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디아의 생계형 해체업자: 마지막 동아줄

시놉시스
글로벌 기업 네오넷이 출시한 2세대 가상현실 MMORPG '아르카디아'.
오감 동조율 99%, 현실과 구분이 가지 않는 리얼한 물리 엔진과 극악의 난이도로 전 세계는 새로운 가상 대륙의 열풍에 휩싸인다.
부모님이 남긴 수억 원의 빚과 동생의 난치병 병원비로 벼랑 끝에 몰린 청년, 강지한.
벼랑 끝에 선 그는 전 재산을 털고 사채까지 끌어써 가상현실 캡슐을 구매한 뒤, 인생의 모든 것을 걸고 아르카디아에 접속한다.
생계를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모든 플레이어가 기피하는 더럽고 냄새나는 3D 직업, '스캐벤저(Scavenger)'.
하지만 모든 감각과 물리 법칙이 현실과 똑같이 작동하는 아르카디아에서, 지한이 가진 남다른 관찰력과 공장에서 다져진 정밀한 손재주는 상상을 초월하는 재능으로 탈바꿈한다.
몬스터의 뼈와 살을 완벽하게 분리하고, 미세한 마력의 핵을 한 톨의 손상도 없이 적출해 내는 신의 손.
버려진 쓰레기 더미 속에서 숨겨진 유물의 가치를 꿰뚫어 보는 혜안.
"단 1골드라도 더 뜯어내겠다. 그게 내 생존 방식이다."
가장 밑바닥의 넝마주이에서 시작해, 아르카디아 대륙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전설적인 존재이자 불패의 랭커로 거듭나는 강지한의 처절하고 독한 생존기가 지금 펼쳐진다.
1화: 마지막 동아줄
철컥, 투두둑.
형광등이 수명을 다해 가는지 불길하게 깜빡거렸다. 낡은 옥탑방의 단칸방 안에는 매캐한 먼지 냄새와 함께 차가운 밤공기가 감돌았다.
강지한은 어깨에 얹힌 묵직한 피로를 털어내며 작업복 지퍼를 내렸다. 하루 종일 공장 라인에서 정밀 부품을 조립하느라 손가락 끝이 시큰거렸다. 감각이 무뎌진 손으로 책상 위에 놓인 종이 쪼가리들을 뒤적였다.
[최고 고지서: 미납 병원비 및 약제비]
[독촉장: 채무 변제 기일 안내]
빨간색 도장이 선명하게 찍힌 종이들이 지한의 목을 죄어오는 올가미처럼 느껴졌다. 부모님이 남겨두고 간 빚 수억 원, 그리고 매달 들어가는 동생 지수의 난치병 입원 치료비. 공장에서 받는 200만 원 남짓한 월급으로는 이자의 절반조차 감당하기 버거웠다.
"결국…… 왔네."
지한의 시선이 좁은 방 한구석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대한 물체로 향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유독 이질적인 광택을 내뿜고 있는 은백색의 타원형 기계. 그것은 글로벌 테크 기업 네오넷(NeoNet)이 출시한 2세대 가상현실 캡슐 '네오-바디 300'이었다.
공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에 사채까지 얹어 산 물건이었다. 이 사실을 안 주변 동료들은 미쳤다고 손가락질했다. 빚더미에 올라앉은 놈이 가상현실 캡슐을 사서 게임이나 하려 한다며 혀를 찼다.
하지만 지한에게는 이것이 도박이자, 인생의 마지막 동아줄이었다.
'아르카디아(Arcadia).'
현실과 다름없는 오감 동조율 99%를 자랑하는 세계 최초의 완전 가상현실 MMORPG. 출시된 지 불과 몇 달 만에 전 세계의 자본이 그곳으로 몰려들고 있었다. 게임 속 재화인 '골드'는 현실의 달러와 1대 1에 가까운 가치로 환전되었고, 초창기 진입에 성공한 랭커들이 빌딩을 샀다는 뉴스는 매일같이 지한의 스마트폰 화면을 장식했다.
'나에게 남은 기회는 이것뿐이다.'
