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 마트 사장은 갑질이 하고 싶다]

1화 [썩은 통조림과 무한 마트]
프롤로그
통조림 캔은 손바닥만 한데 유난히 무거웠다.
한도진은 그 캔을 품에 넣고 물이 찬 골목을 달렸다. 발목까지 튄 빗물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녹슨 캔의 옆면은 붉게 들떠 있었고 뚜껑은 배처럼 부풀어 있었다.
먹으면 탈이 날지 모르는 물건이었다. 그래도 지금 도진에게는 목숨값이었다.
“거기 서라, 이 쥐새끼야!”
뒤에서 욕설이 들렸다. 쇠파이프 끝이 벽을 긁는 소리도 따라왔다.
도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배급용 통조림을 훔쳤다는 누명을 벗으려면 적어도 말을 들어 줄 사람이 있어야 했다. 강두철의 약탈단에는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는 부서진 버스 정류장 옆 쓰레기 더미에서 캔을 주웠다. 이미 비어 있던 약탈단 창고와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하지만 배급 담당은 빈 상자를 보자마자 도진의 옷깃을 잡았다.
‘짐꾼 새끼가 배가 불렀네.’
그 말 뒤에는 주먹이 날아왔다.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배고픈 사람들 앞에서 먹을 것을 쥔 쪽이 옳았고 맨손인 쪽이 죄인이었다.
도진은 입안에 고인 피를 삼키며 달렸다. 옆구리가 욱신거릴 때마다 낮에 맞은 군홧발이 떠올랐다. 손에서 통조림을 놓치면 더 빨리 달릴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쥐고 있었다.
이것마저 빼앗기면 오늘 밤은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세상은 삼 년 전에 무너졌다. 하늘에서 검은 균열이 열렸고 짐승도 사람도 아닌 것들이 거리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그 뒤로 깨끗한 물은 총알보다 귀해졌고 멀쩡한 음식은 약탈단 창고에서만 보였다.
도진은 그 창고의 짐을 나르는 사람이었다. 무거운 상자를 옮기고 남은 국물에 빵 부스러기를 말아 먹었다. 오늘까지는 그럭저럭 숨을 붙이고 있었다.
“왼쪽으로 갔다!”
목소리가 가까워졌다.
도진은 폐허가 된 대형 상가의 지하 주차장으로 몸을 틀었다. 천장 일부가 내려앉아 입구가 반쯤 막혀 있었다. 사람들은 그런 곳을 싫어했다. 마수가 숨어 있을 수도 있고 출구가 막힐 수도 있었다.
그래서 도진은 그곳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경사로를 두 걸음 내려가자 바닥이 꺼졌다.
“젠장!”
발목이 헛돌았다. 도진은 콘크리트 파편과 함께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품에 있던 통조림이 갈비뼈를 세게 찍었다.
한참 뒤에야 굴러감이 멈췄다.
도진은 숨을 들이마시려 했지만 옆구리가 먼저 비명을 질렀다. 손가락을 움직여 보니 부러진 곳은 없는 듯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비 냄새가 아니라 축축한 곰팡내를 들이켰다.
위쪽에서 희미한 욕설이 들렸다.
“아래로 떨어졌나?”
“죽었으면 코어도 안 나오잖아. 그냥 두자.”
발소리가 멀어졌다.
도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살아 있는 사람을 찾으러 온 것도 아니었다. 자기들이 빼앗은 짐꾼이 도망쳤는지 확인하러 온 것뿐이었다.
그는 손등으로 눈가의 빗물과 피를 문질렀다. 눈을 뜨자 어둠 끝에 희미한 빛이 보였다.
처음에는 마수의 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은 길게 이어진 글자였다.
무한 마트.
꺼지지 않은 간판
도진은 벽을 짚고 일어났다. 발목이 저렸지만 걸을 수는 있었다. 빛은 붕괴한 주차장 너머의 유리문 위에서 새어 나왔다.
간판의 글자 몇 개는 먼지에 가려져 있었다. 그래도 전기는 살아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상했다. 이 구역의 발전기는 반년 전에 멈췄다.
“마트?”
도진은 헛웃음을 흘렸다.
대멸망 전이라면 밤늦게 컵라면 하나 사러 들렀을 곳이다. 지금은 누군가가 ‘마트’라는 글자를 미끼로 달아 놓았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 속 통조림을 만졌다. 도망친 보상으로 이 썩은 캔 하나를 지켜 낸 자신이 우스웠다.
자동문 앞에 섰을 때 센서등이 켜졌다.
칙.
문이 혼자 양옆으로 열렸다.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비린 먼지 냄새가 아닌 냉장고 냄새였다. 도진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때 눈앞에 반투명한 글자가 떠올랐다.
