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마신교의 수석 소믈리에

21화 장로들의 건배
해가 지자 장로회 시음당의 창살마다 붉은 빛이 걸렸다.
준영은 가장 낮은 탁자 앞에 섰다. 탁자 위에는 술병 넷과 물병 둘, 그리고 끝까지 열지 않을 봉인 상자가 있었다.
장로들은 반원으로 놓인 긴 탁자에 앉아 있었다. 맨 가운데의 혁련광은 잔조차 잡지 않았다. 손가락의 검은 옥 반지가 촛불을 먹은 듯 빛을 삼켰다.
"말단이 전주의 자리에 선 날이군."
"오늘은 절차가 자리를 지킬 수 있는지 확인하는 날입니다."
"인정을 바라지 않는다는 소리냐?"
"인정은 기분으로 바뀝니다. 기록은 남습니다."
낮은 웃음이 몇 군데서 터졌다. 청목 장로는 웃지 않았다. 푸른 소매 끝으로 잔 가장자리만 천천히 문질렀다.
준영은 그 손을 보았다. 손등은 차갑고 손가락 끝은 붉었다. 잔에는 연한 차가 남아 있었다. 쑥의 씁쓸한 냄새 아래로 황련을 오래 끓인 쓴 향이 났다.
속열을 억누르려 한 사람이었다.
그에게 산미가 날 선 술을 내면 위가 먼저 뒤집힐 수 있었다.
"시음 전에 오늘 드신 음식과 달인 약, 마지막으로 마신 술을 확인하겠습니다."
청목 장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장로들을 문초하겠다는 것이냐?"
"잔을 건네기 전에 확인하는 일입니다. 말씀하지 않으시면 잔은 비워 두겠습니다."
시음당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석덕이 뒤에서 숨을 삼켰다. 설아는 봉인 상자 곁에 서서 손잡이를 놓지 않았다.
혁련광이 턱을 들었다.
"냄새로 안다 했으니 먼저 맞혀 보아라."
준영은 청목 장로의 잔을 빛에 비췄다. 잔벽의 얇은 막이 느리게 흘렀다. 찻물에 기름기 있는 죽이 섞였을 때 남는 자국이었다.
"아침에 들깨죽을 드셨습니다. 기름을 걷지 않은 죽입니다. 정오부터는 쑥과 황련을 달인 차만 드셨고요."
청목 장로의 눈썹이 조금 움직였다.
"속이 타서 그러신 겁니다. 병명을 아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지금 산미 센 술은 해가 됩니다."
준영은 적양포 원주 병 하나를 뒤로 물렸다.
적로 장로가 탁자를 쳤다.
"그럼 내 잔은 어찌할 테냐? 나는 병자 취급을 받을 생각이 없다."
그의 소매에는 불에 덴 가죽과 쇠 냄새가 함께 밴 채였다. 검지 관절에는 철환약을 갈 때 묻는 검은 가루도 남아 있었다.
"철환약을 드셨습니다. 열기를 한곳으로 몰 수 있는 약이지요. 술이 그 길을 더 밀면 목은 시원해도 가슴이 먼저 조여 옵니다."
"그래서 못 준다는 건가?"
"드리겠습니다. 한 모금만요."
준영은 적양포 원주의 맑은 윗술을 작은 잔에 따랐다. 약하게 불굽기 한 삼나무 향을 붙이고 설빙석 곁에서 식힌 청련근 물을 한 방울만 더했다.
"목으로 넘기지 마십시오. 혀 앞에서만 굴리시면 됩니다."
적로 장로는 비웃듯 잔을 받아 들었다. 그래도 한 모금만 마셨다.
처음에는 아무 표정도 없었다. 뒤늦게 눈가의 힘이 풀리고 뜨거운 숨이 가늘게 빠져나왔다.
"향은 나쁘지 않군."
"다음 잔은 없습니다."
"방금 좋다고 했거늘?"
"손가락이 떨렸습니다. 호흡도 짧아졌고요. 맛이 맞는 것과 몸이 더 받을 수 있는 것은 다릅니다."
적로 장로의 검지 끝이 미세하게 굳어 있었다. 그가 반박하려다 멈추자 다른 장로들도 손끝을 보았다.
준영은 잔을 거두고 맑은 물을 내밀었다.
"두 모금 드신 뒤 가슴이 풀리면 오늘 검증은 여기까지입니다."
"내가 거절하면?"
"거절이라 기록하겠습니다. 그래도 두 번째 술은 따르지 않습니다."
적로 장로는 한참 준영을 노려보다 물을 받아 마셨다.
"건방진 놈."
"살아 계시면 다음에도 건방질 수 있습니다."
문칠이 고개를 푹 숙였다. 웃음을 참는 모양이었다.
청목 장로 앞에는 묵은 곡주의 맑은 윗부분과 청련근 물만 섞은 낮은 도수의 대조주가 놓였다. 꿀도 향신료도 넣지 않았다.
"이건 술입니까. 물입니까?"
"장로님이 오늘 술을 받으실 수 있는지 확인하는 물입니다."
"모욕이군."
"마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청목 장로의 손이 멈췄다. 잠시 뒤 그가 잔을 들었다. 혀끝만 적실 만큼 마시고 눈을 감았다.
거칠던 숨이 한 번 길어졌다.
"쓰지 않군."
"황련이 이미 쓴맛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까요."
청목 장로는 시종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은 잔을 들기 전보다 조금 덜 붉었다. 준영은 그 변화만 기록했다. 속열이 가라앉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었다. 낮은 도수의 한 모금이 당장의 자극을 넘기게 했을 뿐이었다.
