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길의 등선자(登仙者)

6화: 반 박자의 거리
밧줄은 나무 사이에서 가늘게 떨렸다.
한리는 그 아래에 흙으로 선을 세 개 그었다. 첫 선은 왕력의 오른발이 박히던 자리였다. 둘째 선은 골반이 돌아가던 자리였다. 마지막 선은 자신이 물러날 자리였다.
산길의 흙에는 아직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왕력이 상자를 들고 버티던 순간마다 오른발 자국만 반 치쯤 더 깊었다. 한리는 그 자국을 피해 선을 밟지 않고 넘어가려 했다.
들이쉰다.
왼발을 뺀다.
내쉰다.
오른발을 돌린다.
두 번째 선을 넘는 순간 발끝이 밧줄에 걸렸다. 몸이 앞으로 쏠렸고 찢어진 어깨가 뜨겁게 당겼다. 한리는 땅에 손을 짚고 겨우 넘어짐을 막았다.
`반응 지연: 0.62초`
`회피 거리: 부족`
`권장: 첫 발 이동 시점 단축`
그는 손바닥에 묻은 흙을 내려다봤다.
왕력의 몸은 눈으로 읽었다. 오른발이 땅을 누르고 골반이 뒤따라 돌고 오른팔이 나왔다. 그런데 기록 속 왕력은 움직이지 않았다. 발자국은 남은 결과일 뿐이었다.
사람은 결과를 기다려 주지 않는다.
한리가 밧줄을 다시 묶으려는 순간 굵은 손이 다른 쪽 끝을 잡았다.
"그렇게 묶으면 또 걸린다."
왕력이 울타리 너머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훈련용 나무 막대 두 개를 들고 있었다. 맹수원 안에서는 산철호가 먹이를 뜯는 낮은 소리가 났다.
한리는 밧줄에서 손을 뗐다.
"해 질 무렵에 나오라고 하셨습니다."
"나왔네. 그런데 너는 내가 오기 전에 발목부터 훔쳐보고 있었고."
왕력의 목소리는 거칠었지만 화난 기색은 아니었다. 한리는 잠시 대답하지 못했다. 발자국을 보는 일과 약점을 노리는 일은 다르다고 생각했지만 왕력에게는 같은 모양으로 보일 수 있었다.
"발목을 보려던 건 아닙니다."
"그럼 뭘 봤지?"
"제가 어디로 빠져야 하는지요."
왕력은 한참 밧줄과 흙 선을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막대 하나를 한리 발치에 던졌다.
한리는 막대를 받지 못했다. 막대가 팔뚝을 맞고 흙 위로 굴렀다.
"그걸 보고 피할 수 있겠냐?"
"모르겠습니다."
"모르면 연무장에서 확인하면 된다."
왕력은 먼저 맹수원 옆 공터로 걸었다. 한리는 막대를 주워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이걸 쥐어도 왕력의 힘을 막을 수 없었다. 그는 빈손으로 뒤를 따랐다.
연무장은 넓지 않았다. 오래된 모래바닥 둘레에 낮은 말뚝이 박혀 있었고 한쪽에는 부러진 목검들이 엉켜 있었다. 맹수원 잡역들이 짐승을 피하는 법을 익히는 자리라는 것을 한리는 이제야 알았다.
울타리 안에서 어린 잡역 둘이 고개를 내밀었다. 왕력이 손을 들자 아이들은 바로 문 뒤로 물러났다.
"가까이 오지 마라."
그 짧은 말이 끝나자 왕력의 표정도 달라졌다. 한리는 어제 수레 앞에서 보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왕력은 힘이 세서 앞에 서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기 뒤에 있는 사람이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앞에 서는 쪽이었다.
왕력은 연무장 중앙에 막대를 세웠다.
"저 말뚝까지 세 걸음 안에 들어가면 네가 이긴 거다. 나는 막대 끝으로 네 어깨를 건드리기만 한다."
"얼마나 빠르게요?"
"경합장보다는 느리게."
"그럼 연습이 안 됩니다."
왕력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
한리는 말이 너무 곧았다는 걸 알았지만 물리지 않았다.
