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마왕입니다만?! : 현대 힐링 라이프를 방해하지 마라

시놉시스
이계 헬하임의 절대 군주 루시펠은 끝나지 않는 전쟁에 지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을 숭배한다는 자들의 소환술에 휘말려 낯선 현대 지구로 떨어진다.
따뜻한 난방과 바삭한 배달 음식, 손바닥 안에서 펼쳐지는 온갖 영상까지. 지구는 마왕에게 너무나 훌륭한 휴양지였다.
루시펠은 강도현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한 방구석 생활을 시작하려 한다. 단, 지구를 마계로 만들겠다는 마왕교가 그의 휴식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에서.
1화: 마왕, 지구에 오다
검은 비가 마왕성의 성벽을 두드렸다.
피와 재가 섞인 빗물이 성벽 아래로 흘렀다. 무너진 탑의 꼭대기에서 루시펠은 턱을 괸 채 전장을 내려다봤다.
이번에도 인간들이 성문을 넘고 있었다.
은빛 갑옷을 입은 기사 셋과 흰 로브를 걸친 마법사 둘. 그 한가운데에는 유난히 밝은 검을 쥔 젊은 남자가 있었다.
"마왕 루시펠! 오늘이 네 최후다!"
루시펠은 눈꺼풀도 들지 않았다.
"어제도 들었다."
남자의 얼굴이 붉어졌다. 성검에서 빛이 터져 나왔다.
루시펠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성문 양옆의 검은 불길이 갈라졌다. 달려들던 마수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바닥에서 솟은 그림자들이 기사들의 발목을 낚아챘다.
쾅!
성검의 빛이 그림자를 찢었다. 성벽 한쪽이 통째로 날아갔다. 돌 조각이 빗속으로 쏟아졌다.
용사는 기세를 몰아 계단을 뛰어올랐다.
루시펠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왕이 된 뒤 오백 년이 넘었다. 인간들은 늘 새로운 성검과 새로운 구호를 들고 찾아왔다. 죽을 만큼 용감한 표정을 짓고는 루시펠의 마법 한 번에 쓰러졌다.
처음 몇십 년은 재미가 있었다.
지금은 아니었다.
"폐하. 동쪽 방벽에도 인간 군세가 붙었습니다."
검은 갑옷의 장수가 무릎을 꿇었다.
"알아서 막아라."
"하지만 성력의 밀도가 높습니다."
"그럼 더 단단한 놈을 앞에 세워."
장수가 물러났다. 루시펠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눌렀다. 잠을 자도 전쟁 소리가 들렸다. 밥을 먹어도 보고서가 올라왔다.
마계의 군주라는 자리는 생각보다 몹시 성가셨다.
그때였다.
전장 바깥에서 낯선 파동이 울렸다.
루시펠의 시선이 처음으로 하늘을 향했다.
마계의 마력도 아니었다. 인간들이 쓰는 성력도 아니었다. 아주 멀리서 억지로 잡아당기는 힘이었다.
문제는 그 안에 섞인 것이었다.
루시펠 자신의 마력.
누군가 아주 오래된 흔적을 훔쳐 소환술의 심장으로 쓰고 있었다. 불완전하고 거칠었다. 그런데도 수백 명이 한꺼번에 피를 바친 것처럼 집요했다.
"감히."
검은 하늘에 붉은 고리가 열렸다.
고리 너머에서 목소리들이 겹쳤다. 언어는 낯설었지만 소환술의 의지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위대한 마왕이시여.
저희의 세계에 강림하소서.
루시펠의 입가가 서늘하게 굳었다.
"나는 부른 적 없는 곳에는 가지 않는다."
그가 손을 들어 붉은 고리를 움켜쥐었다. 고리는 마력에 눌려 찌그러졌다. 조금만 더 힘을 주면 소환술 따위는 흔적도 없이 부술 수 있었다.
바로 그 순간, 계단을 오른 용사가 성검을 내리쳤다.
"성광 단죄!"
지독하게 밝은 빛이 루시펠의 손등을 스쳤다.
상처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소환진을 짓누르던 힘이 한순간 흐트러졌다.
붉은 고리가 입을 벌렸다.
사슬 같은 빛줄기가 루시펠의 손목과 발목을 감았다. 왕좌 뒤의 공간이 통째로 뜯겨 나갔다.
"네놈들은 운이 좋군."
루시펠은 용사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오늘은 장례를 치러 줄 시간이 없다."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세상이 뒤집혔다.
피비린내가 사라졌다.
비명과 포효도 끊겼다.
대신 이상하게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루시펠은 눈을 떴다.
