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마트 사장은 갑질이 하고 싶다]

2화 [손님, 가격은 코어입니다]
문 앞의 코어
유리문 너머의 사람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낡은 우비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른 손바닥 위의 하급 코어 하나만이 자동문 불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물 한 모금만요.”
쉰 목소리가 유리에 부딪혔다.
도진은 손전등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문을 열면 저 사람이 혼자가 아닐 수도 있었다. 약탈단이 미끼를 던지고 뒤에서 기다리는 일은 흔했다.
화면의 글자가 조용히 바뀌었다.
[방문자: 인간 1명. 무장 반응 없음. 탈수 및 저체온 위험.]
[입장을 허가하시겠습니까?]
상태까지 알려 주는 화면이 오히려 더 수상했다. 도진은 유리 너머의 어깨를 살폈다. 우비 아래가 너무 가늘었다. 칼을 감춘 사람이라기보다 바람에 쓰러질 사람처럼 보였다.
그렇다고 공짜로 문을 열 생각은 없었다.
도진은 카운터의 생수 가격을 떠올렸다. 산다수 한 병에 2포인트. 손바닥 위 코어 하나면 열 포인트였다.
“코어가 네 거면 들어와.”
그가 입구 화면을 눌렀다.
칙.
자동문이 열렸다.
사람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빛이 새어 나오는 틈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코어를 움켜쥔 채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문턱을 넘자마자 여자는 멈춰 섰다.
“……전기가.”
그녀의 시선이 천장 조명과 가지런한 진열대를 훑었다. 이어서 생수병 앞에서 그대로 굳었다. 투명한 병들이 한 줄씩 늘어선 풍경은 이 폐허에서 너무 깨끗했다.
여자의 손이 매대를 향해 들렸다.
[결제 전 상품입니다.]
생수병 위로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여자는 화들짝 손을 거뒀다. 마치 손등을 맞은 사람처럼 주먹을 쥐었다.
“죄송해요. 훔치려던 건 아니에요.”
“알아.”
도진은 카운터 뒤에서 나오지 않았다.
“여긴 먼저 계산해. 계산하면 가져가.”
여자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그러다 품속을 더듬어 젖은 천 조각을 꺼냈다. 천 안에는 마른 비상식량 부스러기와 녹슨 나사 몇 개가 있었다.
“이거밖에 없는데…….”
“코어 있잖아.”
도진이 손바닥을 가리켰다.
여자는 코어를 감쌌다. 경계하는 얼굴이었다. 하급 코어 하나라도 밖에서는 이틀치 물과 바꿀 수 있었다. 물론 거래 상대가 약속을 지킨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걸 내면 물을 줘요?”
“물 한 병은 2포인트.”
도진은 화면을 돌려 보였다.
“그 코어는 열 포인트로 잡혀. 남은 걸로 먹을 것도 살 수 있어.”
여자는 숫자보다 도진의 얼굴을 먼저 봤다.
“코어 하나를 다 내고 물 한 병만 받는 게 아니고요?”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도진의 목소리는 건조했다.
“여긴 약탈단 창고가 아니야. 가격표대로만 받아.”
가격표의 첫 줄
여자는 한참 뒤에야 카운터 앞으로 걸어왔다.
“박순자예요.”
이름을 말한 것은 신분증을 내민 것과 비슷한 행동이었다. 도진도 잠시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한도진.”
순자는 코어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손가락 끝이 끝까지 결정에 붙어 있었다. 놓는 순간에는 눈을 질끈 감았다.
코어는 빛 조각으로 풀어졌다.
[하급 마수 코어 1개를 10포인트로 환산합니다.]
[방문자 결제 권한이 활성화됩니다.]
순자의 화면에 열 포인트가 찍혔다. 도진의 소유자 계정에도 같은 숫자가 더해졌다.
[소유자 적립 포인트: 10]
그제야 도진은 외부 손님의 결제가 자신의 포인트로도 쌓인다는 사실을 알았다. 손님이 두 포인트를 쓰면 그만큼의 물건이 나가고 남은 포인트는 다음 거래를 위해 손님 계정에 남는다.
