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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 보호자는 살림부터 합니다1화

계약 보호자는 살림부터 합니다

계약 보호자는 살림부터 합니다

시놉시스

과로한 회계사 윤서현은 오래된 후견 계약서를 읽던 밤, 아르벨 왕국 북부의 헤르윈 공작가로 전이된다. 실종된 공작과 흩어질 위기의 아이 셋 앞에서 그는 장부와 식단표를 든 임시 계약 보호자가 된다.

1화: 사흘 치 식량과 서른 날

윤서현은 눈을 뜨자마자 천장 재질부터 확인했다.

석고보드가 아니었다. 나무 결이 살아 있는 천장에는 얇은 서리가 끼어 있었고, 탁자에는 촛농이 굳어 있었다. 전기 냄새도, 복사기 열기도 없었다.

그 대신 손등이 아팠다.

검은 잉크 문양이 피부 아래에서 천천히 번졌다. 도장처럼 보였지만 찍힌 자국은 아니었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가느다란 선이 맥박처럼 떨렸다.

"깨어나셨습니까."

문가에 선 남자는 검은 제복을 입고 있었다. 정중한 말투였지만 손은 허리 옆 칼집 근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흉터가 남은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굳어 있었다.

서현은 먼저 침대 옆을 짚었다.

업무 수첩. 만년필. 계산기. 신분증. 빈 도시락통.

전부 낯익었다. 휴대폰은 없었다. 어젯밤 복지재단 감사 파일 위에 올려 두었던 오래된 후견 계약서도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 기억은 정전이었다. 맞지 않는 급식비 영수증, 빈 보호자란의 낯선 문장을 읽던 순간.

서현은 숨을 고르고 물었다.

"여기가 어디입니까."

"헤르윈 공작가 본관입니다."

"국가와 날짜도요."

"아르벨 왕국 북부. 국경 원정 사고 뒤 스물아홉째 날입니다."

서현은 수첩을 폈다. 손이 떨렸지만 글씨는 똑바로 남았다.

아르벨. 헤르윈. 사고 뒤 29일. 통역 가능. 전자기기 작동 불명.

"제 이름을 알고 있습니까."

"계약서에는 윤서현이라고 적혔습니다."

"직책은요."

남자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임시 계약 보호자."

그 단어에서 손등이 다시 뜨거워졌다. 침대 발치에 놓인 긴 양피지 위로 같은 문양이 떠올랐다. 서현은 몸을 낮추어 문장을 읽었다.

대부분은 자연스럽게 이해됐다. 몇몇 법률 단어만 젖은 잉크처럼 뭉개졌다.

피후견인 생계. 교육. 의료. 재산 보전.

보호자 직무 개시.

30일 뒤 1차 안정성 심사.

기준 미달 시 분산 위탁.

서현은 목 안이 말라붙는 것을 느꼈다. 복지재단 감사 자료의 말들이 떠올랐다. 분리 보호. 행정 편의. 숫자만 맞고 실제로는 비어 있던 급식 창고.

그는 양피지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물었다.

"피후견인은 아이들입니까."

"그렇습니다."

"몇 명입니까."

"셋입니다."

그때 복도에서 작은 발소리가 났다.

문틈 뒤에 은회색 머리의 아이가 서 있었다. 열한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는 어른처럼 등을 펴고 있었지만, 손가락 끝은 소매를 꽉 쥐고 있었다.

"계약상으로는, 저희가 먼저 물어야 합니다."

"당신은 저희를 어디로 보낼 사람인가요."

남자가 낮게 말했다.

"리아 님."

"카엘, 대답을 들어야 해요."

"아직 아무 데도 보내지 않습니다."

"아직은요?"

"제가 확인하지 않은 문서로 아이를 이동시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리아의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확인하면요?"

"그때도 너희에게 설명하지 않고 정하지는 않습니다."

방 안에는 아이가 둘 더 있었다. 갈색 곱슬머리의 남자아이는 난로 옆에 서서 손을 숨겼다. 더 작은 아이는 의자 뒤에서 금빛 눈만 내밀었다.

서현은 목소리를 낮췄다.

"이름을 알려 줄 수 있습니까."

리아는 잠깐 망설였다. 작은 아이의 어깨가 움찔하자, 리아는 한 걸음 옆으로 움직여 동생을 가렸다.

"리아 헤르윈입니다. 동생은 노아, 미나."

"고맙습니다."

노아의 숨이 조금 빨라졌다. 난로 위에 놓인 작은 푸른 돌이 희미하게 달아올랐다. 카엘이 움직이려 하자 서현이 손을 들었다.

