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자님, 꿈속에 쓰레기 버리지 마세요

시놉시스
타인의 꿈에 들어가 무의식을 탐색하고 악몽을 치유하는 비밀 가문 드림워커의 마지막 후계자 로제트. 그녀는 신분을 숨긴 채 황성 구석의 평범한 시녀로 살아가던 중 매일 밤 악몽에 시달리며 환각과 광증으로 폭군이라 불리는 황태자 카이엔의 침실 전담으로 발탁된다.
카이엔은 저주받은 마력 때문에 밤마다 끔찍한 몬스터와 혈투를 벌이는 악몽에 갇혀 불면증과 광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로제트는 살기 위해 그리고 자신의 능력을 활용해 몰래 밤마다 카이엔의 꿈속으로 침투한다.
핏빛으로 물든 그의 꿈속에서 로제트는 꿈 편집자 권능을 발휘해 피투성이 몬스터를 순식간에 분홍색 토끼로 바꿔버리고 시체밭을 아름다운 꽃밭으로 정화해 버린다. 현실에서는 서늘하고 차가운 황태자가 꿈속에서는 자신의 악몽을 정화해 주는 신비한 존재에게 마음을 열며 미친 듯이 그녀를 찾기 시작한다.
1화: 악몽 전담 시녀
로제트 폰 에반스는 황성에서 가장 눈에 띄지 않는 시녀가 되는 데 꽤 성공했다고 믿었다.
새벽 종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 복도 먼지를 닦고 낮에는 찻잔을 나르고 밤에는 세탁실 뒤 작은 방에서 죽은 듯이 잤다. 누구도 그녀의 성을 묻지 않았다. 누구도 그녀가 한때 제국의 악몽을 다루던 몽경사 가문의 마지막 후계자라는 사실을 떠올리지 못했다.
그 정도면 훌륭한 은신이었다.
적어도 아침 점호 전까지는 그랬다.
"로제트."
시녀장 마르타가 두꺼운 장부에서 눈을 들었다. 세탁실 앞에 줄지어 선 시녀들이 동시에 숨을 삼켰다.
로제트는 손에 든 린넨 바구니를 조금 더 꼭 끌어안았다.
"네. 시녀장님."
"오늘 밤부터 황태자 전하 침실 전담이다."
침묵이 떨어졌다.
누군가 린넨을 놓쳤다. 갓 삶아낸 천이 바닥에 푹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마르타가 불호령을 내렸겠지만 이번에는 그녀도 못 본 척했다.
로제트는 아주 천천히 웃었다.
"제가 잘못 들은 것 같습니다. 방금 침실이라고 하셨나요?"
"그래."
"황태자 전하의?"
"그래."
"제가 혹시 어제 찻잔을 깼나요?"
"안 깼다."
"그럼 죄목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마르타의 입가가 꿈쩍했다. 웃음은 아니었다. 사람이 난처할 때 얼굴 근육이 살려 달라고 보내는 작은 신호에 가까웠다.
"죄가 아니라 임무다. 전임 시녀 둘은 사직서를 냈고 하나는 의무실에 누워 있다. 황태자궁에서 사람을 당장 보내라고 했으니 네가 간다."
"왜 하필 저입니까?"
"너는 가족이 항의하러 오지 않고 빚쟁이도 찾아오지 않고 병가도 낸 적이 없지."
아주 성실한 사형수라는 뜻이었다.
주변 시녀들의 시선이 로제트에게 꽂혔다. 안타까움 반 안도감 반이었다. 자기 이름이 불리지 않았다는 안도감이 조금 더 짙었다.
로제트는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라도 그랬을 것이다.
황태자 카이엔 드 레반티아.
제국의 정통 계승자이자 전쟁터에서 열일곱 번의 승리를 거둔 검사. 동시에 밤마다 잠을 이루지 못해 침실 벽을 베고 의무관을 쫓아내며 가끔은 아무도 없는 허공에 검을 휘두른다는 폭군.
황성 하인들 사이에서는 더 간단한 이름으로 불렸다.
악몽의 황태자.
"시녀장님. 저는 찻물 온도 맞추는 데 특화된 인재입니다. 황태자 전하의 고귀한 침실에는 더 거창한 재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너다. 차를 들고 들어가도 아직 도망치지 않은 유일한 아이니까."
도망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로제트는 매번 도망칠 길을 먼저 계산했을 뿐이다. 복도 창문 높이와 기사 교대 시간과 식료품 마차가 나가는 뒷문 위치까지 모조리 외워 두었다. 다만 실행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실행하면 시녀 신분도 은신처도 잃는다. 그녀에게는 세상에서 사라진 가문의 이름과 낡은 은반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조용히 돈을 모아 황성을 떠나는 것이 목표였다.
