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대 맹주가 훈수를 너무 잘 둠

시놉시스
삼류 문파 화청문의 하급 무사 단우진은 검을 배워도 궤적이 비틀리고 내공을 익혀도 진기가 흩어지는 둔재다. 문파 안에서 조롱받던 그는 어느 날 위험한 절벽 채약 임무를 떠맡고 동문들의 함정에 빠져 추락한다. 죽음 직전 발견한 석굴에서 그는 전대 무림맹주 정운휘의 봉인된 비급을 만지고 머릿속에 깃든 전설의 영혼과 만나게 된다.
1화: 절벽 아래의 훈수
연무장 흙바닥에 단우진의 목검이 먼저 떨어졌다.
그다음엔 단우진이 떨어졌다.
등이 바닥에 닿는 순간 숨이 턱 막혔다. 흐린 하늘이 한 바퀴 뒤집혔다가 제자리로 돌아왔고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단 사제. 삼재검법 초식 이름은 알고 휘두른 거냐?"
조형기가 목검 끝으로 우진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화청문 대제자의 측근답게 옷깃은 깨끗했다. 눈빛은 그와 반대로 지저분했다.
우진은 누운 채로 웃었다.
"알죠. 천지인 아닙니까. 방금은 제가 땅을 맡았습니다."
연무장에 다시 웃음이 번졌다. 조형기의 입꼬리가 굳었다. 웃자고 한 말이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입은 제법 살아 있네."
"검이 죽어서 균형을 맞추는 중입니다."
우진은 몸을 굴려 일어났다. 옆구리가 욱신거렸다. 방금 맞은 곳은 급소를 살짝 비껴갔지만 숨을 뺏기에는 충분했다.
그는 다시 목검을 집었다.
손목에 힘을 넣자마자 단전 아래에서 억지로 끌어모은 진기가 모래처럼 흩어졌다.
늘 그랬다.
남들은 하룻밤 운기조식으로 붙잡는 기운을 그는 한 달을 붙들어도 지키지 못했다.
조형기가 다시 파고들었다.
우진은 막으려 했다. 하지만 목검의 궤적이 반 박자 늦었다. 어깨를 얻어맞고 무릎이 꺾였다.
"이게 화청문 제자냐."
"잡역 제자도 제자는 제자죠."
"문주님이 널 왜 아직 내쫓지 않는지 모르겠다."
우진도 그 이유는 알았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긷고 잡서고 먼지를 터는 손은 필요했다. 위험한 심부름을 맡겼다가 돌아오지 않아도 누구 하나 크게 따지지 않을 사람도 필요했다.
그게 단우진이었다.
조형기는 품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우진의 가슴팍에 던졌다.
"청심초 세 뿌리. 해 지기 전에 가져와라."
우진은 종이를 펼쳤다가 입맛이 써졌다. 장소가 적혀 있었다. 청운절벽 중턱. 비 온 뒤에는 산짐승도 길을 피한다는 곳이었다.
"사형. 거긴 어제 비 때문에 길이 무너졌을 겁니다."
"그래서 네가 가는 거다."
조형기가 웃었다.
"떨어져도 문파 손해가 적잖아."
연무장에 묘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방금 전까지 웃던 제자들 몇이 시선을 피했다.
우진은 종이를 접어 품에 넣었다.
"청심초 세 뿌리면 됩니까?"
"뿌리 상하면 네 몫의 저녁은 없다."
조형기의 목검이 날아왔다. 우진은 피하지 못하고 정강이를 맞았다. 여기서 대들어 봐야 남는 건 부러진 다리뿐이었다.
등 뒤에서 조형기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단 사제. 살아 돌아오면 칭찬은 해 주마."
청운절벽으로 가는 산길은 축축했다. 흙은 발밑에서 질척거렸고 바위 표면에는 이끼가 번들거렸다. 우진은 허리에 밧줄을 묶고 절벽 위 나무에 매듭을 걸었다.
밧줄은 낡았다.
겉은 멀쩡해 보였지만 손바닥으로 훑자 가는 올이 몇 가닥 일어났다. 누군가 일부러 손댄 흔적인지 오래 써서 삭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우진은 매듭을 두 번 더 감았다.
"삼류무사 단우진. 오늘의 목표는 약초 세 뿌리와 생존."
그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내렸다.
청심초는 교묘한 곳에 있었다. 손을 뻗으면 닿을 듯했고 한 발 더 디디면 바로 떨어질 듯한 틈새였다. 우진은 바위 턱에 발끝을 걸고 몸을 기울였다.
손끝이 푸른 잎을 스쳤다.
그 순간 위쪽에서 밧줄이 낮게 울었다.
투둑.
