엄숙히 읽었다. 천하의 문파 수장들과 혈투 직전의 협상을 벌일 때도 이만큼 긴장하지는 않았다.
"하은아. 이 삼촌은 원래 남의 말을 아주 잘 듣는다."
"아니야. 삼촌은 듣다가 화나면 눈으로 다 말하잖아. 오늘은 선생님이 놀라면 안 돼."
하은이는 현의 코트 깃을 반듯하게 세웠다. 작은 손은 야무졌지만 눈빛 한쪽에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내가 학교에서 괜찮다고 했는데도 상담 가야 해?"
"아이가 괜찮다고 말하는 것과 정말 괜찮은 것은 다른 법이다."
현은 하은이의 책가방에서 나온 구겨진 눈꽃을 코트 안주머니에 넣었다. 한 번 접혔던 자국이 하은이의 마음처럼 선명했다.
"다만 선생님께 묻는 동안 네가 싫어하는 방식으로 누구를 혼내지는 않겠다. 그것이 오늘의 약조다."
하은이는 한참 그의 얼굴을 살피다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진짜? 무서운 눈싸움도 안 하고?"
"상담실 안에서는 하지 않으마."
"상담실 밖에서도 안 돼."
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은이가 원한다면 장부와 말로 해결하마. 이 삼촌이 먼저 듣고 나서 움직이겠다."
그 대답을 들은 하은이는 조금 안심한 듯 웃었다.
"그리고 선생님한테는 내 얘기 너무 많이 하지 마. 내가 울었다고도 말하지 말고."
"울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하지는 않겠다. 다만 하은이가 얼마나 씩씩했는지는 반드시 말하마."
"그건 말해도 돼."
하은이가 작게 웃자 현은 비로소 숨을 골랐다. 조카에게는 적의 목을 겨누는 일보다 약속을 지키는 일이 더 어려웠다.
낙도초등학교 상담실은 복도 끝 햇볕이 잘 드는 곳에 있었다.
강서윤은 책상 위에 따뜻한 보리차 두 잔과 얇은 상담 기록지를 준비해 두고 있었다. 독고현이 들어오자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럽게 인사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은이가 걱정할까 봐 연락을 드릴지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 고민을 해 준 것만으로도 고맙습니다. 선생께서 보신 일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현은 앉자마자 스마트폰 메모장을 켰다. 화면 잠금을 푸는 데 잠시 시간이 걸렸지만 그는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 휴대폰을 책상 위에 똑바로 놓았다.
서윤은 그 모습을 보고 아주 잠깐 미소 지었다. 하은이가 말한 무서운 삼촌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진지하게 상담 준비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곧 그녀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백도윤 학생이 하은이와 놀면 골드 키즈 체험권을 못 받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아이들에게 금색 스티커를 나눠 주면서 하은이와 같은 모둠이 되지 말라는 식으로요."
현의 손가락이 메모장 위에서 멈췄다.
"그 말은 누가 들었습니까?"
"교실에 있던 아이들이 들었습니다. 제가 바로 제지했고 관찰 기록에도 남겼습니다. 다만 아이들이 어려서 정확한 진술을 요구하기보다는 학급 안에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지도하려 했습니다."
"옳은 판단입니다. 아이에게 어른들의 싸움을 증언시키는 것은 또 다른 상처가 될 테니까요."
서윤은 놀란 눈으로 현을 보았다.
그녀는 화를 내거나 당장 백도윤의 부모를 불러 달라는 보호자를 예상했다. 하지만 현은 분노를 숨긴 채 필요한 말만 장부처럼 차곡차곡 적고 있었다.
"도윤이가 한 말은 아이 혼자 생각해 낸 말투가 아니었습니다. 학교가 곤란해진다거나 특정 가정과 엮이면 명단에서 빠질 수 있다는 표현을 썼어요."
"그 아이의 부모와 학교가 체험권 이야기를 나눈 흔적이 있습니까?"
서윤은 대답하기 전 보리차 잔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하다고 말씀드리기는 어렵습니다. 다만 골드 크레센트 낙도지부가 후원 물품 명목으로 체험권을 보냈다는 건 들었습니다. 행정실에서 수령대장을 작성했고 학부모회 쪽에도 전달됐어요."
"누가 받을지는 정해져 있습니까?"
"원래는 예비반 전체에게 안내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학부모회에서 추천 명단을 먼저 달라는 말이 나왔어요. 공식 가정통신문에는 체험 프로그램이라고만 적혔고요."
현은 메모장에 수령대장, 안내문, 추천 명단이라고 적었다. 후원이라는 이름으로 물건을 들이고 그 물건을 줄 사람을 골라 영향력을 사는 수법이었다.
무림의 상단에서도 흔한 계략이었다. 다만 그곳에서는 체면이라도 차리며 어른들끼리 장부를 주고받았다.
아이들의 손등에 붙일 금빛 스티커까지 이용하는 것은 더 비열했다.
"선생께서는 이 일 때문에 곤란한 일을 겪고 있습니까?"
서윤의 손끝이 잠시 굳었다.
"교장실에 학부모 전화가 몇 번 왔습니다. 하은이의 가정이 골드 크레센트와 분쟁 중이라는 이야기도 나왔고요. 저는 교실에서 일어난 일만 보고 판단하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잘하셨습니다. 선생은 하은이의 담임이지 길드의 장부를 봐 주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그 한마디에 서윤은 시선을 내렸다. 당연한 말인데도 학교 안에서는 아무도 그 당연함을 말해 주지 않았다.
문밖 복도에서 구두 소리가 멈췄다.
잠시 뒤 상담실 문이 열리며 윤태호 교감이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시선은 독고현의 메모장과 서윤의 기록지 위를 빠르게 훑었다.