순자는 화면을 보지 못한 채 생수 진열대만 바라봤다.
“마셔도 돼요?”
“결제됐어.”
도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순자는 생수 한 병을 집었다. 손이 덜덜 떨려 뚜껑을 두 번이나 헛돌렸다. 도진은 다가가려다 멈췄다. 저 물은 순자가 자기 대가를 내고 산 물이었다.
스스로 열게 두는 편이 나았다.
병뚜껑이 딸깍 소리를 냈다.
순자는 입을 대고 한 모금만 마셨다.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두 번째 모금은 길었다. 세 번째에는 눈가가 붉어졌다.
“깨끗해.”
그녀는 병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진짜 물이야.”
도진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까지도 믿기 어려웠던 사실이 남의 입에서 들리자 더 현실 같았다.
“남은 건 여덟 포인트야.”
그가 카운터 화면을 톡 두드렸다.
“핫컵라면은 셋. 통조림은 넷. 물은 둘.”
순자는 눈을 크게 떴다.
“그걸 다 살 수 있다고요?”
“가격 안에서.”
“그럼 물을 두 병 더…….”
말끝이 흔들렸다. 순자는 생수병을 품에 안고 고개를 숙였다.
“밖에 애가 하나 있어요. 열이 나서 물도 못 삼켜요. 데리고 오려고 했는데 길에 짐승 발자국이 보여서요.”
도진은 자동문 쪽을 봤다. 문밖의 빗물은 검었다. 밖으로 나가 아이를 데려올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마트 밖에서 그 짐승과 맞설 힘이 없었다.
그렇다고 순자의 말을 거짓으로 몰아갈 이유도 없었다.
“애가 네 가족이야?”
“아니요. 같은 건물에 숨어 있었어요.”
순자는 잠시 웃었다. 웃음이라기보다 입가가 아프게 움직인 것이었다.
“부모는 먼저 죽었고요. 혼자 두면 무서워해요.”
도진은 손전등을 내려놓고 빈 가격표를 집었다. 검은 펜이 어느새 카운터 옆에 놓여 있었다.
그는 첫 줄에 천천히 적었다.
산다수 생수 1병 — 2포인트.
핫컵라면 1개 — 3포인트.
“물 두 병이면 넷이야.”
순자가 숨을 삼켰다.
“그럼 남는 걸로 라면 하나.”
“하나가 아니라 둘.”
도진은 가격표를 가리켰다.
“열에서 물 세 병 빼면 넷 남아. 라면 하나 사고 하나 남는다. 그건 다음에 써.”
순자는 가격표와 진열대를 번갈아 봤다. 누군가 계산을 틀릴 때까지 기다리는 눈빛이었다.
도진은 고개를 저었다.
“잔돈은 안 떼먹어.”
물 한 병의 값이 사람 기분에 따라 바뀌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손님도 다음에 무엇을 들고 와야 할지 안다.
그는 그 생각을 새 가격표의 글씨에 눌러 담았다.
공짜가 아닌 친절
순자는 물 두 병과 컵라면 한 개를 계산대에 올렸다. 도진이 결제를 누르자 작은 영수증이 나왔다.
[정상 결제 완료.]
[잔여 포인트: 1]
종이를 받아 든 순자는 영수증을 손등으로 닦았다. 젖은 손에 종이가 붙을까 봐 조심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진지했다.
“이건 왜 줘요?”
“네가 뭘 샀는지 적혀 있잖아.”
“그걸 믿어도 돼요?”
도진은 대답 대신 남은 포인트 숫자를 다시 보여 줬다.
“다음에 와서 물건 살 때 내가 딴소리하면 그거 내밀어.”
순자는 한동안 영수증을 바라봤다. 누군가의 호의가 아니라 지켜야 할 약속을 손에 쥔 표정이었다.
“사장님은 이상한 사람이네요.”
“사장님?”
“가격을 정하잖아요.”
도진은 빈 가격표를 보았다. 삐뚤빼뚤한 글씨가 진열대 위에서 반짝였다. 얼마 전까지 그는 남이 정한 배급량을 기다리던 짐꾼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물 한 병을 팔고 남은 한 포인트까지 장부에 적고 있었다.
