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왕입니다만?! : 현대 힐링 라이프를 방해하지 마라

2화: 배달비와 마왕
루시펠은 휴대전화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이만 팔천 원.
치킨 한 상자와 탄산수 두 병을 주문하면 절반 가까이가 사라지는 숫자였다.
마왕성의 보물창고가 비었다는 보고를 받을 때는 이렇게 심장이 조여 오지 않았다. 지금은 빼앗을 영지도 없고 이 원룸의 주인은 사흘 뒤에 월세와 관리비를 받으러 온다.
루시펠은 침대에 기대어 밤새 화면을 넘겼다.
배달 기사. 편의점 야간. 창고 상하차. 그리고 게이트 일용 공략.
손가락이 마지막 항목에서 멈췄다.
[한강북구 E급 게이트 임시 공략 인원 모집]
[초보 가능 / 협회 현장 등록 / 부산물 기여도 정산]
마수를 죽이고 그 부산물을 팔아 돈을 얻는다. 이곳의 인간들은 그 일을 공고로 올리고 정산표까지 만들었다.
루시펠은 안내 글을 천천히 읽었다. 임시 등록에는 신분증이 필요했다. 공략대에 붙어야 한다. 멋대로 핵을 빼돌리면 처벌을 받는다. E급 게이트라 해도 혼자 들어가면 죽을 수 있다.
마지막 문장에서 그의 눈썹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혼자 들어가면 죽는다라."
그는 강도현의 신분증을 지갑에 넣고 외투를 걸쳤다. 나가기 전 냉장고를 열어 보았지만 생수 한 병과 오래된 김치통뿐이었다. 루시펠은 냉장고 문을 닫으며 낮게 중얼거렸다.
"오늘 안에 돈을 번다."
그래야 다음 메뉴도 고를 수 있다.
북문 환승역 앞에는 검은 균열이 서 있었다.
사람 키 세 배쯤 되는 타원형의 틈은 푸른 안개를 흘렸다. 루시펠은 소환진과 다른 그 균열 가장자리에서 부자연스러운 마력을 읽었다.
"임시 등록이세요?"
플라스틱 책상 뒤의 접수 직원이 그를 불렀다. 루시펠은 신분증을 내밀었다.
직원은 사진과 얼굴을 번갈아 본 뒤 빈 경력란을 확인했다.
"강도현 씨. 각성 경력은 없으시고요?"
"없다."
"E급이라도 처음이면 위험해요. 오늘은 인원도 빠듯해서 같이 들어갈 분이 있어야 하고요. 측정부터 하시죠."
직원이 투명한 원통을 내밀었다. 안에는 푸른 액체와 작은 금속 고리가 들어 있었다.
루시펠은 그것을 한참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올리자 액체가 잔잔하게 흔들렸다.
조금만 잘못 풀어도 원통은 깨질 것이다. 루시펠은 자신의 권능을 실 한 올보다 가늘게 눌러 넣었다. 푸른 액체가 수면 위로 올라와 금속 고리 하나를 감쌌다.
삑.
원통 옆 표시창에 E가 떠올랐다.
접수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임시 E급 확인됐습니다. 무리하지 마세요. 기본 수당은 없고 부산물 정산만 있어요. 기여가 없으면 빈손으로 나올 수도 있고요."
루시펠은 종이를 받아 들었다.
"기여가 있으면 돈을 주나?"
"네. 많이 기여할수록요."
"그렇다면 됐다."
직원은 의외라는 듯 눈을 깜빡였다. 보통은 수당이 없다는 말에 발길을 돌린다. 루시펠에게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원룸의 따뜻한 바람과 휴대전화 속 끝없는 영상은 그에게 꽤 중요한 영토가 됐다.
그때 옆에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새 사람 왔습니까?"
짧은 머리의 남자가 접수대로 다가왔다. 한 손에는 넓적한 도끼를 들고 있었고 낡은 방탄 조끼 위에는 임시 공략대 조끼가 걸쳐 있었다.
"최민석 팀장님. 이분이 마지막 한 명이에요."
최민석의 눈이 루시펠의 손에서 발끝까지 훑었다. 손에는 굳은살이 거의 없었다. 허리에는 무기집도 없었다.
"정말 신입이네."
"문제 있나?"
"문제는 안 만들면 됩니다. 안에서 앞에 나서지 말고 시키는 대로만 해요."
그는 접이식 상자에서 낡은 단검과 작은 원형 방패를 꺼내 건넸다.
루시펠은 얇은 철판 방패를 내려다봤다.
"이걸로 막는다고?"
"싫으면 지금 나가요."