그는 시종이 가져올 장부에서 약재의 양과 달인 시간을 다시 확인할 생각이었다. 술은 맞혔다고 끝나는 물건이 아니었다. 다음 잔을 멈출 이유까지 남겨야 했다.
"오늘 달인 약재와 음식 기록을 가져와라. 전주에게 보여라."
시음당의 시선이 다시 준영에게 모였다.
혁련광만은 움직이지 않았다.
"잔 두 개를 잘 골랐다고 장로회를 이긴 듯 굴지 마라. 진짜 술을 내놓아라. 천마의 입술을 열었다는 빙화주를 말이다."
설아의 손이 봉인 상자 위에서 굳었다.
"그 병은 시음 대상이 아닙니다."
"천마께는 올리고 장로에게는 못 보인다는 말인가?"
"천마께도 마시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 반응이 있었기에 더 열 수 없습니다."
혁련광이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내가 천마의 잔을 관리한 세월이 얼마인지 아느냐. 병 하나를 감추려면 근거를 내놔야 한다."
"내겠습니다. 병은 열지 않고요."
준영은 석덕에게 손짓했다. 석덕이 병목을 닦았던 천과 빈 유리병을 가져왔다. 준영은 천을 접시 위에 펼치고 미지근한 물을 가장자리에만 떨어뜨렸다.
매실의 어린 향과 마른 삼나무 향이 피었다.
가운데가 조용히 끊겼다.
향이 없는 자리가 생겼다.
"천이 말랐을 뿐이다."
혁련광이 말했다.
준영은 같은 천의 바깥쪽에 물을 한 방울 더 올렸다. 그곳에는 투명한 막이 남고 향도 이어졌다. 빈 자리만 물기가 먼저 사라졌다.
그는 이중 접시 바깥쪽에 적염마근의 잔열을 가까이 댔다. 향은 퍼졌지만 빈 자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마른 자리는 향이 옅습니다. 이 자리는 향이 잘렸습니다. 병목 안쪽에도 같은 반응이 있습니다. 검은 점이 보였고 냄새가 지워졌습니다. 정체를 모르는 병을 장로님께 드릴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게 맡겨라. 장로회 기록관이 보관하고 조사하겠다."
준영은 혁련광의 빈 잔을 보았다. 잔 가장자리에 말린 연근의 단 냄새가 아주 옅게 남아 있었다. 내전 약재고에서 쓰는 연근은 물향이 더 짙었다. 이 향은 오래 불에 말린 뒤 쇠솥에 볶은 냄새였다.
그 아래에는 차가운 쇠 냄새가 겹쳐 있었다.
"대장로님도 오늘 약을 드셨습니다."
시음당이 조용해졌다.
"무슨 약이지?"
"모르겠습니다. 말린 연근과 쇠 냄새가 납니다. 제게는 기록을 내놓으라 하시면서 대장로님은 잔을 비워 두셨습니다."
혁련광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 몸을 공개석상에서 다루겠다는 것이냐."
"아닙니다. 그러지 않겠습니다. 대신 대장로님도 그 병을 열지 마십시오. 절차는 서로에게 같습니다."
설아가 한 발 앞으로 나왔다.
"봉인병은 교주 명으로 이중 보관합니다. 장로회 기록관에게 넘기지 않습니다."
혁련광은 설아를 한 번 보았다.
"언제까지 지킬 수 있겠나."
준영이 상자 앞에 섰다.
"오늘의 검증은 끝났습니다. 청목 장로와 적로 장로는 반응과 중단 시점을 기록해 주십시오. 대장로님은 시음을 거부하신 것으로 적겠습니다."
"거부?"
"약과 식사 기록을 밝히지 않으셨으니까요."
한참 뒤 혁련광이 일어났다.
"좋다. 오늘은 네 기록대로 해 두어라. 하지만 교주가 없는 자리에서도 그 병을 열지 못하게 할 수 있다고 믿지는 마라."
그가 나간 뒤 적로 장로는 물잔을 비우고 기록판에 거칠게 이름을 썼다.
"두 번째 잔은 없었다. 그건 맞다."
청목 장로도 붓을 들었다.
"내 약재 기록은 오늘 안에 보내겠다. 다음 잔이 있다면 그 기록을 보고 정해라."
준영은 두 장의 기록판을 설아에게 건넸다.
"봉인 상자와 따로 보관해 주십시오. 병이 사라지면 기록으로 찾고 기록이 바뀌면 병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한곳에 두면 같이 사라집니다."
시음당이 비어 갈 무렵 준영은 혁련광의 빈 잔에서 남은 향을 기록했다.
내전 약재고의 연근과 다르다.
출처 미상.
준영이 준비실 문을 열려는 순간 마른 나무 냄새가 문턱 밖에서 났다.
모래 속에서 숨을 죽인 벌림 대수나무 마개 냄새였다.
봉인 상자에 쓰인 것과 같은 냄새가 어둠 쪽으로 가늘게 이어져 있었다.
"누군가 병을 열 재료를 갖고 있습니다."
설아의 손이 칼자루로 갔다.
"상자를 옮길까요?"
준영은 고개를 저었다.
"봉인은 더 단단히 하고 위치는 바꾸지 않겠습니다. 누가 노리는지 보려면 우리가 먼저 흔들리면 안 됩니다."
설아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준영은 닫히지 않은 문과 봉인 상자를 번갈아 보았다.
오늘 장로들은 술을 마신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몸을 숨기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다.
그 약속은 인장보다 약했고 칼보다 느렸다. 그래도 잔 하나를 멈춘 손이 남아 있는 한 누군가의 위세만으로 병을 열 수는 없었다.
그 약속을 깨고 병을 열려는 손이 있다면 향이 먼저 알려 줄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