“그렇게 부르든가.”
순자는 컵라면을 들고 온수기 앞에서 멈칫했다.
“여기서 먹어도 돼요?”
도진은 자동문과 순자의 젖은 신발을 한 번씩 봤다. 마트를 휴식처로 만들면 손님은 더 오래 머물 것이다. 그만큼 위험도 커진다.
그래도 뜨거운 물 한 번 쓴다고 손해 볼 일은 없었다.
“먹고 가. 대신 쓰레기는 저 통에 버려.”
순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힘이 들어갔다.
“네.”
그녀는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붓고 조심스럽게 뚜껑을 덮었다. 김이 퍼지자 순자는 눈을 감았다. 배고픈 사람에게는 삼 분도 긴 시간이다. 도진은 그 표정을 알아서 카운터 안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 한쪽에 새 문구가 떠올라 있었다.
[첫 외부 거래 기록 완료.]
[가격표 등록 기능이 활성화됩니다.]
[공개 가격 신뢰도: 1]
신뢰도.
도진은 단어를 속으로 굴렸다. 코어만 모으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시스템은 손님과 약속을 지키는 것까지 숫자로 셌다.
‘마음대로 받아도 되는 게 아니라는 건가.’
그건 나쁘지 않았다. 약탈단처럼 오늘은 물 한 병에 코어 하나를 받고 내일은 칼을 들이대는 장사는 오래 못 간다.
순자가 라면 국물을 한 모금 마신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여기 불빛이 밖에서도 보일까요?”
도진의 시선이 들렸다.
“왜?”
“길목에 두철이네 애들이 있어요. 오늘도 물 가진 사람을 뒤졌어요.”
순자는 목소리를 낮췄다.
“코어 냄새 맡으면 사람까지 뒤집어봐요. 제가 여기 들어온 걸 보면 분명 따라올 거예요.”
도진은 유리문 너머의 어둠을 보았다. 은폐 상태라는 글자를 믿고 싶었지만 그 기능이 누구까지 속이는지는 몰랐다.
“나갈 때는 혼자 나가.”
그가 말했다.
“마트 얘기는 하지 말고.”
순자는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안 해요. 여길 빼앗기면 저도 끝이에요.”
그 대답은 솔직했다. 도진은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손님이 남긴 길
순자는 빈 컵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상품을 우비 안쪽에 넣었다. 물병 하나는 끝내 꺼내지 않은 채 품에 감쌌다.
“한 포인트는 다음에 쓸게요.”
“코어는?”
“찾아볼게요. 물은 꼭 필요하니까.”
도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자동문 옆 화면을 눌렀다.
[방문자 퇴장을 허가합니다.]
문이 열리자 차가운 빗바람이 매장 안으로 밀려들었다. 순자는 한 번 돌아봤다. 밝은 조명과 가격표와 생수 진열대를 오래 눈에 담았다.
“사장님.”
“왜.”
“내일도 열어요?”
도진은 망설이지 않았다.
“코어 들고 오면.”
순자는 그 말에 아주 작게 웃었다. 그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자동문이 닫힌 뒤에도 도진은 한동안 서 있었다. 바깥에 무슨 일이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다만 카운터 안의 포인트 숫자와 첫 가격표가 분명히 남아 있었다.
그는 새 종이를 꺼내 다음 줄을 적었다.
선불. 가격표 외 요구 금지. 물건은 계산 후 가져갈 것.
글씨를 끝낸 순간 화면이 깜빡였다.
[매장 운영 규칙이 기록되었습니다.]
도진은 펜을 내려놓았다. 숨을 곳 하나를 얻었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지켜야 할 가게가 생겼다.
그때 자동문 바깥에서 철제 파이프가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도진의 손이 멈췄다.
유리문 너머로 두 개의 그림자가 가까워졌다.
“여기까지 발자국이 이어지는데?”
“불빛도 봤다니까. 저 계집이 어디로 숨었는지 찾으면 돼.”
강두철의 부하들이었다.
도진은 조용히 카운터 화면을 바라봤다.
[방문자 2명이 기본 구역 경계에 접근했습니다.]
[입장을 허가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