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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의 용병단, 장부 하나로 전장을 지배함1화

악녀의 용병단, 장부 하나로 전장을 지배함

악녀의 용병단, 장부 하나로 전장을 지배함

1화: 내일의 월급은 장부에 없다

"……씨발."

입술 사이로 짧고 굵은 욕설이 터져 나왔다.
지독한 편두통이 관잣놀이를 송곳으로 뚫는 것 같았다. 억지로 눈을 뜨자마자 보인 것은 천장의 곰팡이 핀 서까래와, 코를 찌르는 퀘퀘한 종이 냄새, 그리고 오래된 먼지가 춤추는 차가운 공기였다.

"내가 분명…… 물류센터 2번 도크에서 심정지로 쓰러졌는데."

김한얼. 34세.
대한민국 최대 이커머스 기업에서 'SCM(공급망 관리)의 귀신'이라 불리던 사나이.
그는 지난 3일간 쏟아지는 물량을 처리하기 위해 야간 근무를 강행하다가, 컨베이어 벨트 위로 쏟아지는 택배 박스들을 뒤로한 채 심장을 부여잡고 고꾸라졌었다.

그런데 왜 죽지 않고 이런 냄새 나는 방에 있는 거지?

한얼은 상체를 일으키려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에 멈칫했다. 몸이 가벼웠다. 30대 중반의 찌든 몸이 아니라, 2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창백하고 마른 몸이었다. 손등에는 굳은살 하나 없었고, 손가락은 깃펜을 너무 오래 쥐어 굳은살이 박인 서기의 손이었다.

그의 눈앞에는 산더미처럼 쌓인 누런 종이 뭉치들이 있었다.

[블랙로즈 용병단 - 6월분 지출 내역서]
[칼바람 요새 주둔지 보급 창고 재고 리스트]
[기사단 마나 스톤 배분 장부]

종이에 적힌 글자는 분명 처음 보는 기이한 문양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서 즉각적인 한국어로 치환되어 읽혔다. 그와 동시에 뇌 속에서 누군가의 기억이 파편처럼 터져 나왔다.

이곳은 소설 '제국의 불꽃' 속 세상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사벨라 폰 블랙로즈가 이끄는 '블랙로즈 용병단'의 말단 회계사, 한스에게 빙의했다.

"미친. 진짜로?"

한스는 마른세수를 하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창밖으로는 제국 북부의 황량한 고원 지대가 보였고, 연병장에서는 용병들이 무딘 검을 휘두르며 내지르는 고함이 들려왔다.

이 소설을 읽은 기억이 난다. 주인공 용사가 제국을 구하는 전형적인 판타지였지만, 한스가 독자로서 주목했던 건 악역 중 하나였던 '피의 이사벨라'였다. 그녀는 용병단의 전비를 마련하기 위해 영지를 약탈하고 세금을 가혹하게 걷다가, 결국 '악녀'로 낙인찍혀 용사의 칼에 목이 잘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하지만 한스는 알고 있었다. 소설 중반부의 설정집에서 밝혀진 비극적인 진실을.
이사벨라가 악녀가 된 건 천성이 사악해서가 아니었다. 경영의 '경'자도 모르는 그녀를 대신해 최측근들이 용병단의 자금을 조직적으로 빼돌렸고, 파산 직전에 몰린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생존 방식이 약탈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그 파산 직전인 회사의 회계사가 됐다는 거지?"

한스가 책상 위의 장부를 무의식적으로 훑었다.
그 순간, 망막 위로 푸른색 반투명 레이어가 겹쳐지더니 기이한 정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전시 물류 직관(Lv.1) 발동!]
[분석 대상: 블랙로즈 용병단 6월분 통합 장부]
[데이터 무결성: 42% (심각한 조작 흔적 발견)]
[횡령 의심율: 78% (특정 지출 항목의 비정상적 폭등)]
[현재 가용 현금: 152골드 40실버]
[알림: 내일 지급 예정인 용병단 전체 급여 총액 - 500골드]
[결론: 가용 자금 부족(347골드 60실버). 24시간 내 자금 확보 실패 시 '용병단 반란 루트' 진입 가능성 95%.]

