밑바닥 전이자는 다시 산다

시놉시스
가족에게도 짐처럼 여겨지던 청년 한서준은 지하철 사고 직전 낯선 균열에 삼켜진다. 자동 번역도, 상태창도, 환대도 없는 세계 아르켄에서 그는 가장 낮은 자리부터 다시 살아남아야 한다.
1화: 균열 전야
한서준은 모니터 오른쪽 아래의 시간을 세 번 확인했다.
오후 11시 42분.
집에 돌아가기엔 늦었다고 말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동시에, 더 늦기 전에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기에도 좋은 시간이었다.
화면 속 캐릭터는 바닥에 엎어진 채 움직이지 않았다. 파티 채팅창에는 욕이 올라오고 있었고, 누군가는 서준의 아이디를 찍어 부르고 있었다.
서준은 사과하지 않았다. 손끝으로 접속 종료 버튼을 눌렀다.
"한 시간 더 하실 거예요?"
카운터 쪽에서 PC방 사장이 물었다.
서준은 헤드셋을 벗으며 대답을 미뤘다. 지갑을 열었지만 현금칸에는 천 원짜리 한 장도 없었다. 정지된 카드 두 장이 납작하게 겹쳐 있었다.
"아니요. 나가요."
"밀린 거 오늘은 내셔야 합니다. 저번에도 다음에 준다고 하셨잖아요."
서준은 의자를 밀다가 멈췄다.
"제가 안 내겠다는 게 아니라, 계좌에 문제가 있어서요."
말을 뱉는 순간부터 거짓말 냄새가 났다. 계좌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니었다. 계좌에 돈이 없었다.
돈이 어디로 갔는지도 알고 있었다.
엄마 카드 비밀번호.
네 자리 숫자가 떠오르자 목 뒤가 뜨거워졌다. 서준은 사장 눈을 피하고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부재중 전화 7통. 엄마.
문자 3개. 형.
마지막 문자는 짧았다.
너 진짜 끝까지 이럴 거냐. 엄마 병원비 통장에서 손댄 거 맞지?
서준은 화면을 꺼버렸다. 검게 변한 액정에 자기 얼굴이 비쳤다. 눈 밑은 어둡고, 머리는 눌려 있었고, 입꼬리는 습관처럼 삐뚤어져 있었다.
사장은 카운터 밑에서 장부를 꺼냈다.
"이름하고 번호 적어두신 거 맞죠. 내일까지 안 주시면 연락합니다."
"알겠다고요."
"화를 낼 일이 아니죠."
그 말에 대꾸할 수 없어서 더 화가 났다.
서준은 가방을 들고 계단을 내려갔다. 유리문을 밀자 겨울 공기가 얼굴을 때렸다. PC방 안의 열기와 컵라면 냄새가 등 뒤에서 닫혔다.
골목에는 담배 냄새와 튀김 기름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서준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손가락은 추위보다 먼저 휴대폰을 확인하고 싶어 떨렸다.
집에 가면 형은 문 앞에 서 있을 것이다. 엄마는 식탁에 앉아 있을 것이다. 아버지는 말없이 방에 들어가 있을지도 몰랐다.
모두가 같은 눈으로 자신을 볼 것이다.
또 그 눈.
쓸모없는 사람을 보는 눈.
"나만 그런 것도 아니잖아."
입 밖으로 나온 말은 골목 벽에 부딪혀 금방 사라졌다.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알 수 없었다. 형에게인지, 엄마에게인지, 자기 자신에게인지.
그는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공기가 잠깐 몸을 감쌌다.
삼각김밥 하나와 작은 생수를 계산대에 올렸다. 점원이 가격을 말했다. 서준은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냈다.
오백 원짜리 두 개, 백 원짜리 네 개, 십 원짜리 몇 개.
모자랐다.
"카드 되세요?"
점원의 목소리는 친절했다. 그래서 더 견디기 어려웠다.
"됐어요."
서준은 삼각김밥을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생수도 내려놓았다. 밖으로 나오자 배가 더 고팠다.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엄마.
액정 위의 두 글자가 차갑게 빛났다. 서준은 엄지로 통화 버튼 근처까지 갔다가 멈췄다.
받으면 뭐라고 하지.
죄송하다고?
돈은 다시 벌어서 갚겠다고?
그 말을 몇 번이나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는 삼 주 만에 그만뒀고, 택배 상하차는 하루 나가고 몸살이 났다고 핑계 댔다. 상담 예약은 늦잠으로 놓쳤다. 집안일은 한다고 해놓고 하지 않았다.
전화가 끊겼다.
서준은 안도했다. 곧바로 그 안도가 부끄러워졌다.
음성 메시지 알림이 남았다. 그는 재생하지 않았다.
형에게서 새 문자가 왔다.
엄마한테 전화해. 화내려고 전화하는 거 아니야.
서준은 그 문장을 오래 노려봤다.
거짓말.
그렇게 생각해야 조금 덜 아팠다. 화내려는 게 아니라면 더 나빴다. 걱정하는 목소리를 들으면 자신이 지금 얼마나 바닥에 있는지 더 분명해질 테니까.
그는 큰길로 나왔다. 버스는 거의 끊겼고, 택시를 탈 돈은 없었다. 지하철 막차가 남아 있을지도 몰랐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생각하지 않았다.
집 반대 방향이면 됐다.