그 목표에 황태자 침실 전담이라는 문구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거절하면요?"
마르타가 장부를 덮었다.
"황태자궁 인사 명령이다."
거절권이 없다는 뜻이었다.
로제트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억만장자 포상금 같은 것이 걸려 있다면 모를까 이런 일은 보통 목숨값도 제대로 쳐 주지 않는다.
그날 밤 그녀는 은쟁반 위에 진정차와 향초와 깨끗한 물수건을 올렸다. 손끝에는 땀이 맺혔지만 걸음은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겁먹은 시녀는 오래 살지 못한다. 너무 당당한 시녀도 오래 살지 못한다. 가장 오래 사는 쪽은 적당히 무해하고 적당히 쓸모 있어 보이는 사람이다.
황태자궁으로 이어지는 복도는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기사들이 양쪽 벽에 서 있었지만 창처럼 꼿꼿한 자세와 달리 얼굴은 창백했다. 복도 끝 침실 문 너머에서는 금속이 돌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로제트가 문 앞에 멈추자 근위대장이 낮게 말했다.
"들어가라."
"혹시 제가 살아 나오지 못하면 세탁실 뒤 세 번째 벽돌 밑에 있는 동전은 불우한 저에게 기부해 주세요."
근위대장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문 열어."
마지막 농담은 장례식 조문처럼 무시당했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공기가 밀려나왔다. 침실은 지나치게 넓고 지나치게 어두웠다. 커튼은 반쯤 찢겨 바닥에 끌렸고 약병들은 은쟁반째 엎어져 있었다. 꺼진 촛농이 검은 눈물처럼 탁자 가장자리에 굳어 있었다.
그 중심에 카이엔이 있었다.
흑발은 젖은 밤처럼 이마에 내려앉았고 붉은 눈은 타오르는 유리 같았다. 그는 맨발로 선 채 검을 들고 있었다. 검끝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있었다.
"물러서라."
그의 목소리는 낮고 갈라져 있었다.
황궁 의무관이 양손을 들어 보였다.
"전하. 진정제를 조금만 드시면 됩니다. 독이 아닙니다."
"그 말을 내가 몇 번이나 들었지?"
"이번에는 폐하의 인장이 찍힌 처방입니다."
"그 인장까지 믿으라는 뜻이냐."
카이엔의 검끝이 의무관의 목 앞에서 멈췄다. 방 안의 공기가 얼어붙었다.
로제트는 쟁반을 든 채 조용히 숨을 골랐다. 소문보다 훨씬 나빴다. 미친 황태자라는 말은 잔혹했지만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그의 눈은 지금 방에 없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이 하나 있었다.
향초에서 피어오르는 진정 마력 사이로 썩은 장미 같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아주 오래된 무덤 위에 장미수를 부은 듯한 냄새였다.
로제트의 손끝이 저릿했다.
자연스러운 불면의 냄새가 아니었다. 오랜 악몽이 무의식에 뿌리내리고 깨어 있는 정신까지 갉아먹을 때 나는 기운이었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절대 가까이하지 말라고 하던 종류의 오염.
카이엔이 갑자기 고개를 돌렸다.
"거기."
붉은 눈이 로제트에게 박혔다.
로제트는 얌전히 무릎을 굽혔다.
"신입 침실 시녀 로제트입니다. 차를 가져왔습니다."
"나가."
"명령은 감사하지만 제가 나가면 시녀장님께 혼납니다."
의무관이 미친 사람을 보는 얼굴로 로제트를 보았다. 로제트도 자신이 미쳤을 가능성을 조금 인정했다. 하지만 카이엔의 시선이 아주 잠깐 흔들렸다.
무심코 웃을 뻔한 사람처럼.
그 짧은 틈에 바닥의 그림자가 뒤틀렸다.
실제 그림자가 아니었다. 의무관도 기사들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카이엔에게는 진짜였다. 그는 숨을 들이켜며 검을 휘둘렀다.
검광이 침대 기둥을 베었다.
나무 파편이 튀고 의무관이 비명을 질렀다. 기사들이 달려들었지만 카이엔은 그들 사이를 비껴나가 허공을 향해 다시 검을 내리쳤다.
"전하!"
"뒤로 물러서!"
카이엔은 아무도 보지 못하는 괴물과 싸우고 있었다. 검은 정확했고 잔혹했다. 하지만 그 얼굴에 떠오른 것은 살의가 아니었다. 잠을 잃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지독한 피로와 공포였다.
로제트는 쟁반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찻잔이 가늘게 떨렸다.
그녀가 아는 몽경의 규칙이 머릿속에서 하나씩 떠올랐다.