우진의 등줄기가 차갑게 식었다.
"아니지."
투두둑.
섬유가 끊어지는 소리는 작았다. 하지만 절벽 중턱에 매달린 사람에게는 천둥보다 컸다.
우진은 본능적으로 바위를 움켜쥐었다. 손톱이 갈라졌다. 피가 묻은 손가락이 미끄러졌다.
위쪽에서 누군가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
밧줄이 완전히 끊어졌다.
몸이 허공으로 빠졌다. 바람이 귀를 찢었다. 세상이 회색으로 번졌다. 나뭇가지가 등을 후려쳤고 바위 모서리가 허벅지를 긁었다.
그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손을 뻗었다.
잡히는 것은 없었다.
마지막으로 차가운 물이 전신을 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 우진은 계곡 가장자리에 걸려 있었다.
왼쪽 다리는 남의 것처럼 무거웠다. 옆구리에서는 뜨거운 피가 새고 있었다. 입안에는 흙과 쇠 맛이 섞였다.
구름은 여전히 낮았다. 비는 더 굵어졌다. 절벽 위는 보이지 않았다.
우진은 웃었다.
"문파 손해가 적다더니. 내 손해는 꽤 큰데."
웃다가 기침이 터졌다. 갈비뼈 안쪽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다. 그는 손바닥으로 옆구리를 눌렀다.
여기 누워 있으면 죽는다.
계곡물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는 짐승 울음이 들렸다. 화청문 제자복에 묻은 피 냄새를 맡고 내려오는 놈이 있을지도 몰랐다.
우진은 기었다. 무릎이 돌에 찍히고 손바닥 살갗이 벗겨졌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누가 밧줄 위에 서 있었는지 확인하기 전에는 눈을 감을 수 없었다.
물길 끝에 좁은 틈이 보였다.
석벽 사이로 난 균열이었다. 사람 하나가 겨우 들어갈 만했고 적어도 비는 피할 수 있었다.
우진은 몸을 밀어 넣었다.
처음에는 그저 바위틈인 줄 알았다. 그러나 몇 장쯤 기어 들어가자 공간이 넓어졌다. 천장이 높아지고 바닥이 평평해졌다. 누군가 오래전 손으로 깎아 만든 석굴이었다.
벽에는 검흔이 남아 있었다.
한 줄.
또 한 줄.
세월이 먼지를 쌓았는데도 검흔은 이상하리만큼 선명했다. 우진은 무심코 그 선을 따라 눈을 움직였다가 숨을 멈췄다.
직선인 줄 알았던 흔적이 끝에서 살짝 휘었다. 휘어진 끝은 다시 아래쪽 검흔과 이어졌다. 벽 전체가 거대한 검식의 흐름처럼 보였다.
석굴 가운데에는 낮은 석함이 놓여 있었다.
그는 석함까지 기어갔다. 뚜껑 위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피와 먼지에 가려 대부분은 읽을 수 없었다. 그래도 두 글자는 남아 있었다.
천류.
우진의 눈꺼풀이 떨렸다.
천류신검.
잡서고에서 몇 번이나 본 이름이었다. 전대 무림맹주 정운휘.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되어 강호에 온갖 소문만 남긴 괴물 같은 검객.
"전설이 왜 이런 데 묻혀 있습니까."
물론 대답은 없었다.
우진은 석함의 뚜껑을 밀었다.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한참을 낑낑거려야 했다. 돌이 긁히는 소리가 석굴 안을 울렸다.
안에는 낡은 비급 한 권이 있었다.
표지는 검게 바랬고 모서리는 부스러질 듯했다. 우진은 손을 뻗다가 멈췄다. 이런 물건은 보통 만지는 순간 독침이 날아오거나 저주가 걸린다. 무림 야사에서 배운 유용한 상식이었다.
밖으로 나가도 죽고 여기 있어도 죽는다. 죽을 방법을 고를 처지라면 비급을 만지고 죽는 편이 덜 억울했다.
우진은 비급을 집었다.
순간 석굴 전체가 낮게 울렸다. 벽의 검흔에서 흰빛이 번졌다. 빛은 실처럼 풀려나와 우진의 손목을 감았다.
흰 선들이 눈앞에 떠올랐다.
선들은 그의 팔과 다리와 가슴을 꿰뚫었다. 뼈와 혈관 사이로 길을 그리듯 번졌다. 막힌 곳은 붉게 타올랐고 비어 있는 곳은 검게 가라앉았다.
우진은 이를 악물었다.
"이거 역시 저주였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머릿속을 때렸다.
〔허.〕
우진은 숨을 삼켰다.