"경합장에서는 봐주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느린 걸 피하면 제가 잘못 배웁니다."
왕력은 막대를 쥔 손을 한번 풀었다.
"네 몸으로 내 힘을 다 받으면 경합장에 못 선다."
"막지 않겠습니다. 피할 수 있는 만큼만 피하겠습니다."
"못 피하면?"
"맞아야죠."
왕력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웃음은 아니었다.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에 가까웠다.
"좋아. 네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다."
한리는 말뚝을 등지고 섰다. 모래가 발바닥 아래에서 미세하게 밀렸다. 어깨 상처는 아직 욱신거렸고 하단전의 기운은 얇은 실처럼 돌고 있었다.
`Entity: 왕력`
`물리 출력: 현 측정 범위 초과`
`관측 기록: 중심 전환 오차 0.47초`
`권장: 정면 충돌 금지`
정면 충돌은 하지 않는다.
그것만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왕력의 어깨가 낮아졌다.
푸른 글자가 한리의 시야 한복판에 떠올랐다.
`공격 궤적: 좌상단 → 우하단`
`회피 권장: 좌측 후방 1.5보`
한리는 왼발을 움직였다.
하지만 권장을 읽은 다음에야 움직인 발은 늦었다. 나무 막대 끝이 갈비뼈에 닿았다. 세게 친 것이 아니었는데도 숨이 턱 막혔다.
"한 번."
왕력은 곧바로 물러났다.
한리는 이를 악물었다. 갈비뼈를 쓸어내리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두 번째에는 오른쪽으로 물러났다. 막대는 허공을 스치듯 지나갔지만 왕력의 팔이 그 궤적을 꺾었다. 한리는 늦게 뒤로 젖혔고 나무 끝이 어깨 상처를 건드렸다.
새 피가 옷감에 배었다.
"둘."
왕력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어깨는 건드리지 말랬습니까?"
"아니."
"그럼 계속하겠습니다."
세 번째에는 한리가 처음으로 왕력의 발을 봤다.
오른발이 모래를 누른다.
골반이 돌기 직전 잠깐 멈춘다.
`중심 전환 오차: 0.47초`
`우측 이탈 성공 확률: 71%`
오른쪽으로 빠지면 된다.
그 순간 한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왕력의 오른발목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어제처럼 무거운 상자를 들었을 때와 같은 흔들림이었다. 그곳으로 피하면 왕력은 발목을 억지로 버티거나 공격을 거둬야 한다.
한리는 그 선택을 할 수 없었다.
어제 왕력은 수레가 우리 문으로 밀리는 순간에도 자기 발보다 아이들이 있는 울타리를 먼저 봤다. 그 사람의 상처를 발판으로 삼아 피하면 살아남아도 남는 것이 없었다.
한리는 오른쪽 대신 뒤로 물러났다.
나무 막대가 무릎 뒤를 쳤다.
다리가 풀리며 모래바닥이 가까워졌다. 한리는 한쪽 손을 짚고 굴렀다. 입 안에 모래가 씹혔다.
`회피 실패`
`실패 원인: 회피 방향 선택 지연`
`주의: 외부 관측값 의존 과다`
왕력이 막대를 내렸다.
"그만할까."
한리는 대답하지 못하고 숨부터 골랐다. 가슴은 아팠고 어깨는 뜨거웠다. 그래도 몸 안의 얇은 기운은 끊기지 않았다. 수로에서 세 갈래 물을 따라 숨을 나눴던 감각이 남아 있었다.
들이쉰다.
한 갈래.
내쉰다.
두 갈래.
남은 숨을 아래로 가라앉힌다.
세 갈래.
호흡이 조금 고르게 이어지자 로그의 푸른 글자도 흔들림을 멈췄다.
"왜 오른쪽으로 안 갔지?"
왕력이 물었다.
한리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쪽은 당신 발이 버티기 어려운 자리였습니다."
왕력의 눈빛이 굳었다.
"그러니까 거기로 가면 됐잖아."
"그건 피하는 게 아니라 다친 곳을 밟는 겁니다."
"경합장이 네 사정을 봐줄 것 같냐."
"그렇지 않겠죠."
