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구석 감독, 축구 신이 되다

2화: 웰컴 투 이스트베리
비행기 바퀴가 히드로 공항의 아스팔트 활주로에 거칠게 맞부딪히며 둔중한 진동을 만들어냈다.
쿠구궁, 하며 기체가 요동치는 소리와 함께 터미널의 회색빛 조명이 창밖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10시간이 넘는 장기 비행으로 척추가 조여드는 듯한 피로감이 한시우의 온몸을 짓눌렀다. 하지만 비행기 문을 열고 영국 런던의 차갑고 축축한 공기를 들이마시는 순간, 몽롱하던 시야가 거짓말처럼 선명해졌다.
입국장을 나서자마자 시우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수많은 영문 이름 사이에서 홀로 빛나듯 적혀 있는 피켓이었다.
[ Mr. Si-woo Han ]
피켓을 들고 있는 이는 낡아서 깃이 해진 트위드 재킷을 입은 은발의 노신사였다. 이스트베리 FC의 구단주, 아서 웰스. 그의 이마에는 잉글랜드 하부 리그의 고달픈 구단 운영 방식을 대변하듯 깊은 주름살이 패어 있었다. 눈가에는 피로가 가득했지만, 시우를 바라보는 눈동자만큼은 꺼져가는 불씨를 지키려는 듯 절박하게 번뜩였다.
"웰컴 투 잉글랜드, 미스터 한!"
웰스는 시우가 다가서자 서둘러 피켓을 내려놓고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손등에는 굵은 정맥이 튀어나와 있었고, 굳은살이 단단했다. 평생을 축구 현장과 구단 관리로 보낸 노인의 손이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웰스 씨. 한시우입니다."
시우가 예의를 갖춰 손을 맞잡자, 웰스는 그의 손을 꽉 쥐며 흔들었다.
"정말로 와주었군. 솔직히 말해서 공항으로 마중 나오는 이 순간까지도 내 결정이 미친 짓이 아닐까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어봤다네. 자격증 서류를 정리하고 비행기 표를 결제하면서도 가슴이 쿵쾅거려 잠을 잘 수가 없었지."
웰스는 씁쓸하게 웃으며 시우의 가방을 대신 들려고 손을 뻗었다. 시우는 정중하게 고개를 저으며 캐리어 손잡이를 꽉 잡았다.
"제 가방은 제가 들겠습니다. 웰스 씨도 먼 길 오시느라 고생 많으셨을 텐데요."
"하하, 고맙네. 영국식 매너는 벌써 합격이군."
공항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은 우중충한 런던의 하늘 아래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웰스가 소유한 낡은 푸른색 재규어 차량은 시동을 걸 때마다 털털거리는 둔탁한 엔진 소리를 내며 구식 라디오 주파수를 잡으려 애썼다.
차량이 미끄러지듯 공항을 빠져나가 런던 외곽의 서부 도로로 진입하자, 창밖으로 낮고 조용한 붉은 벽돌 주택들과 축축하게 젖은 아스팔트가 끝없이 펼쳐졌다.
"자네가 내 블로그에 썼던 이스트베리 전술 분석 글을 보고 심장이 뛰었던 게 벌써 한 달 전이군."
웰스가 운전대를 잡은 손을 툭툭 치며 말을 이었다.
"우리 구단 사정은 자네도 데이터를 분석해 봐서 대강 알겠지만, 솔직히 고백하건대 문서에 적힌 것보다 훨씬 더 비참한 상태라네. 재정은 이미 한계에 다다랐고, 지자체 보조금도 끊겼지. 지난 시즌에는 승점 단 1점 차이로 간신히 강등을 면했어. 5부 리그인 내셔널리그로 떨어졌다면, 구단은 그대로 공중분해 되었을 걸세."
웰스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는 백미러를 통해 시우의 표정을 살폈다.
