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아포칼립스

7화: 진열대 사이의 웃음
어둠 속에서 울린 웃음은 사람이 낸 것이 맞았지만 사람의 숨에서 나올 수 없는 억양을 품고 있었다.
— 흣. 흐흐.
후두를 잘게 떨며 새어나오는 소리는 웃음보다 찢어진 후두를 억지로 비트는 마찰음에 가까웠다. 냉장 진열대의 모터 진동이 멎자 적재장 입구 너머의 미세한 음향들이 수평선처럼 뚜렷하게 드러났다.
젖은 발바닥이 타일을 문지르는 소리. 핏물이 반쯤 마른 옷자락이 매대 모서리를 스치는 마른 소리. 그리고 억눌린 웃음 사이로 불규칙하게 차오르는 침 들이키는 소리.
박두식이 맨 뒤에서 무전기를 쥔 손에 힘을 넣었다. 두꺼운 장갑 마찰음이 정적을 깼다.
“가까워.”
박두식이 낮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한결은 돌아보지 않은 채 뒤로 손을 뻗어 박두식의 무릎을 단단히 눌렀다.
“움직이지 마세요.”
한결이 입술만 움직여 조용히 말했다.
“소리를 들으려는 게 아닙니다. 소리에 섞인 다른 걸 보고 있어요.”
“뭐라고?”
“공기가 꺾이는 위치를 보는 겁니다.”
적재장 출입구 너머는 음료와 신선식품이 늘어선 대형 매장 구역이었다. 높이 솟은 진열대들이 기둥처럼 줄지어 있었고 바닥은 번들거리는 타일로 덮여 있었다. 벽이 많고 천장이 높은 매장 특성상 변이자의 발소리는 굴절되어 여러 방향에서 울렸다.
보이지 않는 눈 뒤로 한결의 감각이 빠르게 매장의 지도를 그렸다.
좌측 3미터 지점에는 캔 음료가 쌓인 철제 매대가 있다. 우측 5미터 지점에는 냉장 쇼케이스가 길게 이어져 있다. 변이자의 발소리가 타일에 부딪혀 튕기는 각도로 보아, 녀석은 적재장 입구 정면이 아니라 쇼케이스 사이의 넓은 통로에 서 있었다.
— 흐흐. 도현이... 도현이 어디 갔어...
변이자가 웅얼거렸다. 방재실 스피커와 문밖에서 들렸던 김도현의 목소리와 똑같은 음색이었다. 그러나 단어를 이어 붙이는 간격이 뒤틀려 있었고 문장 끝마다 억울함인지 광기인지 알 수 없는 웃음이 들러붙었다.
지우가 한결의 옷자락을 꼭 쥔 채 귀를 기울였다. 지우의 짧은 숨소리가 한결의 허리께에서 떨렸다.
“한결 아저씨.”
지우가 지극히 낮게 속삭였다.
“저 사람... 발을 절어요. 오른쪽 뒤꿈치가 바닥에 끌려요.”
“알아.”
한결이 고개를 끄덕였다.
“발자국 소리가 두 번씩 겹쳐 들리는 건 매대 철판에 반사돼서 그렇다. 실제 위치는 오른쪽 세 번째 진열대 앞이야.”
수아가 한결의 어깨 가까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가 있는 적재장에서 정문 통로로 나가려면 그 진열대를 지나야 해요. 서비스 통로는 지금 가로막혀 있어요.”
“카트는?”
“팔레트 수레에 생수 네 상자 올려뒀어요. 바퀴 비닐은 감았지만 아주 안 날 수는 없어요.”
한결은 손을 뻗어 팔레트 수레의 손잡이를 만졌다. 비닐 테이프로 두껍게 감아둔 바퀴는 손으로 살짝 밀었을 때 둔탁한 진동만 전해졌다. 합격이었다. 바닥에 잔돌이나 이물질만 밟지 않는다면 10미터 정도는 소음 없이 이동할 수 있었다.
문제는 사람들의 발소리였다.
한결 일행 뒤에는 박두식 외에도 방재실 통로에서 함께 빠져나온 생존자 두 명이 더 있었다. 그중 한 명인 30대 남성 민석은 굳은 자세로 서서 온몸을 떨고 있었다. 민석의 이빨이 부딪히는 소리가 아주 작게 달각거렸다.
“이쪽입니다.”
한결이 무음으로 손바닥을 두 번 두드렸다.
이동 신호였다.