실패하면 신용불량자를 넘어 인생의 막다른 길에 다다르게 된다. 배수진을 친 지한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그는 천천히 걸어가 캡슐의 덮개를 열었다. 슈우우욱, 가벼운 감압음과 함께 캡슐 내부의 인체공학적 시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젤 타입의 전극 패드가 부착된 헬멧을 조심스럽게 머리에 썼다.
캡슐 안으로 들어가 몸을 뉘이자, 부드러운 가죽 시트가 몸을 감싸 안았다.
[사용자 등록 확인: 강지한.]
[동조율 테스트를 시작합니다. 뇌파 및 신경망 연결 수립 중…….]
[동조율 98.7%. 접속 환경 양호.]
[아르카디아에 접속합니다. 웰컴 투 아르카디아.]
시야가 순식간에 암전되었다. 이윽고 귀를 찌르던 이명 소리가 걷히며, 끝이 보이지 않는 순백의 공간이 지한의 눈앞에 펼쳐졌다.
[플레이어의 이름을 결정해 주십시오.]
지한은 마른침을 삼켰다.
"지한(Jihan)."
[사용 가능한 이름입니다. 등록되었습니다.]
[직업 선택 단계입니다. 원하는 계열을 선택하십시오.]
눈앞에 화려한 홀로그램 이미지들이 나열되었다. 육중한 판갑을 입은 전사, 은빛 마법봉을 든 마법사, 날렵한 활을 든 궁수. 직업들의 외양이 보기만 해도 가슴을 뛰게 만들었지만, 지한의 시선은 그 너머에 있는 어둡고 칙칙한 카테고리로 향했다.
전투 직업들은 매력적이었지만, 초기 장비값과 스킬북 가격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것을 사전 조사를 통해 알고 있었다. 자본이 없는 지한이 그런 직업을 택했다간 장비 수리비조차 감당하지 못해 고꾸라질 것이 뻔했다.
지한의 손가락이 가장 밑바닥에 위치한 직업을 터치했다.
[스캐벤저 (Scavenger)]
- 분류: 보조/수집 계열
- 설명: 아르카디아 대륙의 사체, 잔해, 혹은 버려진 물건에서 가치 있는 자원을 채취하고 해체하는 직업입니다.
- 경고: 본 직업은 시체 해체, 오물 접촉 등 시각 및 후각적 불쾌감을 동반합니다. 초기 전투 능력이 극히 제한되며, 일반적인 파티 사냥에서 기피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스캐벤저."
지한이 나직하게 읊조렸다.
[스캐벤저 직업을 선택하시겠습니까? 한 번 결정한 직업은 전직 퀘스트를 수행하기 전까지 변경할 수 없습니다.]
"선택한다."
지한의 목소리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남들이 더럽다고 피하는 일, 냄새난다고 고개를 돌리는 일은 현실에서도 신물이 나도록 해왔다. 돈이 되고 생계를 이어갈 수만 있다면 시체 해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선택이 완료되었습니다. 튜토리얼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빛이 번쩍이며 시야를 가득 메웠다. 다음 순간, 코끝을 찌르는 강력한 악취가 지한의 숨통을 턱 막히게 했다.
"커흑! 켁, 에구구……."
지한은 본능적으로 코를 틀어쥐며 상체를 일으켰다.
바닥은 썩은 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고, 주변에는 낡은 고철 더미와 정체 모를 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거대한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있는 곳.
[튜토리얼 구역: 라르크 초보자 훈련소 외곽 '폐기물 매립지'에 도착하셨습니다.]
[지급된 기본 아이템을 확인하십시오.]
지한은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현실의 거친 손톱과 굳은살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다. 등 뒤에는 낡은 삼베로 짜인 가죽 가방이 매여 있었고, 허리춤에는 이가 군데군데 빠진 녹슨 뼈칼 한 자루가 꽂혀 있었다.
"진짜…… 완전히 현실이네."
손가락으로 바닥의 흙을 만져보았다. 서늘하고 축축한 흙의 촉감, 미세한 모래알이 손가락 사이에 끼는 느낌까지 소름 끼칠 정도로 똑같았다. 99%의 동조율이라는 말이 과장이 아니었다.
지한은 허리춤에서 녹슨 뼈칼을 뽑아 들었다. 가볍고 투박했다.
