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좌들의 스폰서가 되었다

2화: 성좌에게 입금합니다
윤성우는 골목 벽에 등을 기댄 채 휴대폰 화면을 내려다봤다.
병원에서 온 문자는 아직도 상단 알림에 남아 있었다. 모레 오후 다섯 시까지 치료비를 납부하지 않으면 예약이 취소된다는 짧은 문장. 숫자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통장 잔액은 그 숫자를 감당하지 못했다.
반면 눈앞의 은빛 창에는 143이라는 숫자가 떠 있었다.
[신성 통장]
[계좌 소유자: 윤성우]
[보유 신성: 143]
현금으로 바꿀 수 없다는 점만 빼면 이상할 만큼 깔끔한 잔고였다.
성우는 손가락으로 화면을 쓸었다. 소멸 예정 성좌 목록이 검은 하늘처럼 열린 뒤 이름 하나를 붉게 띄웠다.
[무신의 황혼 / 신앙 잔량 0.02%]
[최소 후원 가능 금액: 100 신성]
이름 아래의 붉은 갑주 거인은 처음보다 흐릿해 보였다. 거인의 발밑에는 성벽이 있었다. 그러나 벽돌 하나하나가 모래처럼 흩어져 검은 허공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후원이 지연되면 성좌 소멸 가능성이 높습니다.]
성우는 창을 닫지 않았다.
성좌에게 후원한다는 말은 낯설었다. 헌터가 성좌의 눈에 들려고 공물을 바치고 계약의 대가로 스킬을 받는 것이 세상의 상식이었다.
그 상식 속에서 성우는 언제나 맨 끝줄에 있었다. E급 감각 강화. 대형 길드가 싫어하는 말 한마디를 하면 다음 공략 호출이 끊길 수 있는 등급.
그런 자신에게 성좌를 후원할 권한이 생겼다.
‘권한이 아니라 미끼일 수도 있지.’
성우는 무신의 황혼의 정보를 눌렀다.
[후원금은 반환되지 않습니다.]
[후원 대상이 소멸할 경우 미사용 후원금의 보호를 보장하지 않습니다.]
[누적 후원 100 신성 달성 시 스폰서 마켓이 개방됩니다.]
그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약관은 또 확실하네.”
돈이든 신성이든 먼저 내라고 하는 쪽은 늘 위험을 고객에게 넘겼다. 철혈 길드가 건넨 정산표도 그랬다. 운반 수수료와 장비 감가를 잔뜩 적어 놓고 손실은 하청 헌터 몫이라고 밀어붙였다.
차이가 있다면 이쪽은 손해를 볼 때 무엇을 얻는지 적어 두었다는 점이었다.
성우는 보유 신성 143을 다시 봤다. 100을 보내면 43이 남는다. 혹시 이 통장이 사라지면 오늘 얻은 철갑 멧돼지와 마나스톤은 정말 흔적도 없이 날아간다.
그래도 143은 병원에 낼 수 있는 돈이 아니었다.
반대로 마켓이 열리면 이 세계의 상식이 아닌 무언가를 살 수 있다.
성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돈이 아니라면 더 빨리 굴려야지.”
그는 후원 금액 입력창에 100을 적었다.
[무신의 황혼에게 신성 100을 후원하시겠습니까?]
확인 버튼이 조용히 빛났다.
성우는 망설이지 않고 눌렀다.
은빛 선 하나가 손가락 끝에서 뻗어 나갔다.
골목의 젖은 아스팔트와 편의점 간판이 모두 사라졌다. 그의 시야는 순식간에 별 하나 없는 검은 공간으로 끌려 들어갔다.
붉은 갑주를 입은 거인이 그 한가운데 무릎을 꿇고 있었다.
갑주의 어깨와 가슴에는 칼날 같은 균열이 있었다. 균열 사이로 새어 나오던 불빛은 거의 꺼져 있었다. 거인의 뒤에 선 성벽도 절반은 무너져 있었다. 검은 바람이 그 잔해를 핥을 때마다 사람 얼굴 같은 비명이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후원 처리 중입니다.]
성우가 낯선 광경을 바라보는 사이 거인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누구냐.”
목소리가 공간 전체를 울렸다.
위엄 있는 소리였다. 그러나 마지막 음절이 갈라졌다. 오래 굶은 사람이 물 냄새를 맡았을 때 내는 숨과 비슷했다.
성우는 고개를 들었다.
“윤성우입니다.”
거인의 붉은 눈이 그를 향했다.
“인간이 내게 신성을 보냈다고?”