수아가 선두에서 팔레트 수레 손잡이를 가볍게 잡았고 한결이 그 옆에서 바닥의 오물과 장애물을 발끝 촉각으로 먼저 훑었다. 지우는 한결의 허리띠를 잡은 채 정면이 아닌 측면의 소리에 집중했다. 민석과 박두식이 그 뒤를 바짝 밟았다.
타일 위를 지나가는 팔레트 수레는 묵직한 진동을 냈다.
— 슥. 슥.
변이자의 끌리는 발소리가 세 번째 진열대 너머에서 멈췄다. 녀석이 고개를 돌리는 기척이 들렸다. 공기의 흐름이 둔탁하게 바뀌었다. 녀석의 코맹맹이 호흡이 진열대 사이의 공극을 따라 이쪽으로 쏠렸다.
한결은 손을 올려 전원 정지 신호를 보냈다.
모두가 숨을 멈췄다.
진열대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의 침묵이 맞물렸다. 3미터도 되지 않는 거리였다. 눈을 감고 있어도 붉은 안개의 핏빛 기운이 공기 중에 달라붙어 피부를 찌릿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변이자가 혀를 낼름거리는 소리가 났다.
— 누구야... 거기 누구... 안 켜... Light...
녀석의 입에서 엉뚱한 영단어와 한국어가 섞여 나왔다. 사태가 터지기 전 마트 매장 직원이었거나 손님이었을 존재의 기억 조각들이 붉은 안개 오염 속에서 난도질당해 튀어나오는 모양새였다.
민석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민석의 손이 바지 주머니 속으로 들어가는 옷감 마찰음이 났다.
한결은 위화감을 느꼈다. 지우 역시 고개를 민석 쪽으로 돌렸다.
민석은 극도의 공포 속에서 현실을 부정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괴물의 목소리를 견디지 못하고 자신의 눈으로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에 휩싸인 것이다. 눈을 가린 천 너머로 무언가를 보고 싶다는 욕망, 혹은 손에 쥔 문명의 도구에 의지하고 싶다는 절박함.
민석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하지 마.”
한결이 낮게 경고하며 손을 뻗었지만 한발 늦었다.
민석의 손가락이 스마트폰 전원 버튼을 눌렀다.
띠리링.
짧은 기기 켜짐 알림음과 함께 스마트폰 화면의 밝은 빛이 터져 나왔다.
눈가리개 천 너머로도 붉고 아른거리는 화면의 잔광이 시신경을 찌르듯 붉게 번졌다. 스마트폰 화면에는 외부 안개의 붉은 반사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아아악!”
민석이 빛을 보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화면을 쳐다본 순간 그의 눈동자가 붉은 안개의 빛을 흡수했고 뇌를 짓누르는 충격에 휴대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 키아아아아악!
진열대 너머에 있던 변이자도 즉시 반응했다. 녀석은 소리와 빛의 반사를 동시에 감지하고 들짐승 같은 비명을 지르며 진열대를 들이받았다.
쾅!
철제 진열대가 크게 흔들리며 위에 얹혀 있던 음료 상자들이 바닥으로 쏟아졌다. 캔들이 타일 위를 사방으로 구르며 폭발적인 소음을 만들어냈다.
“뛰어!”
박두식이 소리쳤다.
“가만히 계세요!”
한결이 박두식의 목소리를 덮으며 외쳤다.
한결은 망설이지 않고 바닥으로 몸을 던졌다. 붉은 빛을 내뿜으며 굴러다니는 민석의 스마트폰 위로 자신이 입고 있던 두꺼운 비상 점퍼를 통째로 덮어버렸다.
빛이 순식간에 차단되었다.
하지만 변이자는 이미 빛이 시작된 통로를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젖은 발바닥이 타일을 차는 소리가 비정상적으로 빨랐다. 두 걸음, 세 걸음. 녀석의 억눌린 웃음이 광기 어린 비명으로 바뀌며 한결이 있는 위치로 들이닥쳤다.
“수아 씨, 팔레트 수레 오른쪽으로 밀어요!”
한결의 지시에 수아가 전력을 다해 팔레트 수레 손잡이를 오른쪽 통로 입구로 밀어 넣었다.
콰직!
돌진하던 변이자가 묵직한 생수 팔레트 수레의 측면에 그대로 충돌했다. 수백 킬로그램의 물 무게를 견디지 못한 변이자의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녀석은 비명을 지르며 생수 상자 너머로 넘어져 옆 진열대를 덮쳤다.
