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이 마수, 말로 합시다!

4화: F급 행정관의 퇴사표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위치한 헌터 관리국 중앙 청사 4층 감사실.
창문 하나 없는 방 안은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눅눅한 서류 뭉치 냄새로 가득 차 있었다. 긴 회의 탁자 상석에는 감사팀장 곽상철이 팔짱을 낀 채 진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제17 임시 게이트 현장에서 박도식 반장이 송고한 긴급 보고서가 출력되어 놓여 있었다.
"유진우 행정관."
곽상철이 손가락으로 보고서의 한 줄을 딱딱 짚었다.
"자네가 현장에서 C급 마수와 대화를 나눠 폭주를 막았다. 그리고 마수가 친히 알을 보호해 줘서 고맙다고 마력 결정을 선물로 건넸다. 내가 지금 읽은 게 맞나?"
"네. 보고서에 적힌 그대로입니다."
진우는 정면을 바라보며 담담하게 응수했다.
곽상철은 기가 차다는 듯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으며 서류를 책상 위로 툭 내던졌다.
"미쳤군. F급 행정관 따위가 현장 서류 작성이나 부산물 수거는 안 하고 몬스터 앞에서 헛소리를 중얼거렸다는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건가?"
"박도식 반장님과 현장 요원들이 직접 목격한 사실입니다. 실제로 그루…… 해당 마수는 통역 내용을 확인한 뒤 공격을 멈추고 자발적으로 이송 차량에 올랐습니다."
"그루?"
곽상철의 눈매가 나선형으로 찌그러졌다.
"몬스터한테 이름까지 붙여 줬어? 아주 귀여운 반려동물 하나 키우신 줄 알겠어."
그가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탁자 위의 찻잔이 덜컹거리며 흔들렸다.
"정신 차려, 유진우! 몬스터는 인류의 적이다! 본능에 따라 인간을 고깃덩어리로 만드는 파괴 병기란 말이다! 그런데 기절했다 일어난 놈이 몬스터와 대화를 했다니? 게이트 폭발로 머리라도 어떻게 된 것 아닌가?"
진우는 눈을 감지 않았다.
수년 동안 관리국 하급 행정관으로 일하며 수도 없이 들어 온 고함이었다. 현장에서 헌터들이 흙발로 서류를 밟아 뭉개도, 상급자가 책임을 미루며 비상근무를 몰아줘도 참아야 했던 언사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우의 손끝에는 그루의 따뜻한 숨결이 새겨진 푸른 결정이 쥐여 있었다.
"감사팀장님."
진우가 나지막하게 입을 열었다.
"그루가 폭주했던 건 침략 의도 때문이 아니라 발바닥에 박힌 30센티미터 크기의 마력 파편과 깨지기 직전인 막내 알 때문이었습니다. 통증을 제거하고 알의 안전을 보장하자 공격성을 거두었습니다. 이건 환각이 아니라 현장에서 입증된 생태적 사실입니다."
"입증은 무슨 놈의 입증!"
곽상철이 손을 뻗어 진우의 주머니 부근을 가리켰다.
"네놈이 들고 온 그 푸른 결정이나 당장 내놔. 현장에서 발생한 마력 부산물은 예외 없이 관리국 자산으로 귀속된다. 협력 길드인 태산 길드에서도 공식 소유권을 주장하고 있어. F급 짐꾼 주제에 전리품을 사적으로 횡령하려 들다니 당장 징계 위원회에 넘겨야 정신을 차리겠나?"
곽상철은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진우의 손으로 손을 뻗었다.
진우는 피하지 않았다. 대신 주머니 속에 있던 푸른 결정을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탁자에 놓인 결정은 맑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박도식 반장이 적은 보고서에도 '마수가 직접 행정관에게 내어준 물품'으로 명시되어 있는 결정이었다.
"어디 보자."
곽상철이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결정을 낚아채듯 쥐었다.
그 순간이었다.
화르륵!
곽상철의 손이 결정에 닿자마자 맑던 푸른빛이 새빨간 거부 반응을 일으키며 불타올랐다.
"어억?!"