역 입구의 계단은 축축했다. 누군가 흘린 커피가 얼어붙어 검게 번져 있었다. 서준은 손잡이를 잡고 내려가다 발을 헛디뎠다. 무릎이 계단 모서리에 부딪혔다.
"아, 씨..."
욕이 나왔지만 주변 사람들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는 괜히 더 절뚝이며 내려갔다.
개찰구 앞에서 교통카드를 찍었다.
삑.
잔액 부족.
뒤에서 누군가 혀를 찼다. 서준은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걸 느끼며 옆으로 비켜섰다. 충전기 앞에 서서 지갑을 다시 뒤졌다.
가족사진이 손끝에 걸렸다.
네 사람이 웃고 있었다. 사진 속 서준은 지금보다 살이 조금 더 있었고, 어깨도 덜 굽어 있었다. 엄마는 그의 팔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는 그 손이 귀찮다고만 생각했다.
서준은 사진 뒤에 끼워둔 천 원짜리 한 장을 꺼냈다. 비상금이라고 넣어뒀던 것도 아니었다. 잊어버린 돈이었다.
그 돈으로 교통카드를 충전하고 나니 손에 남은 건 동전 몇 개뿐이었다.
승강장에는 사람이 드문드문 서 있었다. 술 냄새를 풍기는 남자, 이어폰을 낀 학생, 유모차를 접어 든 젊은 부부. 다들 각자의 밤으로 돌아가는 얼굴이었다.
서준만 아무 데도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 같았다.
휴대폰 배터리는 4퍼센트였다. 그는 음성 메시지 목록을 열었다. 엄마의 마지막 메시지가 맨 위에 있었다.
재생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열차가 곧 들어옵니다.
서준은 화면을 끄지 못한 채 멈춰 섰다. 들으면 집에 가야 할 것 같았다. 듣지 않으면 아직 아무 일도 확정되지 않은 것 같았다.
나중에.
마음이 좀 가라앉으면.
어차피 엄마는 또 전화할 테니까.
그는 그렇게 미뤘다. 늘 그랬듯이.
선로 저편에서 불빛이 다가왔다.
그때 전등이 한 번 꺼졌다 켜졌다.
처음에는 흔한 전기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두 번째 깜박임은 달랐다. 형광등 사이로 검은 선이 지나갔다. 허공 한가운데 벽지가 찢어지는 것처럼 얇은 금빛 자국이 생겼다.
"뭐야?"
누군가 말했다.
서준도 한 걸음 물러섰다. 금빛 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선로 위 공기를 잡아당기듯 길게 늘어났다. 열차의 전조등이 그 틈을 비추는 순간, 승강장 바닥이 낮게 울었다.
빛은 유리 금처럼 번졌다. 금빛 가장자리 안쪽은 검었다. 검은 부분은 어둠이라기보다, 그 자리에 있어야 할 공기가 뜯겨 나간 구멍 같았다.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열차가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바람이 갑자기 거꾸로 불었다. 승강장 끝에 버려진 신문지가 선로 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학생이 비명을 질렀고, 젊은 부부가 유모차를 끌어안았다.
서준은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때 손 안의 휴대폰이 다시 울렸다.
엄마.
이번에는 화면을 보자마자 숨이 막혔다. 배터리 표시가 1퍼센트로 떨어져 있었다.
받아야 한다.
이번에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서준은 통화 버튼을 누르려 했다. 엄지가 화면에 닿는 순간, 바로 앞의 남자가 밀려 넘어졌다. 누군가의 팔꿈치가 서준의 어깨를 쳤다.
휴대폰이 손에서 빠져나갔다.
금 간 액정이 바닥을 미끄러져 안전선 가까이 멈췄다. 화면에는 아직 엄마의 이름이 떠 있었다.
"안 돼."
서준은 몸을 숙였다.
열차의 금속음이 귀를 찢었다. 브레이크가 갈리는 소리, 유리가 깨지는 소리, 사람들이 뒤엉키는 소리가 한꺼번에 터졌다.
서준의 손끝이 휴대폰에 닿았다.
그 순간 그는 처음으로 분명하게 생각했다.
싫다.
사라지고 싶다고 했던 건 이런 뜻이 아니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말은, 정말로 아무도 닿지 않는 곳에 떨어지고 싶다는 뜻이 아니었다.
살고 싶었다.
엄마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화가 났든, 울고 있든,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하든.
한 번은 받아야 했다.
하지만 바닥이 먼저 사라졌다.
추락.
서준은 소리를 질렀다고 생각했지만 자기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금빛 선들이 눈앞을 가득 메웠다가 검게 꺼졌다. 철 냄새가 흙냄새로 바뀌었다. 매캐한 먼지가 입안으로 밀려들었다.
몸이 어딘가에 부딪혔다.
갈비뼈가 접히는 것 같은 통증이 왔다. 서준은 숨을 삼키다 토했다. 차가운 바닥이 뺨에 닿았다.
콘크리트가 아니었다.
젖은 흙이었다. 썩은 물과 오래된 재 냄새가 났다. 머리 위에서는 지하철 전등도, 안내 방송도, 사람들의 비명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멀리서 거친 목소리가 들렸다.
한국어가 아니었다.
서준은 한 손으로 바닥을 더듬었다. 손끝에 금 간 액정이 걸렸다. 휴대폰 화면은 꺼져 있었다.
"엄마..."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자기 귀에도 제대로 닿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낯선 발소리가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