“입금 확인부터 하시죠.”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때 무너져 내리던 성벽에서 붉은 빛이 번졌다. 모래가 되던 돌들이 거꾸로 떠올라 원래 자리로 돌아갔다. 갑주의 균열도 천천히 아물었다.
[무신의 황혼에게 신성 100을 후원했습니다.]
[보유 신성: 43]
거인의 손가락이 굽혔다. 손바닥 하나가 건물만 했다. 그런데 그 손이 아주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백 신성.”
무신의 황혼이 중얼거렸다.
“마지막 신도들이 남긴 제단을 팔아도 구경 못 할 수치다.”
성우는 그 말을 듣고도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그럼 돈값을 해야겠군요.”
무신의 황혼의 시선이 다시 그에게 박혔다.
“건방진 인간이로다.”
“후원자는 건방져도 된다고 들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했지?”
“방금 제가 정했습니다.”
검은 공간에 바람이 멎었다.
무신의 황혼의 눈에 불꽃이 번쩍였다. 성우는 그 불꽃이 분노인지 웃음인지 판단하지 못했다. 다만 거인은 더는 그를 내려다보는 신의 표정을 짓지 못했다.
[누적 후원 100 신성 달성.]
[스폰서 마켓이 개방됩니다.]
은빛 창이 두 사람 사이에서 넓게 펼쳐졌다.
[후원 성좌가 등록한 권능을 구매할 수 있습니다.]
[구매한 권능은 계좌 소유자에게 즉시 귀속됩니다.]
[구매 계약은 성좌의 기존 계약과 무관하게 체결됩니다.]
성우의 눈이 마지막 문장에서 멈췄다.
계약자와 무관하다.
성좌의 선택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신앙을 바치고 목숨을 담보로 잡힐 필요도 없다. 가격만 맞으면 성좌의 것을 살 수 있다.
“마켓이 열렸습니다.”
무신의 황혼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내 무예는 한때 천상의 전장을 지배했다. 네가 원한다면 신성 파쇄참도, 백전의 갑주도 내어 줄 수 있다.”
목록이 아래로 길게 흘렀다.
[신성 파쇄참 / 3,000 신성]
[백전의 갑주 / 1,800 신성]
[투신의 전장 지배 / 950 신성]
[전쟁 신기의 파편 / 400 신성]
성우는 숫자를 훑다가 피식 웃었다.
“남은 잔고가 43인데 추천이 너무 과하네요.”
무신의 황혼의 얼굴이 굳었다.
“그렇다면 더 모아 오면 된다.”
“그 전에 저한테 맞는 물건이 있는지부터 봐야죠.”
성우는 맨 아래까지 목록을 내렸다.
화려한 권능들 사이에 유난히 작은 글씨가 하나 있었다.
[투성의 감각 / 30 신성]
[전투 중 상대의 근육 움직임, 호흡, 살의를 감각 정보로 변환합니다.]
[사용자 육체 능력 이상으로 신체를 움직이지 않습니다.]
성우는 문장을 천천히 읽었다.
힘을 억지로 늘려 주는 기술이 아니었다. 대신 자신의 E급 감각 강화와 잘 맞았다. 발밑 진동과 공기의 흐름을 먼저 읽는 능력에 상대의 움직임까지 겹치면 싸움에서 한 발 앞설 수 있다.
무신의 황혼이 말했다.
“초입의 기술이다. 네 몸으로는 그 정도부터 받아들이는 편이 좋다.”
“값이 싼 이유는요?”
“내게는 검을 휘두르는 감각일 뿐이니까.”
성우는 창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계약 기간 없음. 사용 횟수 제한 없음. 구매 뒤 환불 불가.
후원은 도박이었다. 하지만 구매는 계산할 수 있었다.
“이걸 사겠습니다.”
무신의 황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잠깐. 인간아, 네가 다음 신성을 가져온다면 더 위대한 무예를—”
“다음 거래는 이 상품이 값을 하면 하죠.”
성우가 구매 버튼을 눌렀다.
[투성의 감각을 구매합니다.]
[신성 30이 차감됩니다.]
순간 가슴 한복판에 뜨거운 쇠막대가 박히는 듯했다.
성우는 이를 악물었다. 뜨거움은 심장에서 팔과 다리로 번졌다. 손가락 마디마다 감각이 하나씩 늘어나는 기분이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근육의 결을 따라 몸속 지도를 새기는 것 같았다.
거인의 손가락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이 성우에게는 거대한 파도처럼 보였다. 어깨가 먼저 기울고 팔꿈치가 뒤따르며 손목이 마지막에 방향을 결정한다. 검을 쥔 손이 어떤 각도로 떨어질지까지 머릿속에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흐.”
성우가 짧게 숨을 뱉었다.
[투성의 감각이 귀속되었습니다.]
