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감독, 축구 신이 되다

36화: 빈칸의 주인
프린터는 종이를 기억하지 못했다.
적어도 문장으로는 그랬다.
조 코치가 공용 프린터 관리 화면을 열어 둔 채 말했다.
"작업명은 없습니다. 제목도 남지 않았습니다."
앤서 핌스가 바로 물었다.
"그럼 복구는 불가능합니까?"
"내용은요."
조 코치가 다른 창을 띄웠다.
"형태는 조금 남았습니다."
검은 배경 위로 숫자들이 줄지어 올라왔다.
페이지 크기.
상하좌우 여백.
줄 수.
하단에서 몇 밀리미터 위에 찍힌 짧은 문자열 자리.
문장은 없었다.
하지만 문장이 있었던 자리는 남아 있었다.
서시우는 화면을 오래 봤다.
빈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너무 적게 말했다.
조 코치가 클립보드 덮개 사진을 옆에 붙였다.
오른쪽 아래에 묻어 있던 토너 가루.
스풀 캐시에 남은 하단 오른쪽 여백.
두 화면은 완전히 같은 증거가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앤서가 팔짱을 꼈다.
"작업표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군요."
"네."
"대체 직원이 기억한 문구와도 완전히 일치하지 않고요."
"완전히는 아닙니다."
조 코치가 일부 복구된 조각을 확대했다.
깨진 글자.
두 글자 길이의 단어 자리.
하단에 짧게 붙은 회수 문구 위치.
우처럼 보이는 획.
후의 일부처럼 보이는 모양.
수로 끝나는 하단 문자열.
시우가 말했다.
"단어를 맞히면 안 됩니다."
조 코치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길이와 위치만 보겠습니다."
시우는 클립보드 사진을 가리켰다.
"처음 온 사람이 봤을 때 무엇처럼 보였는지요."
앤서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식 문서처럼 보이는 흑백 한 장."
"네."
"하지만 내부 양식은 컬러 머리글입니다."
"그래서 명령이 아니라 문서처럼 보이게 만든 겁니다."
앤서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명령은 사람을 찾게 했다.
문서는 절차를 찾게 했다.
누군가 그 차이를 알고 있었다.
조 코치가 다음 로그를 열었다.
temp_process_04
제목 없는 흑백 1장.
용지 걸림.
재출력.
작업 완료.
회수 지연 18초.
앤서가 낮게 말했다.
"만든 사람, 가져간 사람, 꽂은 사람."
시우가 받았다.
"아직 셋입니다."
"셋을 섞으면 안 된다."
"네."
조 코치가 짧게 답했다.
"분리해서 보겠습니다."
훈련장에서는 벤 올리베리가 빈 공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 공은 늦었다.
조나 그랜트는 선 밖에 서 있었다.
발끝은 잔디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런데 수비수의 눈은 한 번씩 조나 쪽으로 갔다.
벤은 그 눈이 돌아오는 순간을 노렸다.
너무 늦었다.
공은 중앙 미드필더의 뒤꿈치에 걸렸다.
마르코 리드가 벤치에서 말했다.
"빈칸 보지 마."
벤이 숨을 골랐다.
"그럼 뭘 봅니까."
"채우러 오는 놈."
벤은 공을 주워 오며 조나를 보려 했다.
고개가 반쯤 돌아갔다.
멈췄다.
조나는 여전히 선 밖에 있었다.
그가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아니, 있었다.
상대가 한 번 버리고, 다시 주워 가고 싶은 자리로 남아 있었다.
다음 공이 왔다.
수비수는 조나를 봤다.
버렸다.
그리고 중앙을 닫았다.
벤은 그 틈으로 넣지 않았다.
수비수의 어깨가 안쪽으로 접히는 순간을 봤다.
오른발이 중앙을 막으러 들어왔다.
그 발 뒤에서 왼발이 반 박자 떠 있었다.
벤의 패스는 오른발 앞이 아니었다.
왼발이 다시 땅을 찾기 전, 그 뒤쪽으로 낮게 굴렀다.
짧았다.
빠르지도 않았다.
그런데 수비수는 이미 빈칸을 채우러 몸을 접은 뒤였다.
다시 펴기에는 반 박자 늦었다.
중앙 미드필더가 늦게 달려들었다.
이번에는 공이 발뒤꿈치에 걸리지 않았다.
발 안쪽에 맞고, 다음 선수의 앞쪽으로 흘렀다.
마르코가 손가락 하나를 들었다.
"그거."
벤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조나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발끝을 보던 시선을 조금 들어 수비수의 어깨를 봤다.
자신은 아직 들어가지 못했다.
하지만 상대는 자신을 한 번 계산했다.
그리고 버렸다.
버린 뒤의 움직임이 길을 만들었다.
복도 의자에서 리암 애스크가 낮게 말했다.
"없는 자리가 더 늦게 닫힐 때가 있습니다."
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하면 선을 넘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대로 서 있었다.
완전히 빠져 있지도 않은 채로.
분석실 문이 열렸다.
아서 웨스트가 들어왔다.
양복 재킷 단추가 하나 어긋나 있었다.