[녹슨 뼈칼]
- 등급: 일반 (하급)
- 공격력: 1~3
- 내구도: 10/10
- 설명: 동물의 뼈를 대충 깎아 만든 칼입니다. 해체 및 채집 속도가 5% 증가하지만, 전투용으로는 부적합합니다.
그때였다. 저 멀리 고철 더미 사이에서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한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추고 소리가 난 방향을 주시했다. 쓰레기 더미 사이로 붉게 충혈된 눈동자 두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슥, 스스슥.
검고 투박한 털로 뒤덮인 생명체가 기어 나왔다. 일반적인 쥐라고 하기엔 크기가 너무 컸다. 족히 대형견만 한 크기였다. 주둥이 사이로 날카로운 앞니가 튀어나와 있었고, 뚝뚝 떨어지는 침에서는 지독한 썩은 내가 났다.
[디르 래트 (Dir Rat) - Lv.1]
- 설명: 매립지의 오물을 먹고 자란 거대 시궁쥐입니다. 공격성이 강합니다.
"크르르릉……."
디르 래트가 붉은 눈으로 지한을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순간 지한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눈앞의 몬스터가 뿜어내는 압도적인 존재감과 살기는 진짜 맹수를 마주한 것처럼 공포스러웠다.
'침착하자. 겨우 1레벨 몬스터다. 여기서 쫄면 아무것도 못 해.'
지한은 뼈칼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지수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이깟 쥐새끼 한 마리 때문에 도망칠 순 없었다.
끼에에엑-!
디르 래트가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지한을 향해 돌진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빠르게 좁혀지는 거리.
지한은 공장에서 수만 번 반복했던 정밀 임가공 작업을 떠올렸다. 타이밍을 맞춰 기계를 조작하듯, 들어오는 공격의 궤적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타악!
쥐가 껑충 뛰어올라 지한의 목덜미를 겨냥했다. 지한은 왼쪽으로 몸을 던졌다. 흙바닥에 거칠게 구르며 찰과상의 화끈거리는 통각이 전해졌다. 아픔에 신음할 여유도 없이, 그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반사적으로 뼈칼을 휘둘렀다.
서걱!
"끼익!"
칼끝이 쥐의 옆구리를 스쳐 지나갔다. 붉은 대미지 표시는 뜨지 않았지만, 쥐의 옆구리에서 검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아르카디아의 전투 시스템은 수치상의 체력보다 '부위별 타격'과 '출혈' 같은 물리적 손상이 더 중요하게 작용했다.
옆구리에 타격을 입은 디르 래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해졌다. 지한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쥐의 등 뒤로 도약해 체중을 실어 내리눌렀다.
"이리 와, 이 자식아!"
"끼에엑! 끄윽!"
쥐가 요동을 치며 지한의 팔뚝을 물어뜯었다. 살점이 뜯겨 나가는 듯한 찌릿한 고통이 머리를 때렸지만, 지한은 악물고 버텼다. 한 손으로 쥐의 주둥이를 짓누르고, 다른 한 손에 쥔 뼈칼을 쥐의 목덜미를 향해 힘껏 쑤셔 넣었다.
푸학!
검은 피가 지한의 얼굴과 가슴팍으로 분수처럼 튀었다. 쥐의 격렬한 발버둥이 서서히 잦아들더니, 이내 몸이 축 늘어졌다.
[디르 래트를 사냥하셨습니다.]
[경험치 5를 획득하셨습니다.]
"하아, 하아, 하아……."
지한은 쥐의 사체 위에서 굴러떨어지며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땀과 오물, 그리고 쥐의 피로 범벅이 되어 엉망진창이었다. 통각 동조율을 낮춰 두었음에도 팔뚝의 상처가 욱신거렸다.
하지만 쉴 틈이 없었다. 몬스터의 사체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시스템의 물리 엔진에 의해 소멸해 버리기 때문이었다.
지한은 상체를 일으켜 디르 래트의 사체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의 눈앞에 반투명한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해체 가능한 대상입니다.]
- 자동 해체 (확률에 따른 고정 보상 획득)
- 수동 해체 (플레이어의 숙련도 및 정밀도에 따라 보상 변경)
"당연히 수동이지."
