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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잘 먹겠습니다1화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

오늘도 잘 먹겠습니다

시놉시스

유명 호텔 주방에서 미각을 잃은 강성운은 더는 접시 앞에 설 수 없게 된다. 도망치듯 찾은 지리산 자락의 빈집에서 그는 바람과 물, 막 도정한 쌀이 품은 기척을 마주한다.

맛을 잃은 요리사가 다시 불을 켜기까지. 그 첫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화: 지리산의 바람

주문 표가 프린터에서 쉴 새 없이 뱉어졌다.

서울의 호텔 주방은 밤 아홉 시가 넘어서도 밝았다. 천장 조명은 스테인리스 조리대를 하얗게 씻었고 화구 위의 불꽃은 사람의 얼굴을 붉게 달궜다.

강성운은 소스팬 손잡이를 쥔 채 서 있었다.

버터가 갈색으로 내려앉고 샬롯은 투명해졌다. 화이트와인이 졸아들며 산미가 올라올 순간이었다. 그는 닭 육수를 한 국자 붓고 팬을 기울였다.

향은 알았다. 버터가 타기 직전의 고소함도 알았고 샬롯에서 빠져나온 단 향도 알았다.

하지만 맛은 없었다.

“성운 씨.”

뒤에서 수셰프의 목소리가 날아왔다.

“소스 간 봤어요?”

성운은 대답 대신 작은 숟가락을 집었다. 팬 가장자리에서 소스를 떠 입에 넣었다.

혀 위로 따뜻한 액체가 흐르는 감각만 남았다. 소금이 부족한지 레몬즙이 과한지 알 수 없었다. 달고 짠 맛의 윤곽은 몇 달 전부터 흐려졌고 오늘은 그 흐린 윤곽마저 사라졌다.

“아직입니다.”

“메인 나가야 해요.”

주방 한쪽에서 접시가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급히 고기를 뒤집고 누군가는 가니시를 집게로 정리했다. 성운은 소금통 뚜껑을 열었다가 멈췄다.

소금은 원래 손끝보다 먼저 혀가 알았다. 한 꼬집이면 되는지 두 꼬집이 필요한지. 손님이 남긴 접시에서 무엇이 아쉬웠는지. 그 모든 판단이 몸에 밴 호흡처럼 따라왔었다.

이제는 아니다.

성운은 소금통을 내려놓았다.

“제가 다시 만들겠습니다.”

“지금?”

수셰프가 성운의 손과 팬을 번갈아 봤다. 그의 얼굴에는 화보다 먼저 피로가 떠올랐다.

“지난주에도 같은 소스 버렸잖아요. 오늘은 내가 할게요. 성운 씨는 들어가요.”

“죄송합니다.”

“미안하단 말 말고 쉬라고요.”

수셰프는 팬을 가져가 버터를 새로 넣었다. 잠시 뒤 그는 망설임 없이 소금과 레몬을 더했다. 성운은 그 손놀림을 보면서도 무엇이 달라졌는지 알지 못했다.

그 사실이 가장 무서웠다.

사물함 앞에 선 성운은 칼집을 꺼냈다. 매일 닦아 두던 칼날이 형광등 아래에서 가늘게 빛났다. 그는 손잡이를 잡지 못하고 칼집을 다시 넣었다.

휴대폰에는 예약 변경과 근무표 알림이 쌓여 있었다. 성운은 화면을 끈 뒤 가장 아래에 있던 번호를 눌렀다. 외할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지워지지 않은 집 전화였다.

연결되지 않는 신호음이 두 번 울렸다.

성운은 통화를 끊고 메시지 창을 열었다. 아무 말도 쓰지 못한 채 지리산 아래의 주소를 검색했다.

사흘 뒤 그는 낡은 대문 앞에 섰다.

산자락에 붙은 집은 작았지만 마당이 넓었다. 장독대 옆에는 마른 고추 줄기가 흔들렸고 처마 아래에는 외할머니가 쓰던 대나무 소쿠리가 뒤집혀 있었다.

열쇠는 예전처럼 우편함 아래 화분에 있었다.