석굴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몸으로 검을 배웠다고? 누가 네게 그런 잔인한 짓을 시켰느냐?〕
"누구십니까."
목소리는 대답 대신 혀를 찼다.
〔단전은 비었고 기맥은 꼬였고 호흡은 장작 패는 소리 같구나. 팔은 따로 놀고 다리는 겁을 먹었고 눈은 검 끝보다 상대 표정부터 본다. 이놈아. 너는 무공을 못 배운 게 아니라 잘못 배운 것만 골라 배웠다.〕
우진은 잠시 멍해졌다. 욕이 너무 정확했다.
"처음 뵙는 분께 듣기에는 꽤 세밀한 모욕입니다."
〔모욕이 아니다. 진단이다.〕
"그럼 더 기분 나쁩니다."
우진은 석벽에 등을 기댔다. 피가 손가락 사이로 새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살고 싶으냐.〕
우진은 갈라진 입술을 핥았다.
"공짜입니까?"
〔뭐라?〕
"강호에서 공짜로 살려주는 건 사기 아니면 사채라 배웠습니다."
잠깐 침묵이 흘렀다.
그러더니 낮은 웃음이 머릿속을 울렸다.
〔입은 살아 있구나. 좋다. 그 입으로 숨부터 똑바로 쉬어라. 지금처럼 들이마시면 갈비 밑 상처가 벌어진다. 왼쪽 옆구리를 누르고 아랫배를 먼저 당겨라.〕
〔거기가 아니다. 손가락 세 마디 아래. 아니 더 아래다. 이 멍청한 놈아.〕
"방금 살려 주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살리려니 욕이 나오는 것이다.〕
우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그런데 이상했다. 목소리가 시킨 대로 손을 옮기고 숨을 짧게 끊자 가슴을 찢던 통증이 조금 내려앉았다.
흩어지던 숨이 배 아래에 아주 잠깐 고였다.
정말 아주 잠깐이었다. 그래도 우진은 그 감각을 놓치지 않았다. 평생 단전이라는 말을 들어도 허깨비 같았던 곳에 작은 돌멩이 하나가 떨어진 느낌이었다.
목소리가 낮게 말했다.
〔나는 정운휘다. 한때 천류신검이라 불렸고 무림맹의 맹주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다. 그리고 네놈 같은 재앙적 둔재는 내 평생 처음 본다.〕
우진은 눈을 깜빡였다.
전대 무림맹주.
잡서고 책 속에서나 보던 이름이 자신의 머릿속에서 욕을 하고 있었다.
"제가 죽기 직전이라 꿈이 웅장하군요."
〔꿈이면 네 몸이 덜 한심했겠지.〕
"첫 만남에 칭찬이 과하십니다."
〔칭찬이 아니다. 경악이다.〕
석굴 밖에서 물소리가 커졌다. 비가 계곡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오래 버틸 수 없었다.
우진은 피 묻은 손으로 비급을 움켜쥐었다.
죽지 않는다.
살아서 돌아간다.
누가 밧줄 위에 서 있었는지 확인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조형기의 그 잘난 얼굴에 연무장 흙맛을 가르쳐 준다.
정운휘가 다시 혀를 찼다.
〔허리를 펴라. 그 꼴로 복수하겠다고? 복수는 걷는 법부터 다시 배운 뒤에 해라.〕
"걷는 법은 압니다."
〔아는 놈이 그렇게 넘어지느냐.〕
"맞고 넘어진 겁니다."
〔그러니 더 문제다. 맞기 전에 피해야지.〕
우진은 피식 웃었다. 피가 모자라 정신이 흐려지는데도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죽음의 바닥에서 만난 전설이 처음 해 준 말이 격려가 아니라 잔소리라니.
어쩌면 더 믿을 만했다.
"예. 사부님인지 빚쟁이인지 모를 어르신."
〔사부라 부르기에는 네 기본이 처참하다. 우선 임시 환자다.〕
"환자에게 욕을 너무 하십니다."
〔욕이 아니라 훈수다. 이제부터 네놈은 숨 쉬는 법부터 다시 배운다. 내 말 한 호흡이라도 놓치면 죽는다.〕
우진은 천천히 허리를 폈다.
갈비뼈가 비명을 질렀다. 왼쪽 다리는 여전히 말을 듣지 않았다. 그래도 아랫배에 고였던 작은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정운휘의 목소리가 석굴보다 깊게 울렸다.
〔들이마시지 마라. 먼저 비워라. 썩은 호흡을 밀어내고 새 숨을 받아라. 그래. 거기다. 이제 그 쓰레기 같은 기혈부터 사람 꼴로 고친다.〕
우진은 피 묻은 입술로 웃었다.
첫 운기조식은 그렇게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