"……하."

한스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전생에서도 숫자로 사람을 달달 볶더니, 이세계에 와서도 상태창 같은 게 숫자를 들이밀며 생존을 위협하고 있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내일 해가 뜨면 연병장에서 훈련 중인 150명의 거친 사내들이 한스의 목을 따러 올 것이다. 월급을 안 준다는 이유로.

"한스! 이 굼벵이 같은 자식! 아직도 자빠져 있는 거냐!"

쾅-!
집무실 문이 부서져라 열리며 덩치 큰 사내 하나가 들이닥쳤다. 용병단의 하급 조장 중 하나인 가르크였다. 그는 술 냄새를 풍기며 한스의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내일이 월급날인 건 알지? 이번에도 주머니 사정 운운하며 미루기만 해봐라. 네놈 안경알을 눈알에 박아줄 테니까."

한스는 흔들리는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갑게 가르크를 응시했다. '전시 물류 직관'이 가르크의 허리춤에 찬 주머니를 가리켰다.

[대상: 가르크의 주머니]
[내용물: 12실버 (어젯밤 도박판에서 딴 돈)]
[상태: 정기적인 뇌물 수수 의심.]

한스가 입을 열었다.
"가르크 조장님. 어제 '에이스' 판에서 꽤 따셨나 봅니다? 12실버나 챙기셨던데, 그 돈으로 술이나 더 드시고 내일 아침에 오시죠. 지금은 장부 정리 중이라 바쁩니다."

"뭐? 이 새끼가 어떻게……."

가르크가 당황하며 주춤하는 사이, 복도 끝에서부터 대지를 울리는 듯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강렬한 장미 향기, 그리고 피부를 저미는 듯한 서슬 퍼런 기파(氣波).

"비켜라, 가르크. 냄새나는 몸뚱이로 서기실을 오염시키지 말고."

"드, 단장님!"

가르크가 허겁지겁 길을 터주었다.
불타는 듯한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땋아 내린 미녀. 검은색 가죽 갑옷 위로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망토를 두른 그녀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블랙로즈 용병단의 주인이자, 미래의 악녀. 이사벨라 폰 블랙로즈였다.

"한스. 표정이 왜 그 모양이지? 마치 죽었다 깨어난 놈 같군."

이사벨라가 책상 앞에 서서 한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황금빛 눈동자에는 초조함이 서려 있었다.

"말해봐라. 금고에 얼마가 남았지? 지금 당장 기사들의 검을 수리하고, 보병들의 저녁 식단에 고기를 추가해야 한다. 애들이 굶주려서 사기가 바닥이야! 요새 놈들이 우리를 무시하기 시작했다고!"

이사벨라는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쳤다. 장부 더미가 힘없이 흔들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한스는 바닥에 떨어진 장부를 줍지도 않은 채, 이사벨라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152골드입니다."

"뭐? 지난달 영주에게 받은 선급금이 2,000골드였잖아! 그게 벌써 다 나갔단 말이냐? 내가 분명 아껴 쓰라고 했을 텐데!"

"네. 정확히는 '나간 것'처럼 장부가 조작되어 있군요."

이사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조작? 지금 누가 내 돈을 훔쳤다는 소리냐? 이 블랙로즈의 금고를?"

"그건 지금부터 제가 밝혀낼 일입니다만, 당장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단장님. 내일이 무슨 날인지 잊으셨습니까?"

"내일? ……아."

이사벨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그녀의 강인한 어깨가 아주 미세하게 떨렸다.
매달 18일. 용병단의 월급날이다.

"500골드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금고에는 150골드뿐이죠. 350골드가 모자랍니다. 월급이 하루라도 밀리면, 저 연병장에서 술 마시고 있는 단원들이 칼을 들고 이 방으로 쳐들어올 겁니다. 단장님이 아무리 강해도, 150명의 굶주린 늑대들을 다 벨 수는 없겠죠."

"그, 그건……."