"소리 내지 마세요. 아이가 놀랍니다."

카엘의 시선이 차가워졌다.

"그 돌은 위험합니다."

"그래서 더 천천히 해야 합니다."

서현은 노아에게 갑자기 다가가지 않았다. 감사 현장에서 만난 아이들도 그랬다. 목소리가 커질수록 대답은 짧아지고, 손은 책상 아래로 숨었다.

"노아."

노아의 어깨가 굳었다.

"손을 펴라는 말은 안 하겠습니다. 대신 저 돌에서 한 걸음만 멀어질 수 있습니까. 싫으면 고개만 저어도 됩니다."

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발끝을 반 뼘 뒤로 뺐다.

푸른 빛이 아주 조금 줄었다.

의자 뒤의 미나가 서현의 손등을 가리켰다.

"잉크가 아파."

서현은 자신의 손등을 보았다. 문양 한쪽이 번져 있었다. 통증은 화상보다 얇고 집요했다.

"이게 보여?"

미나는 대답 대신 리아 뒤로 숨어 버렸다. 리아는 더 세게 동생을 감쌌다.

카엘이 한 장의 봉투를 내밀었다. 밝은 밀랍 위에는 왕관과 저울 모양이 찍혀 있었다.

"왕실 후견 위원회 통보서입니다. 어제 도착했습니다."

서현은 봉투를 열었다.

문장은 예의 바르고 차가웠다. 공작의 부재가 30일을 넘기기 전, 미성년 피후견인 셋의 생계와 교육 안정성을 확인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기준 미달 시 각각 다른 귀족가로 분산 위탁한다는 문장은 선명했다.

"각각."

서현이 낮게 반복했다.

리아의 턱이 굳었다.

"저희를 나누겠다는 뜻이에요."

"통보서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당신도 그렇게 할 건가요?"

서현은 봉투를 접었다.

"오늘 밤 정할 문제는 아닙니다."

"그럼 뭘 정하죠?"

"밥. 잠자리. 창고. 장부."

리아가 처음으로 아이답게 당황한 얼굴을 했다.

서현은 수첩 한쪽을 찢어 네 칸을 만들었다.

"아이를 지킨다는 말이 맞으려면 오늘 먹을 것과 잘 곳부터 확인해야 합니다. 그다음 누가 무엇을 근거로 너희를 나누려는지 봅니다."

복도 끝에서 낮은 여자 목소리가 터졌다.

"아이들 저녁은 더 미룰 수 없습니다. 카엘 님, 창고 열쇠를 주십시오."

"외부인이 깨어난 직후입니다. 이동은 통제합니다."

"외부인보다 빈 냄비가 먼저입니다."

서현은 양피지와 통보서를 함께 들었다.

"주방으로 갑시다."

카엘이 문 앞을 막았다.

"당신에게 저택의 창고를 열 권한은 아직 증명되지 않았습니다."

서현은 계약서의 한 줄을 짚었다.

"계약 보호자는 피후견인의 생계, 교육, 의료, 재산 보전을 책임진다. 생계 책임자가 식량을 확인하지 못하면 책임을 질 수 없습니다. 재산 보전 책임자가 창고와 장부를 보지 못해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지 법을 아십니까."

"모릅니다. 제가 틀렸다면 현지 법률 용어로 바로잡아 주세요."

카엘은 대답하지 못했다.

주방은 차가웠다. 조리대에는 마른 빵 끝과 묽은 수프 냄비가 놓여 있었다. 난로 불은 작았고, 장작은 세 개뿐이었다.

마리엔 벨이라고 소개한 여자는 서현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거친 손과 지친 눈빛이 있었다.

"새 보호자라면 먼저 보셔야 할 건 아이들 접시입니다."

"접시 다음은 창고입니다."

"말은 맞는데, 보통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숫자만 보고 애들 얼굴은 안 봅니다."

"그래서 둘 다 봅니다."

마리엔의 표정이 아주 조금 풀렸다.

"그럼 숫자부터 보시죠."

창고 문이 열렸을 때, 서현은 숨을 짧게 들이켰다.

먼저 냄새가 왔다. 빈 선반, 오래된 밀가루 자루, 먹을 것을 오래 걱정한 장소의 냄새였다.

서현은 머릿속으로 칸을 나누었다.

곡물 자루 네 개. 그중 하나는 반 이하.

말린 콩 두 항아리.

소금 작은 통.

훈제육 끝부분 몇 줄.