두 번째 진열대가 무너지면서 대량의 유리병 음료들이 깨졌다. 챙그랑거리는 소리와 함께 달콤한 과즙 냄새와 핏비린내가 섞여 공기 중에 진동했다.
“지우 잡아요!”
한결이 바닥에서 민석의 겉옷과 스마트폰을 점퍼로 꽁꽁 싸매 쥔 채 일어나 지우의 손을 낚아챘다.
민석은 바닥에 엎드린 채 눈가리개를 부들부들 떨며 비명을 참고 있었다. 박두식이 민석의 뒷덜미를 거칠게 낚아채 일으켜 세웠다.
“이 미친 새끼가 모두를 죽일 뻔했어!”
박두식의 굵은 목소리가 터져 나오려 하자 한결이 박두식의 턱 밑을 손바닥으로 밀어 올렸다.
“소리 내지 마십시오. 아직 안 끝났습니다.”
깨진 유리병과 쏟아진 캔 음료 사이에서 변이자가 꿈틀거렸다. 녀석은 다리가 부러졌음에도 상체만으로 바닥을 긁으며 젖은 웃음을 흘렸다.
— 흐흐... 켜줘... 빛... 다시...
녀석의 손톱이 유리 조각을 긁는 소리가 귓전을 찔렀다. 그러나 변이자는 시각적 광원이 사라지고 주변에 수십 개의 캔이 구르는 소음이 사방에서 진동하자 방향 감각을 완전히 잃었다. 녀석은 한결 일행이 있는 쪽이 아니라 캔이 구르는 반대편 매대 쪽을 향해 기어가기 시작했다.
“지금 빠져나갑니다.”
한결이 수아와 박두식에게 신호했다.
수아는 쓰러진 변이자에게 걸리지 않은 수레의 앞쪽 끈을 잡아채 정문 연결 통로 방향으로 끌었다. 박두식은 민석의 입을 손바닥으로 막은 채 뒤를 따라 뛰듯이 걸었다.
일행은 음료 코너의 붉은 난장판을 뒤로하고 서비스 통로 끝의 철제 방화문 너머로 몸을 밀어 넣었다.
쿵!
수아가 방화문을 닫고 비상 레버를 내렸다. 둔탁한 금속음과 함께 음료 코너의 비명과 유리 깨지는 소리가 단절되었다.
통로 안은 서늘하고 어두웠다. 환풍구를 통해 들어오는 외부의 미세한 공기 흐름만이 일행의 거친 숨소리를 씻어내고 있었다.
민석이 방화문 바닥에 주저앉아 헐떡였다.
“죄, 죄송합니다... 너무 무서워서... 밖이 어떻게 됐는지... 화면만... 화면만 확인하려고...”
박두식이 민석의 멱살을 잡고 벽으로 밀어붙였다.
“너 때문에 수레 하나 버릴 뻔했어. 손가락을 부러뜨려 놔야 정신을 차리겠나?”
“그만하세요.”
한결이 둘 사이를 갈라섰다. 한결의 손에는 아직도 점퍼로 싸맨 민석의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스마트폰 화면은 붉은 안개의 빛을 그대로 반사합니다. 직접 안개를 보지 않아도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 변이가 시작될 수 있어요. 민석 씨, 눈은 괜찮습니까?”
민석이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눈가리개 천을 만졌다.
“눈이... 눈 안쪽이 뜨거워요. 붉은 선 같은 게 잔상으로 남아 있어요...”
윤미라 간호사가 곁에 있었다면 상태를 진단했겠지만 지금은 정문 보조 셔터를 막는 것이 우선이었다.
지우가 통로 벽에 귀를 대고 있다가 얼굴을 하얗게 질린 채 한결을 바라보았다.
“한결 아저씨.”
“왜 그러니, 지우야?”
“방화문 너머 소리가 아니에요. 정문 셔터 쪽이에요.”
지우가 가리킨 방향은 일행이 생수 수레를 끌고 가려던 정문 보조 셔터 연결부였다.
한결도 귀를 기울였다.
정문 보조 셔터 쪽에서 들리는 소리는 단순한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 쿠우우웅... 쿠웅...
무언가 육중하고 거대한 무게를 가진 존재가 완전히 닫히지 않은 보조 셔터의 하단 틈새를 밖에서 강제로 밀어 올리려는 둔탁한 충격음이었다. 그리고 그 틈새를 통해 찌르는 듯한 붉은 안개의 비린 냄새가 통로 안쪽으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