꿈에 오염이 생기면 환영은 깨어 있는 시간까지 새어 나온다. 환영이 몸을 속이면 검은 현실을 베고 상처는 무의식으로 돌아간다. 끝내 꿈과 현실의 경계가 무너지면 사람은 미치거나 잠든 채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
카이엔은 그 경계 위에 서 있었다.
그리고 로제트는 그 경계를 고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물론 들키면 끝이었다.
드림워커의 피는 오래전에 반역자의 이름으로 지워졌다. 누군가는 그들을 사기꾼이라 불렀고 누군가는 사람의 정신을 훔치는 마녀라 불렀다. 로제트의 가문은 그렇게 불타 사라졌다.
그녀가 황성에서 시녀복을 입은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수면 마법 준비!"
의무관이 비명을 삼키며 외쳤다.
기사 넷이 카이엔의 검로를 막았다. 마력 사슬이 바닥에서 솟아 그의 발목을 감쌌다. 카이엔은 짐승처럼 이를 악물고 버텼다.
"건드리지 마라."
그 한마디가 너무 낮아서 오히려 방 안을 베었다.
로제트는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나아갔다. 그의 손목 위로 검은 실금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심장 쪽에서도 같은 빛이 번뜩였다.
저주가 뿌리내린 자리였다.
수면 마법이 뒤늦게 카이엔의 어깨를 눌렀다. 그는 끝까지 검을 놓지 않으려 했지만 힘이 풀린 손가락 사이로 칼자루가 미끄러졌다. 금속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카이엔이 침대 곁에 무릎을 꿇었다가 쓰러졌다.
의무관이 땀에 젖은 얼굴로 속삭였다.
"잠드셨다. 오래가지는 못할 겁니다."
근위대장이 기사들에게 손짓했다.
"방을 정리한다. 시녀는 물수건을 가져오고 물러서라."
로제트는 물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물러서는 척 침대 곁에 남았다. 카이엔의 호흡은 깊지 않았다. 잠에 빠졌다기보다 검은 물속으로 끌려간 사람 같았다.
그의 손목에 다시 검은 실금이 떠올랐다.
로제트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이건 청소가 아니라 철거 공사인데."
그래도 방법은 있었다.
잠든 사람의 무의식으로 들어가 악몽을 재구성하는 몽경주의 권능. 로제트가 평생 숨겨 온 능력. 꿈속에서는 그녀의 상상력과 마력이 현실이 된다. 피바다를 장미 정원으로 바꾸고 괴물을 솜뭉치로 고쳐 쓰는 일도 가능했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대상은 잠들어 있어야 한다. 가까운 거리에서 접촉해야 한다. 그리고 로제트가 꿈속에 들어간 동안 현실의 몸은 빈 껍데기처럼 무방비가 된다.
방 안에는 기사들이 있었다. 의무관도 있었다. 그러나 아무도 하급 시녀 하나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그 무관심이 오늘 밤에는 방패가 될 수 있었다.
로제트는 빠르게 계산했다.
가만히 있으면 다음 발작 때 죽을 수 있다. 도망치면 황태자궁 명령 불복종으로 목이 날아갈 수 있다. 악몽을 고치면 적어도 살아남고 운이 좋으면 포상금도 받을 수 있다.
포상금.
그 단어가 어두운 방 안에서 별처럼 빛났다. 억만장자는 아니더라도 황태자의 숙면값이라면 조용한 은퇴 자금 정도는 나오지 않을까.
로제트는 카이엔의 옆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잠든 그는 소문처럼 잔혹해 보이지 않았다. 아주 오래 혼자 싸우다 지쳐 쓰러진 사람처럼 보였다.
그녀는 자신의 낡은 은반지를 엄지로 눌렀다.
"좋아요. 황태자 전하."
로제트는 카이엔의 손목에 손끝을 얹었다.
"밤마다 방 안에 쓰레기를 이렇게 많이 버리시면 곤란합니다. 오늘은 제가 치워 드릴게요."
검은 물결이 손끝을 타고 올라왔다.
방의 벽이 멀어졌다. 촛불이 실처럼 가늘어지고 기사들의 발소리가 물속 소리처럼 흐려졌다. 피 냄새와 쇠 냄새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누군가의 비명이 아주 깊은 곳에서 그녀를 불렀다.
로제트는 마지막으로 현실의 몸이 침대 곁 의자에 힘없이 기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눈을 떴다.
하늘은 붉었다.
발밑에는 부서진 검과 검은 피가 끝없이 널려 있었다. 멀리서 형체 없는 괴물들이 기어 나왔다. 그 중심에서 카이엔이 홀로 서 있었다.
로제트는 피투성이 전장을 바라보며 작게 숨을 들이켰다.
"와."
그녀의 입가가 비뚤게 올라갔다.
"황태자님 꿈속에는 쓰레기 분리수거도 없나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