자동 해체는 편리하지만 획득하는 재료의 등급이 낮고 손상될 확률이 높았다. 반면 수동 해체는 플레이어의 직접적인 가위질과 칼질로 재료를 얻는 방식이었다. 보통의 플레이어들은 징그럽고 귀찮아서 자동 해체를 선택하지만, 지한은 달랐다.
그는 뼈칼의 핏자국을 털어내고 디르 래트의 사체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공장에서 현미경을 보며 마이크로미터 단위의 실리콘 칩을 핀셋으로 집어내던 감각. 그 초정밀 임가공의 감각이 그의 뇌리에서 깨어났다.
'가죽의 결은 척추를 기준으로 양옆으로 갈라진다. 관절 부위의 힘줄을 먼저 끊고…….'
지한의 손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뼈칼의 끝부분을 쥐의 목덜미 가죽 사이에 얇게 밀어 넣었다. 가죽이 찢어지지 않도록 힘을 미세하게 조절하며, 뼈와 살의 경계면을 부드럽게 갈라 나갔다.
서가각, 서각.
기분 좋은 마찰음과 함께 쥐의 가죽이 마치 잘 익은 과일 껍질 벗겨지듯 매끄럽게 분리되었다. 단 한 군데의 칼질 실수도 없었다. 가죽 안쪽의 붉은 속살이 상처 하나 없이 드러났다.
'다음은 쓸개와 꼬리.'
지한은 쥐의 복부를 조심스럽게 절개했다. 내장이 터져 오물이 묻지 않도록, 호흡을 멈추고 손끝의 미세한 떨림까지 제어했다. 내장 벽 안쪽에 숨겨진 작고 푸르스름한 주머니, 디르 래트의 쓸개를 뼈칼 끝으로 톡 건드려 한 방울의 담즙도 흘리지 않고 통째로 적출해 냈다.
이어서 마력의 흐름이 미세하게 감도는 꼬리의 접합부를 관절째 깨끗하게 잘라냈다.
툭.
마지막 재료가 지한의 손바닥 위에 올라앉는 순간, 청명한 시스템 알림음이 매립지의 정적을 깨뜨렸다.
띠링!
[경이로운 해체입니다!]
[몬스터의 구조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체를 수행했습니다.]
[해체 성공률 100%, 재료 보존율 120% 달성!]
[업적 '완벽한 첫걸음'을 달성하셨습니다.]
- 효과: 해체 속도 10% 영구 증가.
[획득한 전리품]
- 디르 래트의 온전한 가죽 (최상급) x 1
- 디르 래트의 쓸개 (상급) x 1
- 마력이 깃든 시궁쥐 꼬리 (최상급) x 1
"이게…… 되네."
지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장 하급 몬스터인 디르 래트에게서 '최상급' 재료가 튀어나왔다.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정보글을 읽었을 때, 1레벨 쥐 가죽은 대부분 '손상됨'이나 '하급'으로 나와 장비 가죽 끈 제작용으로나 쓰인다고 했다. 하지만 최상급 가죽은 그 가치가 최소 수십 배 이상이었다.
[스캐벤저 직업 숙련도가 상승했습니다. (1.2% -> 15.8%)]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1 -> Lv.2)]
"레벨도 올랐어?"
해체만으로도 대량의 경험치가 들어왔다. 전투로 얻은 경험치보다 해체 성공으로 얻은 경험치가 훨씬 컸다.
지한은 손바닥에 놓인 꼬리와 쓸개를 흙먼지가 묻지 않게 조심스레 털어 가방에 넣었다. 가죽은 곱게 접어 가방 가장 깊숙한 곳에 보관했다.
피 냄새와 썩은 내가 진동하는 폐기물 매립지.
오물이 묻은 얼굴을 슥 훔쳐낸 지한이 허리를 폈다. 그의 눈동자에 형용할 수 없는 열망이 불타오르고 있었다.
"이거 진짜…… 돈이 된다."
남들이 더럽다고 기피하는 이 바닥이, 자신에게는 황금밭이나 다름없었다.
지한은 다시 한번 녹슨 뼈칼을 굳게 쥐었다. 그리고 쓰레기 더미가 겹겹이 쌓인 어두운 골짜기를 향해 거침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의 처절한 연대기의 첫 페이지가 시작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