"게다가 선수들의 사기가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네. 자네처럼 젊고 경력 없는 한국인 감독이 온다는 소식이 미디어에 흘러나가자마자 라커룸이 뒤집어졌지. 내가 자네의 전술 블로그 글과 분석 영상을 선수들에게 보여주며 전술적 천재라고 설득해봤지만…… 거친 필드에서 뼈가 굵은 녀석들은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까진 절대 믿지 않는 법이니까."
"예상했던 일입니다. 축구판이라는 곳이 원래 실력과 결과가 아니면 아무것도 인정해주지 않는 곳이니까요."
시우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18살에 십자인대가 파열되어 잔디를 떠나야 했던 순간, 그 역시 냉혹한 프로의 생리를 뼈저리게 겪었다. 경력도 없고 나이도 어린 한국인 감독을 반갑게 맞이할 선수들이 있을 리 만무했다.
차는 이윽고 런던 서부 근교의 소도시, 이스트베리로 접어들었다. 이곳은 과거 광산과 소규모 공장들이 밀집해 있던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의 도시였다. 회색빛 하늘과 낡은 골목길을 지나 도달한 이스트베리 FC의 클럽하우스는 시우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초라했다.
클럽하우스라기보다는 동네 공공 체육관이나 창고에 가까운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외벽 곳곳에는 이끼가 끼어 있었고, 구단 이름이 적힌 파란색 간판은 모서리가 깨진 채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서자, 빗물에 젖은 잔디 냄새와 선수들이 흘린 오래된 땀 냄새, 그리고 환기가 되지 않아 고여 있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한데 섞여 시우의 코끝을 찔렀다.
"시설이 많이 낡았지? 훈련장 잔디도 기계가 고장 나서 제때 깎지 못할 정도로 구단 형편이 엉망이라네. 정말 미안하군."
웰스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시우는 라커룸의 낡은 나무 벤치와 때 묻은 벽면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공과 잔디, 그리고 뛸 수 있는 운동장만 있다면 축구를 시작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이 냄새도 무척 오랜만이어서 오히려 반갑네요."
시우의 눈빛은 이미 매섭게 변해 있었다. 시설의 낙후함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시스템의 힘을 발현할 진짜 '선수단'과 '경기'뿐이었다.
"선수들은 지금 라커룸 겸 미팅 룸에 모여서 대기하고 있네. 첫인사를 나누는 게 좋겠군."
웰스의 안내를 받아 시우는 복도 안쪽의 굳게 닫힌 문 앞으로 향했다. 문틈 사이로 선수들의 거친 목소리와 낄낄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진짜로 아시아인을 감독으로 데려왔다고? 구단주 영감이 노망난 게 확실해."
"돈이 없어서 라이선스도 불분명한 놈을 데려온 거겠지. 이번 시즌은 시작하기도 전에 5부 리그 강등 확정이야."
"아시아에서 셔츠나 몇 장 팔려고 데려온 마케팅용 아니야?"
시우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영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수없이 들었던 영어 전술 서적 오디오북 덕분에 그들의 말은 한 단어도 빠짐없이 정확하게 귀에 꽂혔다. 불쾌함보다는 냉정한 차분함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했다.
웰스가 얼굴을 붉히며 문고리를 거칠게 돌려 열었다.
"흠! 다들 집중하도록!"
문이 열림과 동시에 라커룸 내부의 웅성거림이 뚝 끊겼다. 20여 명의 1군 선수들이 낡은 벤치에 삐딱하게 걸터앉거나 캐비닛에 몸을 기대어 서서 시우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 구단주를 스쳐 지나쳐, 그 뒤에 서 있는 젊은 한국인 감독의 얼굴에 꽂혔다.
노골적인 무시, 차가운 냉소, 그리고 적대감.
그 누구도 시우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았다. 시우는 한 걸음 내딛으며 선수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다들 4부 리그 특유의 롱볼 축구와 거친 몸싸움에 다져진 단단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지만, 패배에 익숙해진 패배주의의 찌든 기운이 눈빛에 서려 있었다.
웰스가 시우의 옆에 서서 목소리를 높였다.