그는 그것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앤서가 보안 문제라고 했습니다."
시우는 화면을 끄지 않았다.
아서가 프린터 로그와 클립보드 사진을 번갈아 봤다.
"이게 외부로 나가면 곤란합니다."
앤서가 말했다.
"아직 외부로 내보낼 단계가 아닙니다."
"그럼 내부에서 끝낼 수 있습니까?"
아무도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조 코치가 새 로그를 띄웠다.
정리 담당
임시 패스.
담당자명 공란.
사후 등록 대기.
요청 경로는 시설 외주 접수.
아서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건 누구 계정입니까?"
앤서가 답했다.
"사람 계정이 아닙니다. 외주 청소, 시설 점검, 간단한 장비 이동 요청이 묶이는 공용 큐입니다."
"왜 담당자명이 비어 있습니까?"
"현장 처리 뒤에 붙는 경우가 있습니다. 절차상 완전히 불가능한 공란은 아닙니다."
그 말이 더 나빴다.
이상한 칸이면 바로 멈췄을 것이다.
이상하지 않은 공란이었기 때문에 지나갔다.
아서가 낮게 물었다.
"누구든 쓸 수 있다는 뜻입니까?"
"그건 아닙니다."
시우가 말했다.
"누군가 그렇게 보이길 바랐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임시 처리 계정.
공용 접수 큐.
사후 등록.
제목 없는 출력.
컬러 머리글 없는 문서.
하나만 보면 착오였다.
여러 개가 같은 시간에 겹치자 길이 됐다.
아서는 화면을 보다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에게 숫자는 비용이었다.
공란은 책임이었다.
둘 다 구단이 감당해야 하는 종류였다.
그는 더 이상 이 일을 작은 오해라고 부르지 않았다.
아서가 앤서를 봤다.
"경찰에 넘겨야 합니까?"
앤서는 바로 답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시우도 바로 답하지 않았다.
신고.
구단 이미지.
선수 보호.
조나 그랜트의 임대 협상.
벤에게 들어온 비공개 문의.
마르코가 빠진 수비.
모든 것이 같은 오후 안에 있었다.
하지만 흐릿한 로그를 그대로 넘기면, 이름 없는 절차가 이름 없는 책임으로 바뀔 뿐이었다.
시우가 말했다.
"원본 보존부터 하겠습니다."
아서의 눈이 흔들렸다.
"신고하지 않겠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신고를 하더라도 흐려지지 않게 만드는 겁니다."
시우는 화면의 공란들을 차례로 짚었다.
"접근 권한 동결. 스풀 캐시 복사. 임시 패스 사후 등록 대기 목록 백업. temp_process_04와 시설 외주 접수는 담당자 승인 없이는 출력이나 패스 요청을 못 하게 막아 주십시오."
앤서가 바로 받았다.
"외주 큐는 제가 잠그겠습니다. 현장 요청은 임시로 수동 승인으로 돌리죠."
아서가 물었다.
"범인은요?"
시우는 잠깐 훈련장 쪽 창을 봤다.
벤이 다시 공 앞에 서 있었다.
"빈칸을 막으면, 다음에는 이름을 써야 합니다."
만족스러운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가장 먼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조 코치가 백업 작업을 시작했다.
화면에 파일들이 하나씩 복사됐다.
프린터 스풀 캐시.
임시 패스 로그.
공용 큐 요청 목록.
보관실 앞 원본 영상.
훈련장에서는 벤이 다시 패스를 넣었다.
조나는 선 밖.
리암은 복도.
마르코는 벤치.
누구도 분석실의 공란을 몰랐다.
그래야 했다.
앤서가 말했다.
"선수들에게는 알리지 않겠습니다."
"네."
"대체 직원에게도 추가 확인 전까지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좋습니다."
조 코치가 갑자기 손을 멈췄다.
"감독님."
시우가 돌아봤다.
조 코치가 공용 큐 요청 상세를 열어 두고 있었다.
첨부 메모.
짧은 한 줄.
표시 시간.
조 코치가 프린터 로그를 옆에 붙였다.
15:14:37 보관실 앞 통로 정리 요청.
15:15:09 흑백 1장 재출력 완료.
15:15:27 배출함 센서 비움.
앤서가 화면 앞으로 다가왔다.
"통로 정리 요청이 출력보다 먼저입니까?"
"네."
조 코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종이가 나오기 전에, 보관실 앞을 비우는 요청이 먼저 들어왔습니다."
누가 요청했는지는 없었다.
요청을 넣은 자리도 아직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순서는 바뀌었다.
종이가 사람을 움직인 것만은 아니었다.
사람이 움직일 빈칸이 먼저 만들어져 있었다.
시우의 시야에 작은 창이 떠올랐다.
[관찰]
빈칸은 비어 있지 않다.
누군가 채울 순서를 먼저 정한다.
시우는 창을 닫았다.
훈련장에서는 벤의 공이 비어 있는 곳으로 가지 않았다.
곧 비게 될 곳으로 갔다.
분석실의 화면도 같은 말을 하고 있었다.
만든 사람.
가져간 사람.
꽂은 사람.
그리고 그 셋보다 먼저, 자리를 비워 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