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인드 아포칼립스

6화: 소리 없는 음료 코너
방재실 문밖에서 두드림이 다시 울렸다.
— 톡. 톡. 톡.
한 박자 뒤.
— 톡.
스피커 속 김도현의 목소리가 그 박자를 삼키듯 말했다.
“팀장님. 문만 열어 주세요.”
박두식이 문으로 한 걸음 나갔다. 한결은 그의 팔꿈치를 붙잡았다.
“그대로 계세요.”
“도현 목소리야.”
“목소리만으로는 아닙니다.”
한결은 문 아래의 틈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피 냄새는 전보다 옅었다. 대신 젖은 고무가 바닥을 문지르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가 문 바로 앞에서 체중을 옮기고 있었다.
“도현 씨.”
그가 불렀다.
“야간 근무 때 쓰는 비상키는 몇 번함에 있습니까?”
문밖이 조용해졌다.
박두식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걸 왜 지금 물어.”
한결은 손을 들었다. 수아가 옆에서 움직이는 기척을 멈췄다.
스피커가 먼저 치직거렸다.
“세 번째요.”
문밖의 목소리가 뒤늦게 따라왔다.
“세 번째 함이요.”
수아가 아주 작게 말했다.
“비상키는 다섯 번째예요. 번호도 빨간 스티커로 가려져 있고요.”
문밖에서 손톱이 철판을 길게 긁었다. 스피커가 한 번 더 치직거렸다. 이번에는 김도현의 목소리가 아니라 낮은 웃음이 섞였다.
박두식의 손이 문 손잡이에서 떨어졌다.
“도현아.”
그가 낮게 불렀다.
대답은 없었다.
박두식의 숨이 문 쪽으로 쏠렸다. 당장이라도 손잡이를 다시 잡을 사람의 숨이었다. 한결은 손을 놓지 않았다.
도현이 정말 문밖에 있었는지 모른다. 틀린 대답 하나가 그 사람의 죽음을 증명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문을 열면 안쪽의 사람들까지 같은 확인 불가능한 곳으로 밀어 넣게 된다.
“송출 끌 수 있습니까?”
한결이 수아에게 물었다.
“중계기 전원하고 외부 방송 스위치가 따로 있어요.”
“둘 다 끄세요. 화면은 건드리지 말고요.”
박두식이 고개를 들었다.
“밖에 살아 있는 사람이 방송을 듣고 있을 수도 있어.”
“지금 방송은 사람을 부르는 쪽입니다.”
한결의 말이 끝나자 문밖에서 두드림이 빨라졌다. 호출음의 리듬은 무너지고 손바닥이 철판을 치는 소리만 남았다.
수아가 벽면을 더듬었다. 스위치 덮개가 열리는 플라스틱 소리가 났다.
“외부 송출부터 끌게요.”
“수아 언니.”
지우가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불 끄는 건 아니지?”
“아니야. 소리만 끄는 거야.”
수아의 대답은 짧았지만 손끝은 떨리지 않았다.
딸깍.
스피커의 잡음이 사라졌다. 문밖의 손바닥도 멎었다.
정적은 안심이 아니었다. 한결은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문이 더 멀게 느껴졌다. 철판 너머의 존재가 떠난 것인지 귀를 문에 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수아가 다시 스위치를 만졌다.
“중계기 전원도 뺄게요.”
플러그가 빠지는 마른 소리 뒤 방재실 안의 전자음이 하나 줄었다. 천장 스피커는 완전히 죽었다.
한결은 제어반으로 돌아갔다. 손바닥에 낮은 진동이 닿았다. 정문 보조 셔터 버튼을 눌렀을 때 들린 불규칙한 마찰음이 아직 귓속에 남아 있었다.
“정문은 그냥 두면 안 됩니다.”
수아가 말했다.
“안쪽에서 눌러 막을 만한 게 있어요?”
“음료 코너 뒤에 생수 팔레트가 있어요. 포장 랩이랑 낮은 운반 카트도 있고요.”
“그걸 셔터 앞까지 옮기면?”
“틈 아래를 눌러 둘 수는 있어요. 완전히 막진 못해도 바람이나 사람이 밀고 들어오는 건 늦출 수 있어요.”
박두식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 물건을 가져오려면 방재실을 나가야 한다.”
“맞습니다.”
한결은 담요로 덮인 모니터 쪽을 등졌다.
“그래도 셔터가 걸린 채로 기다리는 것보다 낫습니다. 틈이 있으면 밖의 소리도 냄새도 계속 들어옵니다.”
박두식은 한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문 쪽으로 향했던 몸을 천천히 돌렸다.
“도현을 확인할 방법은?”
“지금은 없습니다.”
한결은 숨기지 않았다.
“문을 열 방법도 없습니다.”
잠깐 뒤 박두식이 낮게 말했다.
“물건부터 가져온다. 대신 한 사람도 흩어지지 마.”
그 말은 허락처럼 들리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에게 하는 명령이었다. 그래도 그는 더는 문을 열자고 하지 않았다.
수아는 제어반 아래에 꽂힌 종이철을 꺼냈다. 종이 가장자리를 넘기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물류 배치표예요. 인쇄가 올라온 부분이 있어서 구역마다 구분돼요.”
그녀는 손끝으로 종이를 천천히 훑었다.
“음료 코너 뒤 서비스 통로로 가면 돼요. 자동문 하나만 지나면 팔레트가 있는 적재장으로 이어져요. 운반 카트는 왼쪽 벽. 랩은 생수 위쪽 걸이에 있을 거예요.”
한결이 생존자들이 있는 문가를 향해 말했다.