문을 열자 묵은 나무 냄새와 햇볕에 말린 이불 냄새가 섞여 나왔다. 성운은 한참 현관에 서 있다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가마솥은 깨끗이 닦인 채 아궁이 위에 놓여 있었다. 외할머니는 밥을 지을 때마다 뚜껑을 열어 김 냄새부터 맡았다. 성운이 어릴 적 그 곁에서 숟가락을 들고 기다리면 할머니는 늘 말했다.

‘밥은 기다려 주는 사람한테 제일 먼저 향을 준다.’

성운은 그 말을 떠올린 순간 냉장고 문을 닫았다.

뭘 만들어도 맛을 모를 텐데.

칼을 드는 일은 손님을 속이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는 이틀 동안 라면 봉지와 생수만으로 끼니를 넘겼다. 창문은 열어 두었지만 부엌에는 불을 한 번도 켜지 않았다.

셋째 날 새벽, 성운은 낯선 소리에 눈을 떴다.

바람이었다.

창틀을 스치고 지나간 바람이 마당의 감나무 잎을 뒤집었다. 도시에서는 에어컨 실외기와 차 소리에 묻혀 버렸을 작은 소리였다.

성운은 운동화만 신고 집을 나섰다.

산길에는 밤사이 내린 이슬이 남아 있었다. 흙은 물을 먹어 검었고 풀잎 끝에서는 차가운 냄새가 났다. 그는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솔잎의 쌉싸래한 향이 먼저 들어왔다. 그 아래에는 젖은 돌의 서늘함과 멀리 핀 산국의 얇은 단내가 겹쳐 있었다. 성운은 걸음을 멈췄다.

향을 맡는 것과 달랐다.

마치 냄새마다 제자리를 찾아 내 몸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았다. 너무 젖은 흙은 뿌리를 숨 막히게 하고 바람을 한 번 더 맞은 잎은 향을 조금 덜어 낸다는 사실이 생각이 아니라 감각으로 닿았다.

산길 아래 샘터에서 그는 두 손을 물에 담갔다.

물은 손 시릴 만큼 차가웠다. 그런데 차갑다는 감각 뒤로 가는 돌가루의 냄새와 이끼의 푸른 기운이 이어졌다. 물속에 오래 머문 금속 바가지에서는 비 냄새가 났다.

성운은 손바닥에 물을 받아 입술을 적셨다.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물은 얇고 맑았다. 혀를 찌르는 차가움이 지나간 자리에 아주 옅은 단맛이 남았다. 산에서 내려온 물이 품고 온 미네랄의 결이 혀끝에 닿는 듯했다.

성운은 숨을 삼켰다.

“이게….”

목소리가 갈라졌다. 그는 다시 물을 마셨다.

두 번째 모금에서는 첫 모금보다 더 많은 것이 느껴졌다. 물이 오래 고여 있지 않았다는 것, 어젯밤 비가 흙을 씻어 냈다는 것, 지금 이 물로 밥을 하면 쌀의 단맛을 밀어 올릴 수 있다는 것까지.

그는 바가지 가장자리를 세게 쥐었다.

기뻐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병원에서도 잠깐 나아진다며 기대하지 말라고 했었다. 다시 혀가 무감각해지면 그때는 더 견디기 어려울 터였다.

그런데 발걸음은 이미 장터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아침 장이 막 열리고 있었다. 트럭 짐칸에서 상추 상자가 내려왔고 할머니들은 비닐봉지에 나물을 나눠 담았다. 성운은 사람들 사이를 지나 쌀 포대 앞에서 멈췄다.

포대 위에 놓인 쌀 한 줌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성운은 허락을 구하고 쌀알 몇 개를 손바닥에 올렸다. 알은 짧고 통통했다. 표면은 단단해 보였지만 속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었다. 갓 도정한 쌀에서만 나는 풋풋한 향이 손가락 사이로 피어올랐다.

그는 저도 모르게 쌀알 하나를 깨물었다.

딱.

작은 소리와 함께 전분의 가루가 혀에 닿았다. 혀끝에는 미약하지만 분명한 단맛이 맺혔다. 성운의 눈이 크게 뜨였다.

“총각, 햅쌀이야.”

포대 뒤의 노인이 웃으며 말했다.

“이틀 전에 도정했어. 물 욕심내면 밥이 질어.”