최민석의 말은 차가웠지만 눈빛에는 조급함이 있었다. 울타리 밖 전광판에는 게이트 안정화 권고 시간이 빠르게 줄고 있었다. 사람이 모자라면 그가 직접 더 위험한 앞줄을 맡아야 할 것이다.
루시펠은 단검을 칼집에 넣었다.
"알겠다."
그 대답을 듣고도 최민석은 못 미더운 표정을 지었다.
공략대에는 활을 든 임하늘과 방패를 든 남자가 더 있었다. 하늘은 루시펠에게 물병을 내밀었다.
"안에서는 길 잃지 마세요. 처음이면 게이트 멀미도 올 수 있어요."
"멋대로 공간을 넘는 일은 익숙하다."
"네?"
"아니다. 고맙다."
임하늘은 웃었지만 최민석은 한숨을 쉬었다.
"들어간다. 하늘 씨는 후방 확인. 도현 씨는 하늘 씨 옆을 지켜요. 괜한 용감함은 필요 없습니다."
루시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을 벌러 온 자리에서 인간들의 규칙을 깨뜨릴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게이트 너머는 버려진 지하 배수로처럼 축축했다.
낮은 천장에서는 검은 물이 뚝뚝 떨어졌다. 벽돌 틈마다 푸른 이끼가 번져 있었고 멀리서 작은 발톱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최민석이 손짓하자 모두가 숨을 죽였다.
고블린들이 나타났다. 최민석의 도끼가 먼저 목덜미를 찍었고 임하늘의 화살이 뒤따른 두 마리의 눈을 꿰뚫었다.
지구의 헌터들은 약했지만 서로의 빈틈을 지켰다. 아무도 도망치지 않는 모습은 루시펠의 마음에 조금 들었다.
세 번째 갈림길에 다다랐을 때 공기가 바뀌었다.
축축한 곰팡이 냄새 사이로 타는 향 냄새가 섞였다. 향로에 피운 수지와 오래된 피가 뒤섞인 냄새. 마왕성 지하 제단에서 수없이 맡았던 냄새였다.
루시펠의 걸음이 멈췄다.
벽의 이끼 아래에는 손바닥만 한 검은 돌이 박혀 있었다. 돌 주변으로 붉은 줄이 거미줄처럼 퍼져 나가고 있었다.
원 안에 세 개의 뿔.
뉴스에서 본 문양과 같았다.
그는 손을 뻗으려다 멈췄다. 최민석이 앞에서 낮게 말했다.
"왜 서 있어요?"
"저 돌은 누가 놓았지?"
"돌? 장식 구경은 나가서 하죠."
최민석은 문양을 보지 못하는 듯했다. 돌은 희미한 마력으로 인간의 시선을 밀어내고 있었다.
루시펠이 대답하려던 순간 배수로 깊은 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졌다.
끼이이익.
고블린의 울음이었다. 한 마리가 아니었다.
사방의 어둠에서 붉은 눈이 켜졌다.
"진형!"
최민석이 외쳤다. 방패 든 남자가 앞을 막고 임하늘은 빠르게 활시위를 당겼다. 화살 세 발이 날아갔지만 고블린들은 쓰러진 동료를 밟고 달려왔다.
그들의 움직임에는 누군가 목줄을 잡아당기며 한 방향만 보게 만든 명령이 섞여 있었다.
검은 돌의 붉은 줄이 고블린들의 발목까지 이어져 있었다.
"저것이 명령을 넣고 있군."
루시펠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뭐라고요?"
임하늘이 묻는 사이 오른쪽 벽이 터졌다. 덩치가 큰 고블린 하나가 잔해를 뒤집어쓰고 튀어나왔다. 팔은 사람의 허리만 했고 피부에는 검은 핏줄이 부풀어 있었다.
최민석의 도끼가 팔뚝에 박혔다. 그러나 변이 고블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도끼를 박은 채 최민석을 벽으로 밀쳤다.
"팀장님!"
임하늘이 화살을 날렸지만 변이체가 손등으로 쳐 냈다. 튕긴 화살 하나가 그녀의 어깨를 스쳤다. 그녀가 균형을 잃고 뒤로 넘어졌다.
그 뒤에는 작은 고블린 주술사가 있었다.
주술사는 검은 돌 조각을 높이 들고 임하늘을 향해 입을 벌렸다. 돌 위의 세 뿔 문양이 붉게 빛났다.
루시펠의 얼굴에서 온기가 사라졌다.
마왕교는 자신의 문양을 훔쳐 마수의 목에 걸었다. 그리고 이 세계의 인간들을 향해 사냥개처럼 풀었다.
그들이 게이트를 건드리면 배달이 늦어진다. 치킨이 식는다. 무엇보다 이 원룸의 평온이 흔들린다.