비명과 함께 곽상철이 결정을 놓쳤다. 붉은 마력 진동이 튕겨 나오며 곽상철의 손바닥에 튀었고 그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손바닥에는 마치 불에 덴 듯한 붉은 반점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탁자 위로 떨어진 결정은 데굴데굴 굴러 진우의 손끝에 닿았다. 그러자 언제 그랬냐는 듯 붉은 빛이 꺼지고 그루의 온화한 숨결과 같은 연푸른빛이 잔잔하게 감돌기 시작했다.
곽상철이 화끈거리는 손을 쥐어짜며 이빨을 갈았다.
"이, 이건 무슨 속임수냐! 결정에 무슨 주술이라도 걸어 둔 거냐?"
"속임수가 아닙니다."
진우가 결정을 거두어 주머니에 넣으며 곽상철을 정면으로 노려보았다.
"그루가 이 결정을 내주며 했던 말이 있습니다. 길표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냄새와 신뢰를 담아 내어준 표식입니다. 강제로 빼앗으려 들면 마력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헛소리 마!"
"태산 길드나 관리국이 이 결정을 강탈하고 그루를 강제로 철창에 가두려 한다면 방진포 위에서 겨우 숨을 쉬고 있는 막내 알이 파괴될 겁니다. 그러면 그루는 C급이 아니라 B급 이상의 대형 폭주 마수로 변해 관리국 이송 차량을 통째로 짓밟을 겁니다."
진우는 조목조목 짚어나갔다.
"그때 발생하는 인명 피해와 도심 파괴 비용 그리고 현장 안전 수칙을 무시하고 강제 포획을 지시한 감사팀장님의 법적 책임은 무슨 수로 감당하시겠습니까?"
"너…… 너 지금 감히 상급자에게 협박을 하는 건가?"
곽상철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진우의 말에는 거짓이 없었다. 현장 보고서에 적힌 박도식의 서명과 구체적인 마수 이송 조건은 진우의 말이 단순한 공상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곽상철은 자신의 치부와 책임 추궁이 두려워지자 더욱 거세게 고함을 쳤다.
"좋다! 유진우 행정관! 상급자 공갈 협박에 현장 권한 남용 그리고 마력 부산물 무단 소지 죄목을 추가하겠다! 오늘부로 자네의 현장 행정관 자격을 정지한다. 지방 던전 폐기물 처리장으로 발령을 낼 테니 그리 알아라!"
방 안을 채우는 곽상철의 고함 소리에도 진우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우는 가슴 안주머니로 손을 넣었다.
그곳에는 3년 전 헌터 관리국에 F급 행정관으로 입사한 이래 언제나 가슴 한구석에 품고 다녔던 흰 봉투 하나가 들어 있었다.
진우는 봉투를 꺼내 곽상철의 책상 한가운데에 조용히 올려놓았다.
봉투 겉면에는 선명한 글씨가 적혀 있었다.
[사 직 서]
곽상철의 눈이 찌그러졌다.
"이게 무슨 짓인가?"
"발령 내실 필요 없습니다. 오늘부로 헌터 관리국을 그만둡니다."
"뭐라?"
곽상철이 기가 막히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F급 주제에 이 안정적인 공무원 자리를 제 발로 차고 나가겠다고? 나가서 뭘 어쩔 건가? 헌터 등급도 없는 놈이 던전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할 수 있다고!"
진우는 목에 걸려 있던 헌터 관리국 행정관 출입증을 벗었다. 그리고 사직서 위에 차갑게 내려놓았다.
플라스틱 출입증이 사직서 위에서 짤깍 소리를 냈을 때 진우의 가슴속을 누르고 있던 3년 동안의 묵은 답답함이 거짓말처럼 씻겨 나갔다.
"내 혀와 통역은 관리국의 서류 양식이나 부산물 비품이 아닙니다."
진우가 곽상철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말했다.
"마수는 말할 줄 모르고 인간은 들을 줄 몰라서 벌어지는 이 피비린내 나는 현장에서 저는 제 방식대로 일하겠습니다. 관리국이 칼과 쇠사슬만 휘두르는 동안 저는 대화로 사건을 끝낼 겁니다."
"이, 미친 놈이……!"