성운은 쌀알을 내려다봤다. 노인의 말이 끝나기 전부터 알 수 있었다. 평소보다 물을 한 숟갈 덜 잡아야 했다. 서른 분만 불린 뒤 센 불로 끓이다가 불을 낮춰야 알이 터지지 않는다. 불을 끈 뒤에도 한참 기다리면 속의 수분이 고르게 퍼질 것이다.

누가 가르쳐 준 계산이 아니었다.

쌀이 자기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한 되만 주세요.”

노인은 쌀을 봉지에 담았다. 성운은 돈을 건네고 몇 걸음 옮겼다. 그때 푸른 줄기가 수북한 바구니가 보였다.

달래였다.

성운은 쪼그리고 앉았다. 줄기가 너무 굵은 것은 향이 거칠었다. 잎끝이 마르지 않고 뿌리에 흙이 얇게 붙은 것들은 매운 향 뒤에 단맛이 남아 있었다. 그는 그중 손가락 길이만 한 달래를 골라 들었다.

참기름을 많이 쓰면 달래의 향이 묻힌다. 간장은 차갑게 두고 달래는 먹기 직전에 섞는 편이 낫다.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성운은 손에 든 달래를 내려놓으려 했다. 자신이 틀릴 수도 있었다. 기분 탓일 수도 있었다. 이 감각을 믿고 밥을 지었다가 또 실패하면 어떡할까.

“달래장 해 먹으려고?”

나물 장수가 물었다.

성운은 고개를 들었다.

“네. 아마도요.”

“아마도는 뭐야. 이건 밥 있어야 제맛인데.”

투박한 말에 성운은 잠시 웃었다. 아주 짧은 웃음이었다.

“밥을 지어 보려고요.”

그는 달래도 한 단 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봉지는 자꾸만 손등을 쳤다. 쌀이 부딪히는 가벼운 소리와 달래의 알싸한 냄새가 걸음마다 따라왔다.

부엌 문턱 앞에서 그는 다시 멈췄다.

서울 주방의 열기가 손목을 잡아당겼다. 주문 표가 쌓이고 수셰프가 팬을 가져가던 장면이 떠올랐다. 성운은 한 번도 그날의 소스를 다시 맛보지 못했다.

그가 미각을 잃은 뒤 가장 먼저 버린 것은 혀의 감각이 아니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누군가에게 내놓을 자격이었다.

성운은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여기에는 손님도 주문 표도 없었다. 잘못되면 버리면 된다. 하지만 한 번도 불을 켜지 않으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

그는 가마솥 뚜껑을 열었다.

‘한 번만 하자.’

성운은 쌀을 넓은 바가지에 쏟았다. 첫 물은 재빨리 따라 버렸다. 쌀겨 냄새가 남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두 번만 부드럽게 훑었다. 맑아진 물 아래에서 쌀알은 작은 조약돌처럼 반짝였다.

그는 물기를 뺀 쌀을 잠시 그대로 두었다. 그 사이 달래의 뿌리 끝을 다듬고 찬물에 흔들어 씻었다. 칼날이 도마를 두드릴 때마다 푸른 향이 터졌다.

성운의 손은 망설이지 않았다.

간장에 다진 달래를 넣고 고춧가루는 아주 조금만 더했다. 참기름은 숟가락 반도 되지 않게 둘렀다. 깨를 손바닥에서 부숴 넣자 고소한 향이 달래의 날카로움을 감싸 안았다.

그는 솥에 불린 쌀과 샘물을 넣었다. 물높이는 손등이 아니라 쌀의 상태가 알려 준 만큼만 맞췄다.

성운이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마른 장작이 한 번 숨을 들이켰다가 붉은 불꽃을 밀어 올렸다. 불꽃은 솥 바닥을 핥고 작은 부엌의 차가운 공기를 데웠다.

성운은 그 앞에 앉았다.

솥 안에서 물이 끓기 시작했다. 뚜껑 가장자리로 흰 김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아직 밥은 아니었다. 맛을 말할 수도 없었다.

그래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다.

밥은 기다려 주는 사람에게 먼저 향을 준다는 말이, 오래전보다 또렷하게 돌아왔다.

성운은 솥뚜껑 위에 손을 올렸다.

이번에는 끝까지 기다려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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