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전에서 안 나갑니다만?

시놉시스
대한민국 유일의 S급 공간계 헌터 강현우는 서울 도심 S급 던전 '미궁의 정원'에 들어간 뒤 3년째 나오지 않고 있다.
남들은 그를 비운의 고립자로 부른다. 하지만 현우는 던전 15층에 지하 3층 규모의 단독주택을 짓고 산다. 던전 마력을 전력으로 바꾸고 마수를 정원사로 길들이고 개찰구 택배함을 통해 외부 물품을 받는다.
그의 목표는 하나다.
밖으로 나가지 않고 평생 완벽하게 쉬는 것.
1화: 던전에서 안 나갑니다만?
미궁의 정원 15층은 원래 사람이 숨을 쉬기 어려운 곳이었다.
검은 넝쿨이 천장에서 내려오고 바닥에는 독성 이끼가 번졌다. 길을 잘못 밟으면 벽이 움직여 침입자를 삼켰다. 관리국 기록에는 생존 가능 시간 7분 30초라고 적혀 있었다.
강현우는 그 한가운데에서 늦잠을 잤다.
따뜻한 마력 조명이 침실 천장에서 부드럽게 밝아졌다. 침대 옆 자동 커튼이 소리 없이 열리자 통유리 너머로 지하 호수가 보였다.
호수 위에는 푸른 결정꽃이 떠 있었다. 작은 정원 마수 세 마리는 물뿌리개를 물고 잔디 위를 뛰어다녔다. 사납기로 유명한 송곳니토끼였지만 지금은 앞치마를 두르고 화단 사이를 폴짝거렸다.
"알람 꺼."
현우가 이불 속에서 손가락만 까딱였다.
침대 머리맡의 수정 패널이 조용히 빛을 낮췄다. 알람 대신 향긋한 커피 냄새가 방 안으로 스며들었다. 던전산 마석으로 돌아가는 에스프레소 머신이 아침 루틴을 시작한 것이다.
현우는 회색 후드티를 대충 걸치고 삼디다스 슬리퍼를 끌었다. 문이 열리자 긴 복도가 나왔다. 벽면에는 마력 배관이 가지런히 박혀 있었고 바닥은 온돌처럼 따뜻했다.
복도 왼쪽 아래로는 지하 2층 수중 정원이 내려다보였다. 오른쪽 아래에는 홈시어터와 게임룸이 있었다. 가장 아래층은 창고와 발전실과 식료품 냉장고가 붙어 있는 생활 인프라 구역이었다.
던전이라는 이름만 빼면 웬만한 고급 주택보다 훨씬 나았다.
복도 끝에서 돌덩이 몸을 가진 청소 골렘이 허리를 숙였다.
"주인님. 3층 홈시어터 습도 43퍼센트 유지 중. 수중 정원 필터 교체 완료. 외부 연락 18건 누적."
"앞의 두 개만 좋은 소식이네."
현우는 커피잔을 받아 들고 거실로 걸어갔다.
거실은 던전이라기보다 고급 리조트 라운지에 가까웠다. 한쪽 벽 전체가 거대한 화면으로 덮여 있었고 천장에는 별빛 같은 마석 조명이 박혀 있었다. 소파는 사람 하나가 누워도 남을 만큼 넓었다.
그가 가장 아끼는 공간이었다.
문제는 중앙 탁자 위에서 붉게 깜박이는 통신 수정구였다.
현우가 손을 뻗자 수정구가 기다렸다는 듯 켜졌다.
박철진 국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흰머리는 더 늘었고 눈 밑은 어제보다 어두웠다. 화면 너머의 사무실 벽에는 '국가 헌터 전력 정상화 특별 대책 회의'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현우는 그 문구를 보자마자 피로해졌다.