곽상철이 소리를 지르며 책상을 쳤지만 진우는 이미 뒤를 돌아 감사실 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문고리를 잡은 진우가 멈춰 서서 마지막으로 덧붙였다.
"그루의 이송 과정에서 알이 깨지거나 마수가 폭주하면 전적으로 곽상철 감사팀장님과 태산 길드의 책임임을 언론에 그대로 증언할 겁니다. 박도식 반장님의 일지와 제 기록이 증거로 남아 있으니까요."
쿵!
진우는 문을 닫고 감사실을 나왔다. 뒤편에서 곽상철이 물건을 던지며 고함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진우는 단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복도를 걸어 나오는 동안 창문 너머로 오후의 붉은 햇살이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사무실에 들러 인사를 건넬 동료도 없었다. 잡무 서류가 쌓인 책상에 가방 하나만 챙겨 나온 진우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일주일 뒤.
서울특별시 은평구 외곽의 낡은 4층 상가 건물.
지하철역에서도 15분을 걸어야 하는 한적한 골목길 2층에 조그마한 사무실 하나가 문을 열었다.
엘리베이터도 없어 계단을 걸어 올라가야 하는 낡은 2층 복도 끝, 페인트가 살짝 벗겨진 철문 옆에 새 아크릴 현판이 깔끔하게 걸려 있었다.
[유진우 마수 전문 통역 사무소]
방 안은 10평 남짓한 소형 공간이었다.
진우는 3년 동안 모은 통장에 든 적금 푼돈과 얼마 되지 않는 퇴직금을 끌어모아 이 작은 사무실의 보증금과 월세를 마련했다.
가구라고는 중고 가구 상점에서 사 온 목재 책상 하나와 의자 두 개 그리고 소파가 전부였다.
책상 위에는 진우가 현장 필수품으로 챙겨 온 특수 확성기와 소형 마이크 그리고 낡은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는 온화한 푸른 빛을 잔잔하게 내뿜는 그루의 길표 결정이 조용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진우는 창문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들며 가평과 서울 경계 지역의 푸른 하늘이 내다보였다.
"후우……."
진우는 깊은 숨을 내쉬며 책상 앞 의자에 앉았다.
퇴직금과 적금을 모조리 쏟아부었기에 통장 잔고는 이제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마수 전문 통역사라는 자격증도 전례도 없는 세상에서 독립한다는 것은 사실 무모함에 가까운 도전이었다.
그러나 진우의 마음속에는 두려움보다 묘한 확신과 고요한 열정이 차올라 있었다.
그루와의 대화는 우연이 아니었다. 인간들이 무작정 칼을 휘두르고 헌터들이 스킬을 쏟아붓는 동안 마수들은 자신들의 터전과 새끼 그리고 고통을 알아달라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신이었다.
기회는 스스로 만들어야 했다.
진우는 노트북을 켜고 유진우 마수 전문 통역 사무소의 공식 웹사이트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소통 불능으로 고통받는 헌터팀과 관공서를 향한 안내 문구를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마수의 포효는 무분별한 적의가 아닙니다.]
[피비린내 나는 레이드 전에 마수의 진짜 사정을 듣고 안전하게 사건을 해결해 드립니다.]
[유진우 마수 전문 통역 사무소 - 동시통역 및 현장 중재]
글을 마치고 저장 버튼을 누르는 순간이었다.
우웅.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그루의 길표 푸른 결정이 온화한 빛을 한번 크게 반짝였다. 거의 동시에 책상 한구석에 놓인 진우의 개인 휴대폰 화면이 환하게 켜지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 번호는 저장되지 않은 일반 번호였다.
진우는 숨을 한 번 가다듬고 휴대폰을 들었다.
"네, 유진우 마수 전문 통역 사무소입니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몹시 당황하고 긴박한 사내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저, 저기요! 거기 마수랑 대화가 가능한 곳 맞습니까? 저희 B급 헌터팀인데요 지금 가평 게이트 외곽에서 포획하려던 아기 그리폰이 막 울부짖는데 도무지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진우의 입꼬리가 천천히 호를 그렸다.
자유를 얻은 F급 행정관 유진우의 진짜 직업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