“앞사람 옷자락을 잡고 벽에서 손 떼지 마세요. 누가 넘어지면 소리 내지 말고 제 손등을 두 번 누르세요. 수아 씨는 앞에서 방향을 말하고 팀장님은 맨 뒤를 맡아 주세요.”
“저는요?”
지우가 물었다.
한결은 아이가 잡고 있는 소매를 한번 눌렀다.
“팬 소리 말고 다른 소리가 나면 말해 줘. 발이 끌리는 소리나 숨소리도.”
“저는 잘 못 볼 수도 있어요.”
“보는 일은 아무도 안 해.”
한결이 말했다.
“듣는 일만 하면 돼.”
방재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전실은 고요했다. 한결은 열린 문보다 먼저 공기의 방향을 읽었다. 피 냄새는 남아 있었지만 숨 쉬는 소리는 없었다.
수아가 먼저 나갔다. 그녀의 손이 벽을 더듬는 소리가 아주 작게 이어졌다. 한결 뒤로 사람들의 옷감이 스쳤다. 마지막에는 박두식의 단단한 구두창이 바닥을 눌렀다.
“왼쪽 끝까지 열두 걸음.”
수아가 숨으로 말했다.
“거기서 오른쪽이에요.”
환기팬이 천장에서 일정하게 울었다. 우우웅 하는 소리가 통로를 꽉 채웠다. 한결은 그 진동이 벽과 바닥으로 번지는 결을 느끼며 걸었다.
여섯 걸음째에 박두식의 구두가 바닥을 스쳤다.
한결이 손을 내렸다. 모두가 멈췄다.
“왜요?”
박두식이 속삭였다.
지우가 한결의 소매를 세 번 눌렀다.
“팬 사이에 발소리 있어요.”
한결은 귀를 기울였다. 팬이 한 번 돌 때마다 낮은 진동이 바닥으로 퍼졌다. 그 사이에 젖은 발 하나가 천천히 바닥을 밟고 있었다. 일정한 기계음에 맞추려는 듯 늦게 따라오는 발이었다.
수아가 속삭였다.
“오른쪽 적재함 쪽이에요.”
한결은 벽 아래에서 빈 플라스틱 상자를 찾았다. 손끝에 얇은 모서리가 닿았다. 그는 상자를 통로 반대편으로 굴렸다.
상자가 벽에 부딪혔다.
— 드르륵. 탁.
젖은 발소리가 그쪽으로 튀었다. 팬 소리 아래에서 빠른 숨이 멀어졌다.
“지금.”
한결이 말했다.
수아의 안내에 따라 일행이 자동문을 지났다. 문은 전원이 남아 있는지 낮게 열렸다 닫혔다. 그 소리가 끝나기 전에 모두가 음료 코너 후면의 적재장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종이 상자와 비닐 냄새가 코를 찔렀다. 수아가 낮게 말했다.
“오른쪽에 생수 팔레트 있어요. 랩은 그 위에 걸려 있고 카트는 왼쪽 벽에 붙어 있어요.”
한결은 손으로 비닐 포장과 단단한 병뚜껑들을 확인했다. 물건은 있었다. 팔레트의 모서리는 허리 높이까지 올라와 있었다. 이것을 정문까지 옮기는 일은 몇 사람이 버티는 일보다 더 오래 걸릴 것이다.
수아가 랩 끝을 찾으려 손을 올렸다. 한결은 그녀의 손목을 막았다.
“지금은 뜯지 마세요. 소리가 납니다.”
“카트만 빼면 돼요.”
“카트 바퀴도 확인하고요.”
한결은 팔레트 아래쪽을 더듬었다. 거친 나무 결 사이로 먼지가 손에 묻었다. 바퀴가 달린 낮은 카트는 팔레트 옆에 바짝 붙어 있었다. 밀어 넣을 때 금속이 부딪히지 않게 하려면 누군가가 앞쪽을 들어야 했다.
“생수는 한 번에 다 못 옮깁니다.”
그가 말했다.
“카트 하나에 두 묶음씩 올려요. 앞에서 수아 씨가 길을 잡고 저는 바퀴 소리를 듣겠습니다. 팀장님은 뒤에서 카트가 벽에 닿기 전에 멈춰 주세요.”
박두식은 대답 대신 카트의 손잡이를 만졌다. 두꺼운 손이 금속을 감싸자 아주 작은 삐걱임이 났다. 그는 곧 손을 뗐다.
“바퀴 하나가 굳었어.”
“기름칠할 건 없고요.”
수아가 속삭였다.
“비닐 조각을 감으면 조금 덜 울릴 수 있어요.”
“랩은 마지막입니다.”
한결은 다시 말했다.
“여기서 뜯으면 코너 전체에 들려요. 돌아갈 길을 먼저 비워야 합니다.”
지우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물은 그냥 두고 가요?”
“아니. 위치를 알았으니 이제 가져올 방법을 고르는 거야.”
한결은 아이의 손이 떨리지 않도록 자기 소매를 한 번 눌렀다.
“급할수록 소리부터 줄여야 해.”
그 말이 끝나도 아무도 곧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비닐 포장 너머의 물은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웠다. 그러나 가까운 물건일수록 소리 없이 가져가는 법을 먼저 찾아야 했다.
박두식이 맨 뒤에서 낮게 말했다.
“빨리 해. 여기 오래 있으면 안 된다.”
그 순간 냉장 진열대 모터가 가까운 곳에서 울었다.
우우웅.
음료 코너 안쪽이었다.
지우의 손이 한결의 팔에 박혔다.
“저건 팬 소리 아니에요.”
한결은 몸을 낮췄다. 모터는 일정한 진동을 내다가 갑자기 멎었다.
적재장 바깥에서 젖은 발바닥이 타일 위를 한번 밟았다.
그리고 어둠 속에서 누군가가 아주 낮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