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4화: 향초 상자에 남은 발자국
로제트는 해가 완전히 뜨기도 전에 향료실 문 앞에 섰다.
황태자 침실 전담이라는 새 직함은 뜻밖에 쓸모가 있었다. 문지기 시녀가 막아섰지만 로제트가 은쟁반과 빈 향초 상자를 내보이자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전하 침실 물품은 제가 먼저 확인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어제도 확인했잖아.”
향료실 안쪽에서 마레나가 장부를 끌어안았다. 그녀의 손등에는 새까만 밀랍이 얇게 묻어 있었다.
“어제는 재를 봤고 오늘은 물건을 보러 왔어요. 둘은 청소 방식이 다릅니다.”
“향초에 청소 방식이 어디 있어.”
“불량품을 버리는 방식이요.”
로제트는 선반 끝 상자 하나를 가리켰다. 황태자궁 붉은 인장이 찍힌 상자였다. 마레나는 몸으로 길을 막았지만 로제트가 말없이 서 있자 먼저 시선을 피했다.
상자를 열자 새 향초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표면은 크림색이었고 향은 평범한 백합 냄새였다. 그러나 상자 바닥은 향초를 담기에는 지나치게 두꺼웠다.
로제트는 손톱으로 안쪽 천을 눌렀다. 천 아래에서 단단한 것이 걸렸다.
“그건 왜 뜯어?”
마레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상자가 울퉁불퉁하잖아요. 전하 침실에 가시는 물건인데 손을 다치시면 곤란하죠.”
“그런 일은 없었어.”
“그럼 오늘부터 없게 하면 되겠네요.”
로제트는 작은 칼로 천 가장자리를 잘랐다. 밑판 틈에서 검은 밀랍 조각과 접힌 종이 한 장이 미끄러져 나왔다.
종이에는 납품 날짜와 수령인이 적혀 있었다. 레온 기사장 대리라는 이름 위에는 다른 글씨가 지워진 흔적이 남아 있었다. 물에 번진 잉크를 다시 덧칠한 자국이었다.
“원래 이름은 누구예요?”
“모르지. 장부 담당이 잘못 적었다가 고친 거겠지.”
“장부 담당이 왜 상자 밑에 숨은 종이까지 고치죠?”
마레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대답 대신 종이를 낚아채려 했다.
로제트가 손을 뒤로 빼자 검은 밀랍 조각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각은 깨지는 대신 미세하게 떨었다.
썩은 장미 냄새가 퍼졌다.
로제트는 발끝으로 조각을 밟았다. 은반지가 뜨거워졌다. 밀랍 밑면에 눌린 문양이 어둠 속에서 떠올랐다.
붉은 황태자궁 인장 아래에 검은 장미 꽃잎 다섯 장이 겹쳐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장미였다.
“그걸 내놓으렴.”
마레나가 한 걸음 다가왔다.
“왜요? 향료실 물건이면 장부에 적어 두면 되잖아요.”
“그건 네가 알 물건이 아니야.”
“전하 침실로 들어갈 뻔한 물건인데요.”
로제트는 조각을 손바닥 안에 감췄다. 마레나가 더 가까이 다가오려는 순간 향료실 문이 크게 열렸다.
기사복 차림의 남자가 안으로 들어왔다. 낯선 얼굴이었지만 어깨에 달린 은색 휘장에는 기사장 대리의 표식이 있었다.
“황태자 전하의 명으로 향초 상자를 회수하러 왔다.”
마레나가 안도한 얼굴로 그를 향했다.
“레온 경. 이 시녀가 상자를 망가뜨리고 있습니다.”
레온의 눈이 상자 바닥과 로제트 손의 종이에 닿았다. 표정은 거의 변하지 않았으나 손이 검집으로 갔다.
“그 문서를 넘겨라.”
“전하의 명을 증명하는 문서는요?”
“기사장 대리의 말을 못 믿나.”
“청소 시녀도 명령서 없이는 빗자루를 못 가져갑니다.”
레온의 눈매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로제트는 종이를 앞치마 안쪽에 넣었다. 무릎이 떨렸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상자와 장부가 함께 사라질 게 분명했다.
“그 상자는 내가 맡는다.”
낮은 목소리가 향료실을 가르며 들어왔다.
카이엔이었다.
그는 문가에 선 채 레온을 바라봤다. 곁에는 기사 둘이 있었지만 카이엔 자신이 더 위험해 보였다. 붉은 눈이 웃지도 않고 레온의 휘장을 훑었다.
“내가 언제 네게 향초를 회수하라고 했지?”
레온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전하. 저는 관리관의 전달을 받았을 뿐입니다.”
“누구에게.”
“얼굴은 보지 못했습니다. 봉인된 쪽지였습니다.”
“그럼 너는 이 상자를 수령한 적도 없나.”