낮은 천장이 보였다. 마법등도 아닌 둥근 유리등이 희미하게 빛났다. 벽 한쪽의 흰 상자에서는 따뜻한 바람이 흘러나왔다.
그는 한동안 바닥에 누운 채 그 바람을 맞았다.
따뜻했다.
헬하임에서는 화산 지대가 아니면 이 정도 온기를 얻기 어려웠다. 불의 정령을 잡아 방에 가둬도 며칠 지나면 폭발하거나 도망쳤다.
그런데 이곳은 작은 벽 상자 하나가 조용히 온기를 뿜었다.
루시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좁은 방이었다. 침대와 책상, 작은 냉장고, 옷장 하나가 전부였다. 창밖으로는 밤인데도 수백 개의 불빛이 보였다. 길 위를 달리는 철마들은 굉음도 없이 줄지어 움직였다.
책상 위의 검은 판에서는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영상이 흘러나왔다.
마법 도구인가.
루시펠이 판을 집어 들자 화면이 꺼졌다. 검은 표면에 낯선 청년의 얼굴이 비쳤다.
검은 머리와 창백한 피부. 며칠째 잠을 못 잔 듯 눈 밑이 어두운 얼굴이었다.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았다.
몸 안쪽에 얇은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강도현. 스물여덟. 취업에 실패한 지 반년. 오늘까지 방을 비워야 한다. 통장 잔고는 이만 팔천 원.
루시펠은 미간을 찌푸렸다.
소환술이 육체와 영혼을 아무렇게나 꿰맨 모양이었다. 원래 이 몸의 주인은 이미 이곳에 없었다. 남은 것은 이름과 생활의 파편뿐이었다.
문이 벌컥 열렸다.
"강도현 씨? 아직 안 나갔어요?"
중년 남자가 문턱을 넘다 멈췄다. 그는 방 안의 루시펠을 훑어보고 한숨부터 쉬었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했잖아요. 다음 세입자랑 계약도 해 놨어요."
루시펠은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이 방은 얼마지."
"뭐가 얼마예요?"
"계속 머무르는 값."
남자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세에 관리비. 보증금은 이미 다 까였고요. 도현 씨도 그건 알잖아."
낯선 단어들이 기억의 조각과 맞물렸다. 매달 내야 하는 돈. 방을 빌리는 대가.
루시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가 필요하지."
남자가 금액을 말했다. 그 말이 끝날 때마다 루시펠의 표정은 조금씩 무거워졌다.
마왕성의 서고 하나를 팔면 될 문제였다. 하지만 이 몸의 지갑에는 종이 몇 장과 카드 하나밖에 없었다.
"사흘만 준다."
"사흘요? 안 돼요."
"이 방은 따뜻하다."
"그건 난방비 내니까 따뜻한 거고요."
루시펠은 다시 벽의 흰 상자를 보았다. 난방비. 이 세계는 온기에도 돈을 받았다.
불합리했지만 이해는 갔다. 마계에서도 좋은 불정령은 비쌌다.
"사흘 뒤에 내겠다."
"어디서 돈이 나와요?"
루시펠의 눈이 가늘어졌다.
방 안의 전등이 지직거리며 깜빡였다. 남자의 발밑 그림자가 기어가듯 길어져 문턱을 넘어섰다.
그림자는 남자의 신발 끝에서 멈췄다.
"나는 약속을 지킨다."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 뒤 그는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사흘입니다. 딱 사흘. 연락 안 되면 바로 들어올 거예요."
문이 닫혔다.
루시펠은 손을 내렸다. 그림자가 원래 자리로 돌아갔고 전등도 조용해졌다.
그는 한숨을 쉬었다.
지구에 오자마자 주거 문제부터 생겼다. 마왕에게 어울리지 않는 곤란이었다.
잠시 뒤, 책상 위의 검은 판이 울렸다.
루시펠은 조심스럽게 화면을 켰다. 방금까지 꺼져 있던 판에는 알록달록한 그림들이 늘어서 있었다. 기억 속 손가락 움직임을 따라 화면을 밀자 붉고 노릇한 고기 사진이 나타났다.
[배달의기사 첫 주문 할인]
사진 아래에는 짧은 글이 있었다.
양념치킨. 바삭하게 튀긴 닭에 매콤달콤한 소스를 입힌 인기 메뉴.
루시펠은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닭을 튀긴다.
마계의 화염닭은 살이 질기고 비린내가 심했다. 잘못 잡으면 죽기 전에 불을 뿜어 주방을 태웠다. 그런데 이곳의 인간들은 그것을 소스까지 발라 먹는 모양이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주문 버튼을 눌렀다.