이사벨라가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손이 허리춤에 찬 검자루를 꽉 쥐었다.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요새 아래쪽에 있는 영주의 창고…… 거길 털면 된다. 놈들은 어차피 제국군 보급품을 쌓아두고 있잖아. 우리가 좀 가져간다고 해도 전시에 협조하는 셈 치면……."

"그러면 단장님은 진짜 '악녀'가 되는 겁니다."

한스가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이사벨라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녀의 검, '블러드 로즈'가 순식간에 뽑혀 나와 한스의 목줄기에 닿았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과 함께 이사벨라의 매서운 기운이 한스의 숨통을 조였다.

"방금 뭐라고 했지? 서기 주제에 내 결정을 부정하는 거냐? 죽고 싶은 건가?"

"부정하는 게 아니라 '리스크'를 계산해드리는 겁니다. 영주의 창고를 털면 당장 500골드는 얻겠죠. 하지만 그 대가로 블랙로즈는 제국군과 공식적인 교전 상태가 됩니다. 현상금이 붙을 거고, 모든 정식 보급로는 차단되겠죠. 한 달 뒤에는 5,000골드를 줘도 빵 한 조각 못 사는 처지가 될 겁니다. 그게 당신이 원하는 용병단의 미래입니까?"

"……!"

이사벨라의 검끝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는 전장에서는 누구보다 용맹했지만, 보급망이 끊겼을 때 군대가 어떻게 붕괴하는지는 체감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무대포 정신으로 버텨온 결과가 지금의 파산 위기였다.

한스는 목에 닿은 검날을 손가락으로 살짝 밀어내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장부의 특정 페이지를 손가락으로 툭툭 쳤다.

"장부에 따르면, 최근 한 달간 주방에서 소모한 식자재 비용이 작년 대비 300% 증가했습니다. 특히 소금과 마른 고기의 매입가가 시장가의 두 배로 책정되어 있죠. 그런데 단원들은 고기 구경도 못 했다고 불평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SCM의 기본도 안 된 이런 비정상적인 지출 프로세스를 방치한 결과가 이겁니다."

"주방장…… 잭이 그럴 리가 없다! 그는 내 아버지가 계실 때부터 우리 용병단의 솥을 책임졌던 사람이야!"

"숫자는 우정을 모릅니다, 단장님. 그리고 '전시 물류 직관'이 말해주고 있거든요. 그 솥 안에 든 건 고기가 아니라 단장님의 금화들이라고."

한스는 벽에 걸린 낡은 코트를 집어 들었다.
이사벨라의 압도적인 위압감 속에서도 그는 당당했다. 아니, 오히려 그녀를 가련하게 여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제게 24시간만 주십시오. 아니, 오늘 해가 지기 전까지 시간을 주신다면, 영주의 창고를 털지 않고도 사라진 350골드를 찾아오겠습니다."

"어떻게 말이냐? 네놈이 무슨 수로 그 큰돈을……."

한스는 차갑게 미소 지었다.
현대 물류센터에서 수만 개의 재고를 관리하며 1원 단위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던 그 독기 어린 눈빛이 돌아와 있었다.

"창고를 털 필요 없습니다. 우리 내부의 '쥐새끼' 주머니만 털어도 충분하니까요. 물류의 기본은 흐름을 막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한스는 이사벨라를 지나쳐 집무실 문을 열었다.
연병장 너머,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용병단의 대형 주방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이 파산 직전의 용병단을 구하기 위한 첫 번째 '공급망 최적화' 대상이었다.

"가르크 조장님, 가서 단원들에게 전하십시오. 오늘 저녁은 조금 매울 거라고. 대대적인 재고 실사가 있을 예정이니 숟가락 딱 들고 대기하라고 말입니다."

한스의 발걸음이 거침없이 주방을 향해 뻗어 나갔다.
이사벨라는 멍하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자신도 모르게 검을 거두고 그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먼지 낀 서기라고만 생각했던 한스의 등에, 본 적 없는 압도적인 '지배자'의 위압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것은 칼날보다 날카로운, '장부'를 쥔 자의 위엄이었다.
이사벨라는 직감했다. 오늘을 기점으로 블랙로즈 용병단의 역사가 뒤바뀔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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