3년 전만 해도 저런 회의에 불려 다녔다. 대형 길드는 현우의 공간 능력을 자기들 레이드 홍보에 끼워 넣으려 했고 언론은 그가 웃지 않는다는 이유로 오만하다는 제목을 달았다. 사람을 구해도 말투가 차갑다며 욕을 먹었다.
그때 배운 결론은 간단했다.
밖은 시끄럽다.
신호가 열리자마자 녹화 메시지가 쏟아졌다.
"강현우 헌터님. 국가 헌터 전력 운영 회의에 단 한 번만 출석해 주십시오. 대면이 어려우시면 화상 회의라도 좋습니다."
현우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화상도 대면의 친척이잖아."
다음 메시지가 자동 재생됐다.
"언론에서 헌터님을 던전에 갇힌 비극적 영웅으로 보도하려 합니다. 공식 입장만 내주시면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공식 입장. 안 갇혔음. 끝."
그는 수정구 옆에 떠 있는 분류창을 바라봤다.
[긴급]
[초긴급]
[국가적 요청]
[제발]
현우는 네 항목을 한꺼번에 잡아 스팸함으로 밀어 넣었다. 붉은 빛이 사라지고 탁자 위가 평온해졌다.
그때 별도의 푸른 채널이 조용히 열렸다.
서연희의 목소리였다.
"헌터님. 아침부터 죄송합니다. 관리국에서 제 쪽으로도 연락이 왔어요. 오늘만 세 번입니다."
"연희 씨 채널은 스팸 안 막아 놨는데."
"그래서 제가 고통받고 있습니다."
현우는 소파에 드러누웠다. 천장의 마석 조명이 낮게 흔들리며 거실 전체를 낮잠 모드로 바꿨다.
"미안합니다. 대신 오늘 거래 물품 추가해요."
"또 뭘 원하시는데요?"
"치킨 두 마리. 콜라 큰 거. 그리고 게이밍 PC 전원부 안정화에 쓸 절연 코어. 현실 제품은 던전 마력 받아먹다 자꾸 삐끗합니다."
서연희가 잠깐 말이 없었다.
"S급 던전 부산물 대가로 치킨과 컴퓨터 부품을 요구하는 분은 헌터님뿐일 거예요."
"희소성이 있네요."
"자랑 아닙니다."
현우는 손가락을 튕겼다.
거실 바닥에 작은 공간문이 열렸다. 검푸른 마수 가죽 묶음과 정제 마석 세 상자가 떠올랐다. 현우가 손목을 돌리자 물품마다 얇은 차폐막이 씌워지고 출하 표식이 새겨졌다.
다음 목적지는 던전 1층 입구의 개찰구 택배함이었다.
그 택배함은 현우가 외부와 거래하는 유일한 문이었다. 던전 부산물을 넣어 두면 서연희가 물건을 회수했다. 대신 음식과 생필품과 전자기기가 같은 칸에 들어왔다.
사람은 안 된다.
대화도 가능하면 짧게.
그게 강현우식 사회생활이었다.
"거래품은 이 정도면 되죠?"
서연희의 목소리가 즉시 바뀌었다.
"충분합니다. 아니 너무 충분합니다. 이 정도면 절연 코어가 아니라 소형 서버룸도 맞출 수 있어요."
"서버룸은 다음 달에."
"농담이 아니시죠?"
"던전 안 인터넷이 안정되면 농담할 시간이 줄어들겠죠."
"알겠습니다. 마수 가죽은 보안 경매로 돌리고 정제 마석은 협회 연구소 쪽으로 우회하겠습니다. 관리국이 거래 내역을 들여다봐도 치킨 영수증밖에 못 보게 처리할게요."
"역시 연희 씨가 제일 믿음직하네요."
"그 말은 고맙지만 제 업무 범위가 점점 이상해지고 있습니다."
현우가 하품을 하던 순간 거실 화면 가장자리에 노란 경고가 떴다.
[던전 입구 경계선 외부 감시체 접근]
서연희도 같은 알림을 본 듯 숨을 들이켰다.