"아, 상담 중이셨군요. 강 선생님, 후원 물품 이야기는 아직 정리된 게 없으니 보호자님께 오해를 드릴 만한 말씀은 삼가는 게 좋겠습니다."
서윤의 어깨가 미세하게 굳었다.
현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휴대폰을 천천히 뒤집어 화면을 끄고 교감을 올려다보았다.
"교감 선생님. 보호자로서 확인하겠습니다. 하은이와 관련한 생활지도 기록과 체험권 안내문, 학교가 수령한 후원 물품의 대장을 열람할 수 있겠습니까?"
윤태호는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생활지도 기록은 교내 문서라 절차가 있습니다. 체험권도 아직 확정 행사가 아니고요. 후원은 아이들을 위한 좋은 뜻에서 들어온 겁니다."
"좋은 뜻이라면 기록을 감출 이유가 없겠지요."
현의 목소리는 낮았으나 단단했다.
"특정 아이가 그 물품을 빌미로 교실에서 배제되었다면 보호자는 그 과정이 공정했는지 묻는 것이 마땅합니다. 오늘 답이 어렵다면 정식 열람 신청서를 내겠습니다."
교감의 미소가 얇아졌다.
"그렇게까지 하실 일은 아닙니다. 다만 학교도 외부 후원처와의 관계가 있으니 신중해야 합니다."
"신중함은 아이를 밀어내는 이유가 아니라 아이를 지키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서윤이 조용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오늘 있었던 일을 관찰 기록에 남기겠습니다. 하은이와 다른 아이들이 다시 편하게 지낼 수 있도록 지도 계획도 작성하겠습니다."
윤태호는 서윤과 현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행정실에서 가져온 신청서 한 장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접수는 해 드리겠습니다. 답변 기한은 규정대로 안내하겠습니다."
현은 신청서의 빈칸을 훑었다. 보호자 성명, 열람 대상, 열람 사유. 그는 서툰 손으로 글자를 적었다.
열람 대상에는 체험권 안내문과 후원 물품 수령대장, 하은의 생활지도 기록을 적었다.
열람 사유 칸에는 짧게 한 줄만 썼다.
[독고하은의 교육환경과 차별 예방 조치 확인.]
교감은 접수 도장을 찍고 종이를 가져갔다. 도장이 종이를 누르는 짧은 소리가 상담실에 또렷하게 울렸다.
서윤은 그 소리를 듣고서야 조심스럽게 숨을 내쉬었다.
"보호자님. 하은이에게는 제가 다시 이야기하겠습니다. 아이가 잘못한 일은 없다고요."
"그 말을 해 주셨으니 오늘 상담은 이미 절반을 끝낸 셈입니다. 나머지는 어른들이 할 일이겠지요."
현은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상담실 문을 나서는 걸음은 느렸지만 그의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복도 끝 교실에서는 아이들의 종이 접는 소리가 났다.
하은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여기는 이렇게 접으면 별이 돼. 내가 보여 줄게."
현은 문을 열지 않았다. 하은이가 스스로 만든 작은 자리를 지켜 주는 것이 먼저였다.
그는 코트 안주머니에서 구겨진 눈꽃을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종이 한 장에 남은 접힌 선은 지워지지 않았다.
그러나 다시 접으면 다른 모양이 될 수는 있었다.
만물상으로 돌아오자 김철수가 카운터 앞에서 의자를 돌려 현을 맞았다.
"상담은 잘 끝나셨어요?"
"잘 끝났다기보다 시작할 장부가 늘었다."
현은 철수에게 방금 적은 메모를 내밀었다.
"낙도초의 공개 후원 공고와 골드 크레센트의 체험 프로그램 안내를 모아라. 기사와 공개 게시글만 쓰고 사적인 계정에는 손대지 말거라. 후원 물품을 납품한 곳과 체험권을 홍보한 곳도 분류해 두거라."
철수는 메모를 읽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쪽을 조사하시는 겁니까?"
"조사라기보다 장부를 맞춰 보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주었고 그 대가로 아이들 곁에서 무엇을 가져갔는지 말이다."
그때 플랫폼 상담용 전화가 울렸다. 최두식이 받더니 표정이 어두워졌다.
"대표님. 채소 가게 사장님이 전화했습니다. 골드 크레센트 계열 도매상이 다음 주부터 물건을 안 주겠다고 했답니다. 천마 플랫폼에 입점한 가게들은 전부 거래를 끊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고요."
철수의 손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벌써요? 입점 상인들까지 건드리면 동네 가게들이 큰일인데요."
현은 코트 안주머니의 눈꽃을 다시 만졌다.
학교 안에서는 체험권으로 아이들을 갈라놓고 골목에서는 물건줄로 상인들을 조르려 한다.
같은 장부에서 나온 수법이었다.
"두식아. 공급이 끊긴 품목과 통보받은 상점 이름을 빠짐없이 받아 적어라. 철수는 플랫폼에 대체 납품 요청 창을 만들 준비를 해라."
"대체 납품이요?"
"골드 크레센트가 자기 장부에 적어 놓지 않은 상인들부터 찾는다. 지방의 생산자와 낙도구의 가게가 바로 거래할 길을 열면 된다."
현의 눈빛이 조용히 가라앉았다.
"상대가 먼저 공급의 문을 닫았으니 우리는 그 문 밖에 더 큰 장터를 세우면 된다. 상인들이 물건을 못 팔게 하겠다는 자들에게, 누구의 유통망이 진짜 필요한지 알려 주마."
천마 플랫폼의 화면 위로 새 주문 알림이 연달아 떠올랐다.
금빛 초승달이 드리운 그림자 아래에서, 유통 전쟁의 첫 장부가 펼쳐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