레온의 입술이 굳었다.
“없습니다. 제 이름이 장부에 올라간 사실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
카이엔이 손을 내밀었다. 레온은 잠시 망설이다 품에서 접힌 쪽지를 꺼냈다. 카이엔은 봉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이건 황태자궁 봉인이 아니다.”
로제트는 깨진 밑판을 뒤집었다. 바닥 틈에 남은 밀랍 자국은 붉은 봉인을 흉내 내고 있었지만 가장자리에는 검은 장미 문양이 숨어 있었다.
“전하. 이 인장은 가짜예요. 누군가 레온 경의 이름을 빌려 물건을 들였어요.”
카이엔은 그녀가 내민 조각을 받지 않았다. 대신 로제트의 손을 감싸 쥐고 조각을 함께 들여다봤다.
“이 냄새가 네가 말한 것인가.”
“예. 향초 재와 같은 냄새예요.”
“그럼 이 방에 있던 사람은 아무도 나가지 마라.”
마레나가 숨을 들이켰다. 레온의 턱이 굳었다.
카이엔은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레온은 기사단 감찰실로 보내라. 네 이름이 왜 쓰였는지 확인해라. 마레나는 장부와 함께 남겨라.”
“전하,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모른다는 말은 나중에 해도 된다.”
기사들이 움직이자 레온은 더 변명하지 않았다. 그는 로제트를 한 번 바라봤다. 아무 감정도 없는 눈이었다. 그 무표정이 오히려 로제트의 목덜미를 서늘하게 했다.
사람들이 나간 뒤 카이엔은 로제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왜 혼자 들어왔지.”
“전하께서 따라오시면 재통 냄새를 맡으셔야 하니까요.”
“그보다 네가 다치는 냄새가 더 싫다.”
로제트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카이엔은 그녀의 손바닥 위 검은 밀랍을 엄지로 문질렀다. 손목의 실금이 희미하게 빛났다.
“이것도 네 청소 방식으로 없앨 수 있나.”
“여기서는 어려워요. 꿈과 연결된 흔적이라서요. 이 조각을 없애면 저주를 따라갈 실마리도 사라집니다.”
“그럼 오늘 밤 확인한다.”
“전하.”
“네가 내 곁에 있으면 잠들 수 있다고 했지.”
“그랬죠.”
“이번에는 내가 꿈속에서 네 곁에 있겠다.”
저녁이 되자 카이엔은 침대 옆 탁자에 검은 밀랍 조각을 올려두었다.
새 향초는 들이지 않았다. 로제트는 창문을 닫고 촛대도 치웠다. 오염된 냄새가 들지 않게 하려는 일이었지만 방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카이엔은 침대에 누운 채 손목을 들어 보였다. 실금은 낮보다 조금 더 짙었다.
“저 조각이 가까이 있으니 반응합니다.”
“버리면 되지 않나.”
“버리면 누가 남긴 건지 못 찾아요. 대신 제가 잡고 들어가 볼게요.”
“혼자?”
“원래는 그게 제 일입니다.”
카이엔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로제트가 손을 뻗기 전에 인장 조각을 집어 그녀의 손바닥에 올렸다. 차가운 손가락이 손등을 눌렀다.
“원래가 어떻든 오늘은 아니다.”
“꿈이 더 깊어지면 전하도 다칠 수 있어요. 저주의 근원이 가까우면 제 몸도 오래 버티지 못하고요.”
“네가 다치면?”
“저는 익숙합니다.”
“그 말이 가장 마음에 안 든다.”
카이엔의 시선이 로제트의 얼굴에 멈췄다. 명령처럼 단단했지만 그 아래에는 불안이 있었다. 꿈속에서 그녀를 놓친 뒤로 남아 있던 불안이었다.
“꿈에서 사라지지 마라.”
로제트는 입술을 다물었다. 드림워커는 꿈 주인의 부탁을 약속처럼 받아들이면 안 된다. 감정이 깊어질수록 길을 잃기 쉽다.
그런데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가 제 손을 놓지 않으시면요.”
카이엔은 손가락을 맞물렸다.
“놓지 않겠다.”
로제트는 침대 곁에 앉아 눈을 감았다. 은반지에서 옅은 빛이 번지고 인장 조각이 손바닥 안에서 녹아내렸다.
잠든 카이엔의 숨이 한 번 크게 흔들렸다.
바닥이 꺼졌다.
로제트가 눈을 뜬 곳은 전장이 아니었다.
검은 대리석으로 된 긴 회랑이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양옆에는 문이 수십 개였고 모든 문에는 검은 장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카이엔이 그녀의 손을 꽉 잡았다.
“여긴 어디지.”
로제트는 대답하지 못했다. 가장 가까운 문 너머에서 누군가 느리게 웃었다.
로제트 드림워커.
검은 장미가 처음으로 그녀의 성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