"잠시만요. 관리국 등록 드론이 아닙니다. 언론사 장비일 가능성이 있어요."
"아침부터 남의 현관 앞에서 뭐 하는 거래요."
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았다. 손바닥을 위로 향하자 거실 공기가 얇게 접혔다.
미궁의 정원 1층 입구.
차폐선 바로 바깥에서 검은 드론 하나가 작은 렌즈를 들이밀고 있었다. 드론은 경계선을 넘는 순간 내부 풍경을 촬영하려 했다.
하지만 렌즈가 본 것은 던전 내부가 아니었다.
하늘이 접히고 바닥이 뒤집혔다. 드론은 자신이 날아온 방향으로 세 바퀴 돌더니 관리국 임시 펜스 앞 쓰레기통 위에 얌전히 착지했다.
드론 화면에는 짧은 문구가 떴다.
[사생활 침해 금지]
[현관 앞 촬영 금지]
[배달은 환영]
쓰레기통 옆에서 대기하던 기자 둘이 얼어붙었다. 관리국 직원 하나가 머리를 감싸 쥐었다. 드론은 더 움직이지 못하고 현우의 경고문만 반복해서 띄웠다.
서연희가 낮게 웃었다.
"저 문구 제가 캡처해도 됩니까?"
"관리국에 전달하세요. 언론 쪽에도요."
"강현우 헌터 공식 입장으로요?"
"아뇨. 집주인 경고문으로."
현우는 다시 소파에 누웠다.
커피는 아직 따뜻했다. 수중 정원에서는 물방울 소리가 났다. 세상은 그를 밖으로 끌어내려고 시끄럽게 굴었지만 던전 안은 완벽하게 조용했다.
아니.
거의 완벽했다.
소파 옆 협탁에는 어젯밤 먹다 남긴 말린 마력 과일이 담겨 있었다. 벽난로처럼 꾸민 마력 순환구에서는 은은한 온기가 흘렀다. 창밖 정원 마수들은 새로 깎은 잔디를 코로 밀며 줄을 맞추고 있었다.
현우는 이 풍경을 볼 때마다 같은 생각을 했다.
밖에서 회의실 의자에 앉아 욕먹는 것보다 여기서 배관 하나 더 고치는 편이 천 배쯤 생산적이었다.
거실 벽 전체가 검은 화면으로 바뀌고 중앙에 새 시스템 문구가 떠올랐다.
[마력 전력 변환기 2호기 예열 시작]
[출력 안정률 71퍼센트]
[고성능 게이밍 PC 전원 공급 예상 실패]
현우의 표정이 처음으로 진지해졌다.
"실패는 좀 곤란한데."
그 아래 작은 오류가 하나 따라붙었다.
[심층부 미확인 수맥 반응 감지]
[냉각 보조 자원으로 전환 가능성 있음]
현우는 한쪽 눈만 떴다.
"수맥이면 냉각수로 쓸 수 있나?"
보통 헌터라면 미확인 반응에 긴장했을 것이다. S급 던전 심층부에서 새 반응이 올라왔다는 말은 대부분 재난을 뜻했다.
강현우는 달랐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오늘 밤 새 게임을 끊김 없이 돌릴 수 있느냐였다.
푸른 채널 너머에서 서연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또 던전 심층부를 뜯으실 생각인가요?"
"뜯는 게 아니라 배관을 확인하는 겁니다."
"그걸 보통은 공략이라고 부릅니다."
"저는 집수리라고 부릅니다."
현우는 담요를 턱밑까지 끌어올리고 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역시 던전이 집보다 낫다니까."
그 순간 개찰구 택배함 쪽으로 출하 대기 알림이 울렸다.
치킨과 콜라와 절연 코어가 도착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42분.
현우는 슬리퍼를 끌고 발전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오늘의 외출 거리는 거실에서 지하 3층까지였다.
그 정도라면 충분히 감당할 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