한리는 손등의 모래를 털었다.
"그래도 저는 제가 본 걸 아무 데나 쓰고 싶지는 않습니다."
왕력은 말없이 한리를 보았다. 울타리 안의 산철호가 목을 한번 울렸다. 잠시 뒤 왕력이 나무 막대를 어깨에 걸쳤다.
"내 발목은 네가 생각하는 만큼 큰 약점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모르면서."
왕력은 왼발로 모래를 밀었다. 그의 몸이 낮아졌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번에는 오른발이 잠깐 흔들리지도 않았다.
"짐승이 우리를 들이받을 때는 발을 아끼면 안 돼. 내 발목이 늦는 건 그때만이다. 상대를 부수려고 마음먹으면 그 틈은 없어져."
한리의 눈앞에 있던 수치가 한 줄씩 지워졌다.
`관측값 재평가`
`0.47초 오차: 조건부`
`고정 약점으로 사용 불가`
한리는 입술을 다물었다. 편한 답을 버린 것이 틀리지 않았다는 안도와 처음부터 쉬운 답이 아니었다는 긴장이 같이 밀려왔다.
왕력이 말했다.
"내 팔을 보지 마. 내 발도 보지 마. 네가 내 움직임을 읽고 나서 피하면 늦는다."
"그럼 뭘 봅니까?"
"네 발을 봐."
한리는 자신도 모르게 발밑을 내려다봤다.
"상대가 움직인 뒤에 발을 뺄 생각부터 하니까 맞는 거다. 먼저 뺄 준비를 해. 내가 올지 안 올지는 그다음 문제고."
그 말은 단순했지만 한리의 머릿속에 걸렸다.
로그는 늘 공격이 시작된 뒤에 방향을 띄웠다. 화면을 읽고 판단하고 움직이면 반 박자가 늦는다. 필요한 것은 더 빠른 계산이 아니었다.
계산하기 전에 이미 움직일 수 있는 자리를 만드는 것.
한리는 말뚝 옆에 다시 섰다. 이번에는 왕력의 어깨를 보지 않았다. 시선을 낮춰 왕력의 가슴 아래쪽과 발밑 모래의 그림자를 함께 담았다.
왼발 뒤꿈치를 아주 조금 들었다.
하단전의 기운을 끌어올리지는 않았다. 억지로 힘을 쓰면 다리가 굳을 것 같았다. 대신 숨을 들이쉴 때 발바닥에 힘을 나누고 내쉴 때 한쪽 무게를 비웠다.
왕력이 막대를 들었다.
한리는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왕력의 발이 모래를 누르는 소리가 났다.
사박.
그 소리가 들린 순간 한리는 숨을 끊었다. 왕력이 막대를 휘두른 뒤가 아니라 몸을 싣는 바로 그때였다.
왼발이 뒤로 미끄러졌다.
`공격 궤적: 우상단 → 좌하단`
`회피 권장: 좌측 후방 1보`
`입력 지연: 감소`
한리는 로그의 마지막 줄을 읽지 않았다. 이미 한 걸음을 옮긴 뒤였다.
나무 막대가 코앞을 가로질렀다. 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한리는 멈추지 않았다. 첫 발로 생긴 빈자리에 오른발을 끌어오고 몸을 반 걸음 더 돌렸다.
왕력의 막대가 원래 한리가 있던 자리를 두 번 가르고 지나갔다.
툭.
세 번째 끝이 한리의 옷자락만 건드렸다.
왕력은 막대를 거뒀다.
연무장이 조용해졌다.
한리는 두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숨을 몰아쉬었다. 다리는 후들거렸고 어깨에서는 다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러나 이번에는 모래바닥에 손을 짚지 않았다.
`회피 성공`
`예측 의존도: 하락`
`실시간 회피 가이드: 초기 학습 완료`
`궤적 관측 데이터: 누적`
그 아래에 낯선 문장이 천천히 떠올랐다.
`무형검결 기초 조건: 궤적 관측`
`현재 충족률: 3%`
검결.