그건 용납할 수 없었다.
루시펠은 단검을 뽑았다.
그가 흘린 마력은 아주 얇았다. 측정기 하나를 속일 때보다도 더 가늘었다. 마수의 심장과 공포에만 닿는 명령이었다.
멈춰라.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달려들던 고블린들의 발이 동시에 굳었다. 녀석들은 보이지 않는 절벽 앞에 선 것처럼 몸을 떨었다. 변이 고블린도 최민석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 짧은 틈이면 충분했다.
루시펠은 주술사 앞으로 미끄러지듯 다가갔다. 칼날이 아니라 손잡이로 관자놀이를 쳤다.
쿵.
주술사가 진흙탕에 처박혔다. 검은 돌이 손에서 빠져나왔다.
루시펠은 발끝으로 돌을 밟았다. 안쪽에서 탁한 마력이 솟아오르자 휴대전화가 든 주머니가 미세하게 지직거렸다. 그는 이를 악물고 권능을 더 억눌렀다.
루시펠은 검은 돌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돌 안에 매달린 명령만 뽑아냈다.
먹어라.
찢어라.
제단으로 돌려보내라.
짧고 더러운 명령들이 손안에서 부서졌다. 마수들의 붉은 눈이 흐려졌고 변이 고블린은 바닥에 쓰러졌다.
고블린 주술사도 정신을 잃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배수로에 갑작스러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최민석이 벽을 짚고 일어났다. 그의 시선이 쓰러진 변이체와 루시펠의 손으로 번갈아 향했다.
"방금… 뭘 한 겁니까?"
루시펠은 손안의 가루를 털었다.
"겁을 줬다."
"고블린한테요?"
"겁 많은 종족이더군."
임하늘은 어깨의 피를 닦으며 루시펠을 바라봤다. 의심은 있었지만 지금은 질문보다 숨을 고르는 게 먼저였다.
루시펠은 대답하지 않고 부서지지 않은 조각 하나를 주머니 깊숙이 넣었다.
게이트 밖으로 나왔을 때 햇빛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협회 직원들은 고블린 사체와 마력석을 분류했다. 변이체는 게이트 내부의 불안정 현상으로 기록됐다. 최민석은 몇 번이나 설명하려다 포기한 얼굴로 기여도 표에 서명했다.
"신입인데 운이 좋았어요."
접수 직원이 정산 내역을 보여 주었다.
기본 분배금 십이만 원. 변이체 발견 기여금 오만 원. 총 십칠만 원.
루시펠은 화면 속 숫자를 아주 오래 바라보았다.
사흘 뒤 낼 돈에는 아직 모자랐지만 오늘 저녁을 굶을 이유는 없었다.
"입금됐습니다."
직원의 말에 휴대전화가 진동했다.
루시펠은 통장을 확인한 뒤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으로 이 세계의 제도라는 것이 쓸모 있다고 느꼈다.
임하늘이 붕대를 감은 어깨를 만지며 다가왔다.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다음에 또 공략 들어가면 연락드려도 돼요?"
"보수가 괜찮으면."
그녀가 웃었다.
"솔직하시네요."
최민석은 멀리서 손을 들어 보였다. 경계는 남아 있었지만 아까처럼 루시펠을 짐으로 보지는 않았다.
루시펠은 그들과 헤어진 뒤 배달 앱을 열었다. 뜨거운 닭고기 사진이 화면에 떠오르자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바로 그때 뉴스 알림이 화면을 덮었다.
[한강북구 외곽, 두 번째 게이트 이상 파동 감지]
알림 아래에는 검은 문양이 있었다.
원 안에 세 개의 뿔.
루시펠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 문양은 이제 뉴스 화면의 낯선 그림이 아니었다. 굶주린 마수의 발목을 묶고 인간을 찢게 만든 목줄이었다.
그가 배달 앱을 닫자 화면이 한 번 지직거렸다.
"이곳의 생활은 마음에 든다."
루시펠은 검은 문양을 바라봤다.
"그러니 망치려는 자부터 찾겠다."
그 시각 창문 하나 없는 창고에서 검은 로브의 남자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 앞 탁자에는 금이 간 돌 조각이 놓여 있었다. 돌 안의 붉은 빛은 완전히 꺼져 있었다.
"명령이 끊겼습니다."
낮고 늙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물었다.
"누가 끊었나."
"모르겠습니다. 다만 마수들이 명령을 거부했습니다. 마치… 더 높은 존재의 목소리를 들은 것처럼."
창고 안의 촛불이 흔들렸다.
"게이트에 있던 인간을 모두 확인해라."
"예."
"우리보다 위의 존재가 있다면."
어둠 속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그것이 무엇인지 먼저 알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