감자는 언 것까지 합쳐 바구니 셋.

마리엔이 먼저 말했다.

"아이들 몫은 줄이지 않았습니다."

그 말은 변명보다 보고에 가까웠다.

서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인 일곱, 아이 셋 기준으로 계산하겠습니다. 지금 저택에 남은 인원 전부가 그 정도입니까?"

카엘이 짧게 답했다.

"사용인은 저와 마리엔, 하녀 둘, 마구간지기 하나, 경비 둘입니다."

"총 열 명."

서현은 수첩에 적었다. 손가락은 습관적으로 계산기 버튼을 눌렀지만 화면은 죽어 있었다. 그는 바로 만년필로 바꾸었다.

"절약식이면 사흘. 아주 무리하면 나흘입니다. 아이들 식사량을 줄이지 않는 조건입니다."

마리엔이 입술을 깨물었다.

"장부에는 한 달 치라고 되어 있습니다."

카엘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마리엔."

"말조심해서 배가 차면 진작 찼겠죠."

서현은 카엘을 보았다.

"장부를 봐야 합니다."

"지금은 밤입니다."

"아이들 식량은 사흘 치고, 통보서에는 서른 날 뒤 심사라고 적혀 있습니다. 밤이라는 이유로 미룰 수 있는 항목이 아닙니다."

카엘은 잠시 서현을 보았다. 불신과, 이미 알고 있던 것을 남의 입으로 듣는 사람의 피로가 함께 있었다.

그는 결국 접힌 장부 한 권을 가져왔다.

서현은 조리대 위에 장부를 펼쳤다. 몇몇 단위가 흔들려 마리엔에게 하나씩 확인했다.

"겨울 밀 여덟 자루 입고."

"그런 건 못 봤습니다."

"훈제육 두 상자."

"마지막 상자는 지난주에 끝났습니다."

"콩 다섯 항아리."

"두 항아리입니다. 하나는 바닥이 보이고요."

장부상 한 달 치.

실제 사흘 치.

서현의 손등에서 잉크가 번졌다. 이번에는 통증이 더 뚜렷했다. 계약서 위 한 줄이 저절로 검게 진해졌다.

재산 훼손 위험. 피후견인 생존 위험.

미나가 문밖에서 작게 말했다.

"잉크가 울어."

서현은 아이들이 문밖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리아는 동생들을 뒤에 세운 채 버텼고, 미나는 졸린 눈으로도 서현의 손등만 보고 있었다.

돌아갈 방법.

그 질문은 아직 답이 없었다. 아이들을 흩어 놓고 찾을 답도 아니었다.

서현은 수첩을 새 장으로 넘겼다.

첫 임시 운영 목록.

  1. 오늘 밤 아이들 식사와 수면 확인.

  2. 창고 실사표 작성.

  3. 장부 원본과 실제 수량 대조.

  4. 체불 임금 및 남은 인력 확인.

  5. 후견 통보서 조항 현지 검토.

마리엔이 수첩을 들여다보다 낮게 말했다.

"그걸 다 하면 밥이 나옵니까?"

"당장 밥은 안 나옵니다."

"그럼?"

"어디서 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새는 곳을 막아야 다음 밥이 나옵니다."

리아가 물었다.

"당신이 돌아가야 한다면요?"

서현은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방법은 찾아야 합니다."

리아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결국 가겠네요."

"그럴 수 있습니다."

미나가 리아의 치마를 잡았다. 노아는 바닥만 보았다.

서현은 수첩을 덮지 않았다. 대신 아이들이 볼 수 있도록 조리대 위에 펼쳐 두었다.

"하지만 오늘 밤 너희를 흩어지게 두고 가지는 않습니다. 식탁에 뭘 올릴지도 계산해야 합니다."

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믿는 얼굴은 아니었다. 그래도 방을 나가지는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첫 줄은 쓸 수 있었다.

서현은 장부의 날짜와 창고 선반의 빈칸을 번갈아 보았다.

감사 현장에서 가장 먼저 봐야 할 것은 언제나 숫자가 아니었다. 숫자가 가린 사람이었다.

"카엘 씨."

"말씀하십시오."

"창고 출입 기록, 식재료 장부 원본, 최근 한 달 구매 명세를 오늘 밤 안에 가져오세요. 없으면 없다고 적겠습니다."

카엘의 턱이 굳었다.

"명령입니까."

"기록입니다."

서현은 아이들이 들을 수 있게 또박또박 말했다.

"이 집, 어디서 새는지 확인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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