"이쪽은 오늘부터 우리 이스트베리 FC를 이끌어갈 신임 감독, 한시우 씨다. 내가 자네들에게 약속했던 새로운 변화와 전술적 혁신을 가져다줄 분이지."
구단주의 소개가 끝나기가 무섭게, 라커룸 가장 깊숙한 안쪽 벤치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190센티미터에 달하는 압도적인 체구, 짧게 깎은 금발 머리와 거칠게 기른 턱수염. 이스트베리 FC에서 10년 가까이 헌신하며 팀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온 베테랑 중앙 수비수이자 주장인 마커스 리드(34)였다.
그는 위압적인 보폭으로 시우의 코앞까지 걸어왔다. 그의 덩치와 뿜어내는 기세에 곁에 서 있던 웰스 구단주가 움찔하며 한 발짝 물러설 정도였다.
마커스는 시우를 내려다보며 사나운 눈빛으로 묵직하게 말했다.
"반갑습니다, 미스터 한. 저는 이 팀의 주장인 마커스 리드입니다."
"반갑소, 마커스."
시우가 예의상 손을 내밀었으나, 마커스는 시우의 손을 빤히 쳐다볼 뿐 잡지 않았다. 대신 팔짱을 낀 채 라커룸 전체가 울리도록 뼈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죠. 우리는 지난 시즌 마지막 라운드에서 승점 단 1점 차로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다가오는 시즌의 매 경기는 우리에게 생존을 건 전쟁입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이 거친 잉글랜드 축구를 단 한 번이라도 경험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니, 애초에 프로 구단을 단 한 번이라도 지도해 본 적은 있으신지 묻고 싶군요."
공개적인 청문회이자 취조였다. 벤치에 앉아 있던 주전 미드필더와 윙어들이 흥미진진하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마커스의 말은 선수단 전체가 시우를 향해 품고 있는 의구심을 대변하고 있었다.
웰스가 다급하게 중재하려 나섰다.
"마커스! 미스터 한의 라이선스는 이미 잉글랜드 축구협회(FA)의 정식 승인 절차를 마쳤……."
"구단주님, 저는 종이 쪼가리 자격증을 묻는 게 아닙니다."
마커스가 단호하게 웰스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시우의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었다.
"우리는 매주 필드 위에서 뼈가 부러지고 피를 흘리며 뛰는 선수들입니다. 전술판에 낙서나 끄적이는 방구석 이론가에게 우리의 커리어와 인생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감독님이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고 전술을 주입하고 싶다면, 적어도 우리가 납득할 만한 실력과 증거를 먼저 보여주셔야 할 겁니다."
노골적인 항명이었다. 첫날부터 주장이 앞장서서 신임 감독의 숨통을 죄며 기 싸움을 걸어왔다. 여기서 어설프게 웰스의 뒤로 숨거나 당황한다면, 시우의 감독 생명은 훈련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이 라커룸에서 그대로 종말을 고할 터였다.
그러나 시우의 안색은 조금도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눈앞의 거구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통찰.'
[띠링!]
귓가에 청아한 쇳소리가 울리며 시우의 시야를 덮고 있던 현실 세계의 풍경이 순간적으로 느려졌다. 빗소리조차 뚝 끊긴 듯한 고요 속에서, 마커스 리드의 머리 위로 찬란한 푸른색 반투명 홀로그램 창이 솟아올랐다.
[이름: 마커스 리드 (Marcus Reid)]
- 나이: 34세
- 포지션: 중앙 수비수 (CB)
- 클래스: D급
- 능력치:
- 피지컬: 32 / 100 (노쇠화 및 부상으로 급격한 저하)
- 멘탈: 72 / 100 (뛰어난 리더십, 강한 투지)
- 테크닉: 35 / 100 (투박한 발밑 기술)
- 현재 상태: [심각한 부상 위험] 좌측 무릎 반월판 연골 파열 및 마모. 진통제 투혼 중.
- 특성: '골목대장(D)', '부러지지 않는 뼈(D)'
시우의 입꼬리가 아주 미세하게 호선을 그렸다.