한리는 그 글자를 읽고도 손을 뻗지 않았다. 지금의 자신에게 검결은 연무장 한가운데 놓인 목검보다 먼 물건이었다. 겨우 피한 사람에게 베는 법을 말하는 창은 믿을 수 없었다.
"됐습니까?"
그가 물었다.
왕력은 막대를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은 됐다."
"한 번뿐입니다."
"한 번도 못 하던 놈이 한 번 했으면 다음에는 두 번 하면 돼."
왕력은 울타리 쪽을 바라봤다. 맹수원 안에서 산철호가 낮게 울었다. 해는 이미 산등성이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고 우리 문 옆 등불에 불이 들어왔다.
"내일도 해 질 무렵에 와라. 이번에는 내가 세 번 친다. 네가 세 번 다 말뚝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인정한다."
한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대신 경합장에서는 오늘처럼 멈추지 마라. 상대가 다친 데를 밟을지 말지는 그때 네가 정해. 하지만 그걸 망설이다 죽지는 마."
왕력의 말은 용서도 훈계도 아니었다. 자기 기준을 건네는 말이었다.
한리는 잠시 뒤 대답했다.
"죽지 않을 방법부터 배우겠습니다."
연무장 입구에서 마른 기침 소리가 났다.
조 집사가 장부를 든 채 서 있었다. 그는 한리의 옷에 번진 피와 모래를 보고 눈썹을 찌푸렸다.
"후보패를 걸고 서로 다치게 할 생각이냐."
왕력이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제가 막대 끝으로만 쳤습니다."
"그래서 더 문제다. 네 막대 끝도 저 녀석에게는 몽둥이일 테니까."
조 집사는 한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후보패를 내놔라."
한리는 품에서 나무패를 꺼냈다. 조 집사는 패의 뒷면을 살피고 손가락으로 비어 있던 세 칸 중 첫 칸을 눌렀다. 붉은 먹선이 얇게 번졌다.
"예비 시험은 이틀 뒤 새벽이다. 영로원과 맹수원만의 일이 아니다. 수확과 운반을 본 집사들이 다른 후보도 올렸다."
"몇 명입니까?"
"확정되면 알게 된다."
조 집사는 왕력을 보았다.
"너는 맹수원 우리 잠금부터 확인해라. 한리는 상처를 씻고 영로원으로 돌아가라. 마삼의 장부 심문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 사이 후보가 일을 빼먹었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해라."
"예."
한리는 패를 받았다.
조 집사가 돌아선 뒤 왕력은 나무 막대를 한리 발치에 내려놓았다.
"내일 이걸 가져와. 맨손으로만 피하려고 하지 마. 손에 뭘 쥐고 있어도 네 발이 먼저 나가야 한다는 건 같으니까."
"이걸로 막을 수는 없습니다."
"막으라고 준 거 아니다. 거리를 재라고 준 거다."
왕력은 그렇게 말하고 맹수원으로 돌아갔다.
한리는 혼자 남은 연무장에 서 있었다. 손에는 나무 막대와 후보패가 있었다. 하나는 닿지 않기 위한 거리였고 다른 하나는 버티지 못하면 빼앗길 자리였다.
영로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어두웠다. 그는 수로 옆에서 어깨 상처를 씻었다. 차가운 물이 닿자 몸이 움찔했지만 하단전의 기운은 끊기지 않았다.
수로는 돌틈을 지나 세 갈래로 흘렀다.
한리는 물소리에 맞춰 왼발을 뺐다. 오른발을 끌어오고 몸을 돌렸다. 왕력의 막대가 없어도 모래 대신 진흙 위에 발자국이 남았다.
한 번.
두 번.
세 번째에 후보패가 손바닥에서 미세하게 떨렸다.
푸른 로그가 나무패 위로 번졌다.
`예비 시험 참가 반응: 3`
`확인 대상: 왕력`
`미확인 물리 반응: 감지`
`주의: 관측 기록 없음`
한리는 패를 뒤집어 보았다. 나무에는 아무 이름도 새겨져 있지 않았다.
왕력 외에 한 명이 더 있다.
보지 못한 움직임은 읽을 수 없다.
그는 물길 옆에서 다시 발을 뺐다.
이번에는 밧줄이 없어도 넘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