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미술품의 잠재 가치가 보인다

시놉시스
믿었던 직속 상사의 모함으로 업계에서 쫓겨난 하급 감정사 서진우.
교통사고 후 그의 눈에는 미술품의 진위와 현재 시세와 숨겨진 잠재 가치가 숫자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위작 카르텔이 숨긴 진품과 아무도 알아보지 못한 저평가 작품들.
진우는 그 숫자를 현실의 증거로 바꾸며 미술계의 판을 뒤집기 시작한다.
1화: 감정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한국미술감정원 지하 감정실은 늘 추웠다.
작품 보존을 위한 온도라는 설명은 그럴듯했지만 서진우는 그 냉기가 사람까지 박제하려 든다고 생각했다.
웃음도 실수도 없는 방.
오직 흰 장갑과 루페와 숫자만 허락된 방.
그날 테이블 위에는 보험가액 칠십억 원짜리 한국 근현대 회화가 올라와 있었다.
제목은 <겨울 들판>.
두꺼운 유화층 아래로 먹선이 비쳐 보이는 독특한 화풍 때문에 시장에서 가장 뜨거운 작가의 대표작 후보로 불리던 작품이었다.
더 중요한 이름은 따로 있었다.
윤성철.
대한민국 미술 감정 협회 이사장이자 한국미술감정원의 얼굴. 그가 직접 진품 보증 의견을 낸 작품이었다.
진우는 루페를 눈에 붙였다.
캔버스 가장자리의 마모가 이상했다. 오래된 틀에 다시 씌운 흔적이 있었다. 화면 중앙의 크라클뤼르는 자연스럽게 갈라진 것이 아니라 열풍으로 억지로 만든 균열에 가까웠다.
자외선 램프 아래에서 밑칠층이 푸르스름하게 떠올랐다.
진우는 모니터의 분광 분석 그래프를 확대했다.
작은 피크 하나.
사소해 보였지만 그 피크가 작품의 나이를 배신하고 있었다.
"선배님. 이건 정밀 재검 들어가야 합니다."
박태준 선임연구원은 커피 뚜껑을 닫으며 눈썹만 올렸다.
"또 뭐가 걸리는데."
"아연백 비율이 맞지 않습니다. 작가가 해당 시기에 쓰던 배합과 다릅니다. 밑칠층에서 합성수지 흔적도 나왔고요."
"그래서?"
"최소한 진품 단정은 못 합니다. 보존 처리 과정에서 들어간 물질인지 후대 제작 흔적인지 분리해야 합니다."
박태준은 그래프를 한 번 보고 웃었다.
"서진우. 네가 지금 누구 의견에 흠집 내는지 알아?"
"의견에 흠집을 내는 게 아닙니다. 작품에 이미 흠집이 있습니다."
감정실 공기가 더 차가워졌다.
박태준은 진우의 어깨 너머로 보고서 초안을 훑었다.
"최종 의견은 진품. 보존 상태 일부 의심. 그렇게 정리해."
"그건 감정이 아닙니다."
"하급 연구원이 이사장 보증을 뒤집는 건 감정이고?"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원본 분석 데이터를 외장 저장 장치에 백업하려 했다.
그 순간 화면이 검게 꺼졌다.
접근 권한이 해제되었다는 붉은 문구가 떠올랐다.
진우가 마우스를 다시 움직였지만 폴더는 열리지 않았다. 장비 로그도 사라졌다.
박태준이 낮게 말했다.
"보고서는 이미 올라갔어. 네 이름으로."
다음 날 오전 기자 브리핑장은 지하 감정실보다 환했다.
환한 조명 아래서 거짓말은 더 깨끗해 보였다.
윤성철 이사장은 백발이 단정한 노신사처럼 단상에 섰다.
"젊은 연구원의 일탈이 있었습니다. 감정원은 내부 검증 과정에서 오류를 발견했고 책임 있게 조치할 것입니다."
스크린에는 진우의 사원증 사진이 떠 있었다.
진우는 객석 뒤쪽에 서 있었다. 손가락이 차갑게 굳었다.
"제가 조작했다는 근거가 뭡니까."
기자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윤성철은 놀란 척도 하지 않았다.
"서 연구원. 지금은 절차를 따르세요."
"원본 로그를 공개하십시오. 분석 장비 접속 기록과 보고서 수정 시간을 공개하면 됩니다."
박태준이 단상 옆에서 마이크를 잡았다.
"네가 삭제했잖아."
짧은 한마디였다.
그러나 기자들에게는 충분했다.
카메라 셔터가 빗소리처럼 쏟아졌다. 누군가 벌써 질문을 던졌다.
"서 연구원님. 개인적으로 작품 소유주와 접촉했다는 의혹이 사실입니까?"
"위작 판정을 빌미로 금품을 요구했다는 제보도 있습니다."
진우는 대답하려 했지만 마이크가 꺼졌다.
윤성철은 부드러운 얼굴로 다시 입을 열었다.
"감정표는 시장의 신뢰입니다. 그 신뢰를 훼손한 사람에게 관용을 베풀 수는 없습니다."
진우의 목 안쪽에서 피 맛이 났다.
그가 믿고 있던 문장이 남의 입에서 칼처럼 돌아왔다.
감정표는 거짓말하지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건 감정표를 쥔 인간이었다.
브리핑이 끝나기도 전에 제명 통보서가 휴대폰으로 도착했다.
한국미술감정원 계약 해지.
감정 협회 등록 자격 정지.
손해배상 청구 예정.
곧이어 부친의 병원에서 온 문자도 떴다.