[보유 신성: 13]
무신의 황혼이 낮게 웃었다.
“내 감각을 산 인간아. 이제 너는 칼끝이 오기 전에 바람의 방향부터 읽게 되리라.”
성우는 손을 쥐었다 폈다. 몸이 강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위험을 피할 길이 하나 더 생긴 느낌은 분명했다.
“성벽이 무너지던데요.”
그가 무신의 황혼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그게 당신 영지입니까?”
거인의 표정이 굳었다.
“내 이름을 믿던 자들이 살던 곳이었다.”
“되찾고 싶겠네요.”
“당연하다.”
“그럼 다음에는 물건부터 준비해 두세요. 살 만하면 제가 사겠습니다.”
무신의 황혼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이윽고 거대한 고개가 천천히 숙여졌다.
“좋다. 윤성우. 내 영지의 문을 열 날까지 네게 가장 먼저 값을 보이겠다.”
성우는 채널을 닫았다.
젖은 골목의 공기와 자동차 소리가 한꺼번에 돌아왔다. 귀가 먹먹할 정도로 현실적인 소음이었다.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오태곤이었다.
성우는 통화를 받지 않고 메시지를 먼저 읽었다.
[사체 손실 건으로 현장 사무실 와라. 안 오면 네가 전리품 빼돌린 걸로 협회에 넘긴다.]
그 아래에는 납부 기한을 알리는 병원 문자가 나란히 떠 있었다.
성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현장 사무실은 폐쇄 주차장 입구 옆 컨테이너였다. 불이 켜진 창문 안으로 오태곤의 실루엣이 보였다. 책상 위에는 두꺼운 서류철이 펼쳐져 있었다. 도윤은 구석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성우가 문을 열자 오태곤은 인사도 없이 종이 한 장을 밀어냈다.
“여기 사인해.”
종이 상단에는 전리품 분실 확인서라고 적혀 있었다. 철갑 멧돼지 사체와 마나스톤을 윤성우의 과실로 분실했으며 손해액은 추후 정산에서 공제한다는 내용이었다.
성우는 펜을 들지 않았다.
“제가 왜요?”
“네가 마지막으로 손댔잖아. 사체도 네 앞에서 없어졌고.”
“그럼 반장님이 본 대로 신고하세요. 제 과실이라는 증거도 같이요.”
오태곤의 턱이 굳었다.
“말귀를 못 알아듣네. 좋게 끝내자는 거야.”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순간 성우의 감각이 먼저 반응했다.
오태곤의 오른쪽 어깨가 아주 조금 올라갔다. 책상 아래에 있던 손은 주먹이 되었다. 다음 움직임은 성우의 멱살을 잡는 쪽이었다.
성우는 몸을 반걸음 옆으로 뺐다.
오태곤의 손이 허공을 움켜쥐었다.
“뭐 하는 겁니까?”
낮은 목소리에 컨테이너 안이 조용해졌다.
오태곤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네가 반장 말을 우습게 아니까.”
“우습게 보는 건 장부죠.”
성우는 책상 위 서류철을 가리켰다. 첫 장에 적힌 운반 수수료와 장비 감가가 눈에 들어왔다. 자신이 찍어 둔 배분표와 같은 항목이었다.
“정산 원본 보여 주세요. 철갑 멧돼지 변종 출현 보고도요. 그게 없으면 이 서류엔 사인 못 합니다.”
“하청 주제에 원본을 달라고?”
“하청이라서요. 제 몫에서 뺀다고 하셨잖아요.”
오태곤이 이를 갈았다.
도윤이 의자에서 몸을 움찔했다. 성우는 그를 보지 않았다. 대신 오태곤의 손등과 발끝을 읽었다. 다시 달려들 기세는 아니었다. 다른 하청 인원들이 컨테이너 밖에서 들여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태곤은 결국 서류를 낚아채 서랍에 처박았다.
“내일까지 생각 바뀌면 연락해. 협회에 진술서 들어가면 네가 손해니까.”
“내일까지 원본 준비해 두세요.”
성우는 컨테이너를 나왔다.
등 뒤에서 오태곤이 욕설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전에는 그 소리만 들어도 다음 공략 자리가 끊길까 불안했다.
지금도 병원비는 없고 남은 신성은 13뿐이었다.
그래도 성우는 주머니 속 휴대폰을 가볍게 두드렸다.
성좌에게 먼저 돈을 보내고 권능을 샀다. 그 권능은 이미 자신의 몸에 들어와 있었다.
다음 공략에서는 더 많은 것을 환산할 수 있다.
성우는 비 냄새가 남은 밤길을 걸었다.
“값은 행동으로 증명하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