그저 텍스트로 된 수치만 보이는 것이 아니었다. 시야 속에서 마커스의 왼쪽 무릎 부위가 시뻘건 붉은빛으로 깜빡거리며, 그 무릎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골절과 연골 손상의 단면이 가상 이미지로 시우의 뇌리에 직접 각인되었다.
마커스는 무너져가는 구단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은퇴 전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구단과 의료진 몰래 사설 병원에서 맞춤형 진통제를 주입받아가며 억지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겉으로는 철인인 척 소리를 지르고 있지만, 속은 이미 썩어 문드러져 언제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은 시한폭탄 같은 상태였다.
그 순간, 시우의 눈앞에 새로운 시스템 메시지가 추가로 팝업되었다.
[돌발 퀘스트: 주장의 불신을 꺾어라!]
- 내용: 이스트베리 FC의 정신적 지주인 마커스 리드의 신뢰를 얻거나, 그의 기세를 완전히 제압하십시오.
- 목표: 마커스 리드가 당신의 권위를 인정하고 복종하게 만들기.
- 보상: 1,000 System Point, 랜덤 D급 스킬 카드 1장.
시우는 팔짱을 낀 채 거만한 표정으로 자신을 압박하고 있는 마커스에게 오히려 한 걸음 더 밀착했다. 마커스는 시우의 눈빛에서 예상했던 당혹감이나 두려움이 아닌,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기묘한 냉정함이 서려 있자 은연중에 침을 삼켰다.
"내 경력에 대한 증거와 실력을 보여달라?"
시우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평온했지만,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라커룸 전체에 선명한 공명을 남겼다.
"마커스 리드. 320경기를 넘게 이 팀에서 뛴 위대한 주장이지. 네 헌신과 리더십은 인정해. 하지만……."
시우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마커스의 단단한 바지 천 위로 감싸진 왼쪽 무릎을 정확히 가리켰다.
"그 썩어 문드러진 다리로 이번 시즌 몇 경기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마커스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겁니까?"
"좌측 무릎 반월판 연골 파열. 이미 뼈와 뼈가 직접 맞부딪쳐 물이 차오르고 있겠지. 지난주 프리시즌 연습 경기가 열리기 전에도 라커룸 구석 화장실에서 강력한 진통제 주사를 스스로 허벅지에 꽂지 않았나? 구단주와 팀원들한테는 단순 타박상이라고 둘러대면서 말이야."
마커스의 얼굴에서 핏기가 순식간에 가셨다.
라커룸은 마치 얼어붙은 것처럼 무겁고 차가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벤치에 기대어 낄낄거리던 선수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키며 경악한 눈빛으로 마커스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마커스? 그게 진짜야? 무릎 상태가 그렇게 안 좋았어?"
"주사라니? 너 지난주에 그냥 근육이 뭉친 것뿐이라고 했잖아!"
동료들의 웅성거림이 사방에서 쏟아지자, 마커스의 턱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주치의와 자신만의 극비 사항이었다. 재정적으로 파탄 난 구단 상황에서 자신이 장기 부상으로 이탈하게 되면 팀이 완전히 공중분해 될 것을 알았기에 숨겨온 지옥 같은 비밀이었다.
그 비밀을, 오늘 방금 공항에서 도착한 자격증 없는 한국인 감독이 첫 대면에서 소름 끼치도록 정확하게 들춰낸 것이다.
"당신……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마커스의 묵직했던 목소리가 물밑으로 가라앉듯 흔들렸다. 오만함이 가득했던 그의 안색은 경악과 공포로 물들었다.
시우는 흔들리는 주장의 눈동자를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똑바로 응시하며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말했지 않나. 난 방구석 이론가가 아니라고. 이제 내가 당신의 다리를 살리고 이 팀을 지켜줄 감독으로 보이나?"
압도적인 정적이 라커룸을 지배했다. 그곳에 서 있는 모든 이들이 시우가 내뿜는 보이지 않는 위압감에 압도당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