미납 치료비 납부 요청.
진우는 감정원 로비에서 오래 서 있었다.
어제까지 그가 쓰던 책상은 이미 비워져 있었다. 삼 년 동안 쌓아 둔 자료와 논문 복사본은 폐기 봉투에 들어갔다고 했다.
경비실에는 종이 상자 하나만 남아 있었다.
낡은 루페.
손때가 탄 감정 장갑.
그리고 현장에서 적어 온 노트 두 권.
박태준이 로비 끝에서 다가왔다.
"억울한 척하지 마. 네가 사인한 보고서야."
"제가 사인한 보고서는 사라졌겠죠."
"그러니까 하급은 하급답게 살아야지. 큰 판에서 정의 같은 거 들고 뛰면 밟혀."
진우는 상자를 들었다.
"선배님은 밟는 쪽이라 오래 사실 겁니다."
박태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진우는 더 듣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택시를 잡을 돈도 아까웠다. 통장 잔액은 병원비 자동이체가 빠져나가면 끝이었다.
그는 상자를 품에 안고 병원 쪽으로 걸었다.
횡단보도 앞 전광판에서 뉴스 자막이 흘렀다.
한국미술감정원 연구원 감정 조작 파문.
화면 아래로 자신의 이름 석 자가 지나갔다.
서진우.
그 이름이 이미 남의 것처럼 낯설었다.
신호가 바뀌었다.
그가 발을 내딛는 순간 미끄러운 도로 위로 화물차가 휘청였다.
경적이 터졌다.
상자가 먼저 날아갔다.
루페가 젖은 아스팔트 위에서 한 번 튀었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손끝이 차가운 유리에 닿은 순간 세상이 뒤집혔다.
어둠 속에서 조명 같은 것이 깜빡였다.
감정실의 모니터도 아니고 브리핑장의 카메라도 아니었다.
푸른 선.
푸른 숫자.
그리고 누군가 낮게 속삭이는 것 같은 문장.
눈을 떴을 때 처음 보인 것은 흰 천장이었다.
소독약 냄새.
심전도 소리.
왼쪽 눈 안쪽이 타는 듯 아팠다.
"환자분. 정신 드세요?"
간호사가 손전등을 비추었다.
진우는 눈을 찡그렸다.
빛 사이로 푸른 글자가 흔들렸다.
[대상: 합성수지 프레임 액자]
[진위 여부: 공산품]
[현재 시세: 12,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12,000원]
진우는 숨을 멈췄다.
간호사가 놀라 몸을 숙였다.
"어지러우세요?"
"저 액자..."
"액자요?"
병실 벽에 걸린 싸구려 풍경화였다.
대량 인쇄된 산 그림.
병원 복도마다 하나씩 걸려 있을 법한 장식품이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푸른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돌렸다.
간호사의 가슴팍에 작은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은색 꽃잎 세 장이 닳아 있었고 중앙의 유리알은 반쯤 금이 가 있었다.
초점이 닿자 다시 글자가 떠올랐다.
[대상: 은제 칠보 브로치]
[진위 여부: 진품]
[현재 시세: 80,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4,800,000원]
[핵심 단서: 뒷면 음각 장인 표식. 초기 백화점 공예전 출품 가능성]
진우는 침대 난간을 움켜쥐었다.
환각이라고 하기에는 정보가 너무 구체적이었다.
"그 브로치, 가족분께 받은 겁니까?"
간호사는 의아한 얼굴로 브로치를 만졌다.
"할머니 유품이에요. 그냥 오래된 장신구인데요."
"뒷면에 작은 표시가 있을 겁니다. 꽃잎 아래쪽. 아주 얕은 음각."
간호사는 망설이다가 브로치를 풀었다.
뒤집은 은판 아래에 바늘 끝만 한 문양이 있었다.
그녀의 표정이 굳었다.
"이걸 어떻게 아셨어요?"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눈 안쪽의 통증은 여전했다. 하지만 머리는 이상할 만큼 맑았다.
이것이 곧 증거는 아니었다.
브로치의 장인 표식을 실제 자료와 맞춰야 했고 출품 기록도 찾아야 했다. 감정은 여전히 손으로 확인하고 문헌으로 검증하고 다른 전문가의 눈을 통과해야 완성되는 일이었다.
다만 그는 이제 어디를 파야 하는지 볼 수 있었다.
병실 텔레비전에서 지역 뉴스가 흘렀다.
주말 인사동 벼룩시장 개장.
낡은 궤짝과 고서화가 쌓인 화면이 지나갔다.
진우의 시선이 화면에 붙었다.
먼지 낀 나무 상자 안쪽으로 말린 종이 뭉치가 잠깐 비쳤다. 카메라는 아무 의미 없이 지나갔지만 진우의 왼쪽 눈이 뜨겁게 뛰었다.
그는 링거 바늘이 꽂힌 손등을 내려다봤다.
윤성철의 목소리가 다시 떠올랐다.
감정표는 시장의 신뢰입니다.
진우는 아주 낮게 웃었다.
그 신뢰를 더럽힌 자들이 어떤 표정을 짓게 될지 아직 아무도 몰랐다.
그의 시야 끝에서 텔레비전 화면 속 낡은 궤짝이 푸르게 번졌다.
[현재 시세: 150,000원]
[숨겨진 잠재 가치: 3,000,000,000원]
[핵심 단서: 이중 바닥. 미공개 드로잉 보관 가능성]
진우는 처음으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무너진 것은 경력뿐이었다.
그의 눈은 이제 시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