주소는 기억이 대신 입력했다. 결제라는 벽에서 손이 멈췄다.
카드 비밀번호를 묻는 숫자판이 떴다.
루시펠은 한참 화면을 노려봤다. 마왕의 권능으로 이 작은 판의 비밀쯤은 억지로 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기기가 타 버릴 것 같았다.
그는 지갑 속 영수증을 뒤졌다. 희미한 숫자 네 개가 보였다.
그 숫자를 누르자 화면이 밝아졌다.
[주문이 완료되었습니다.]
루시펠은 그 문장을 보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음식을 원한다는 의지만으로 누군가가 가져다준다.
마계에서는 군주라도 식사를 위해 사냥대를 보내야 했다. 식량이 부족한 날에는 장수들이 회의실에서 서로의 책임을 떠넘겼다.
이 세계의 인간들은 손가락 몇 번으로 저녁을 불러냈다.
루시펠은 의자에 앉았다.
책상 모서리에는 작은 기계가 있었다. 파란 불이 깜빡이고 있었다. 기억의 파편은 그것을 와이파이 공유기라고 불렀다.
휴대전화 상단의 부채꼴 표시가 선명해지자 영상들이 끊김 없이 움직였다. 낯선 배우들이 칼을 휘둘렀다. 요리사가 거대한 고기를 굽고 작은 동물들이 사람을 쫓아다녔다.
루시펠은 무심코 다음 영상을 눌렀다.
그리고 또 다음 영상을 눌렀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을 때는 이미 사십 분이 지나 있었다.
"배달입니다!"
루시펠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문밖에는 커다란 보온 가방을 멘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는 루시펠의 굳은 표정을 보고 잠깐 물러섰다.
"양념치킨 맞으시죠? 여기요."
검은 봉투에서 뜨거운 김이 올랐다. 루시펠은 그것을 거의 제물 받듯 받아 들었다.
"이것을 네가 가져왔나."
"네. 앱에 별점도 부탁드릴게요."
"별점?"
"맛있으면 다섯 개요. 아, 와이파이 잘 되죠? 후기 사진 올리려면 편하거든요."
배달 기사는 익숙하게 웃고는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루시펠은 문을 잠갔다.
탁자 위에 상자를 올리고 뚜껑을 열었다.
향이 방을 가득 채웠다. 기름진 냄새와 달콤한 향, 알싸한 향신료가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는 닭다리 하나를 집었다.
바삭.
이빨 사이에서 얇은 튀김옷이 부서졌다. 그 아래의 살은 믿기 어려울 만큼 부드러웠다. 혀끝에 매운맛이 닿았다가 달콤한 소스가 뒤따랐다.
루시펠의 손이 멈췄다.
두 번째 조각을 먹었다.
세 번째 조각을 먹고 나서야 그는 낮게 말했다.
"이 세계는 훌륭하다."
전쟁도 있었다. 아까 창밖에서 보았던 철마들 사이에는 무장한 인간들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이 방에는 따뜻한 바람이 나왔다. 음식은 문 앞까지 왔으며 손바닥 안의 판에서는 끝없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루시펠은 뼈를 내려놓고 화면을 다시 켰다.
자동으로 넘어간 영상은 뉴스였다.
[한강북구 외곽에서 소규모 게이트 이상 파동 감지]
앵커 뒤 화면에 검붉은 문양이 잠깐 비쳤다.
원 안에 세 개의 뿔을 그린 문양.
루시펠의 손끝이 멈췄다.
마왕성의 지하 제단에서 보던 문양과 같았다. 자신을 향해 소환진을 열었던 자들의 흔적.
화면 속 기자는 헌터협회가 확인 중이라고 말했다. 루시펠은 그 말의 의미를 모르면서도 한 가지는 알았다.
그들이 이 세계에 있었다.
"지구를 부른 자들인가."
그는 닭다리 뼈를 천천히 내려놓았다.
잠깐 방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창가의 커튼이 흔들렸다. 휴대전화 화면이 미세하게 지직거렸다.
하지만 루시펠은 곧 손을 거뒀다.
아직은 추적하지 않는다.
치킨이 식기 전에 할 일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 돈을 버는 법을 익히고 이 따뜻한 방을 지킬 방법을 찾는 일이다.
그는 배달 앱의 주문 내역을 다시 열었다.
다음 메뉴를 훑던 루시펠의 입가에 아주 옅은 미소가 걸렸다.
"우선은 여기서 살겠다."
그리고 화면 아래에 뜬 잔고를 보자마자 표정이 굳었다.
이만 팔천 원.
마왕 루시펠은 처음으로 진지하게 생각했다.
돈을 벌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