[소유자 적합도 확인 중입니다.]
[생존 의지, 거래 이력, 공간 적합도 확인.]
“뭐야.”
도진이 손을 휘저었지만 글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한도진 님을 무한 마트의 임시 소유자로 등록합니다.]
[기본 구역의 개점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꿈인지 확인하려고 뺨을 꼬집을 필요는 없었다. 옆구리 통증이 너무 선명했다.
도진은 열린 문턱을 넘었다.
안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멀쩡했다. 하얀 바닥에는 발자국 하나 없었고 천장 조명은 고르게 빛났다. 진열대마다 투명한 생수병이 줄을 맞췄다. 옆 칸에는 과자와 통조림, 컵라면이 상자째 놓여 있었다.
그중 컵라면의 붉은 뚜껑이 도진의 시선을 붙잡았다.
그는 배를 움켜쥐었다. 빈속이 꼬이는 소리가 조용한 매장 안에서 크게 들렸다.
손이 먼저 움직였다. 생수 한 병을 집자 차가운 물기가 손바닥에 맺혔다. 정말 물이었다. 검은 침전물도 없고 비린 냄새도 없었다.
도진은 뚜껑을 열려다 멈췄다.
[결제되지 않은 상품입니다.]
붉은 글자가 병 위로 떠올랐다.
그는 미간을 찌푸렸다. 굶주린 사람 앞에 물을 꺼내 놓고 돈부터 받는 환각이라니 참 성가신 방식이었다.
하지만 도진은 병을 제자리에 놓았다.
약탈단이 싫었던 이유는 물건을 빼앗아서만이 아니었다. 빼앗고도 당연하다는 표정을 지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짓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카운터 쪽으로 걷자 검은 화면이 켜졌다.
[결제 수단: 마수 코어, 희귀 자원, 시스템이 인정한 노동권.]
[정상 결제된 상품에 한하여 기본 재고가 보충됩니다.]
정상 결제.
두 글자가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도진은 신발 안쪽을 더듬었다. 고무 밑창을 뜯어 낸 틈에서 탁한 회색 결정 하나가 나왔다. 며칠 전 죽은 들개형 마수의 사체를 치우다 몰래 챙긴 하급 코어였다.
이것이 들키면 강두철의 부하들은 통조림 누명보다 더 신나게 그를 팼을 것이다.
“이걸 내면 생수 하나는 살 수 있겠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이 떨렸다. 코어는 마지막 보험이었다. 굶어 죽기 직전에 물과 바꿀 수 있는 작은 보험.
도진은 코어를 카운터 위에 올렸다.
정상 결제
검은 결정이 작은 빛 조각으로 부서졌다. 카운터 화면에 숫자가 떠올랐다.
[하급 마수 코어 1개를 10 포인트로 환산합니다.]
[산다수 생수 1병: 2 포인트.]
[핫컵라면 1개: 3 포인트.]
[결제를 진행하시겠습니까?]
도진은 숨을 멈췄다.
코어 하나로 물 한 병과 라면 한 개를 사고도 남는다. 말이 안 되는 가격이었다. 밖에서는 코어 하나로 사람 셋이 칼을 들고 싸웠다.
‘나머지는 어디로 가지?’
화면 아래에 작게 적힌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잔여 포인트는 소유자 계정에 적립됩니다.]
도진은 확인 버튼을 눌렀다.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
영수증이 조용히 밀려 나왔다. 얇은 종이 위에는 상품명과 가격 아래로 한 줄이 찍혀 있었다.
정상 결제 완료.
그는 영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오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빼앗기지 않고 무엇을 손에 넣었다는 증거였다.
컵라면 뚜껑을 반쯤 열자 뜨거운 물이 필요했다. 도진이 난처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는 순간, 매장 구석의 온수기가 불을 밝혔다.
[기본 편의 설비를 이용할 수 있습니다.]
물줄기가 컵 안으로 떨어졌다. 고소한 향신료 냄새가 퍼지자 속이 더 아프게 비틀렸다.
‘삼 분.’
대멸망 전에는 휴대폰을 보며 아무 생각 없이 기다리던 시간이었다. 지금 도진에게 삼 분은 누군가가 문을 부수고 들어올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그는 자동문을 바라보며 컵라면을 감쌌다. 밖은 검은 유리 너머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쿵.
어딘가에서 돌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도진은 재빨리 카운터 아래로 몸을 숨겼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뛰었다.
문 바깥을 지나가던 그림자가 유리문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불빛이었나?”
강두철의 부하 목소리였다.
도진은 숨도 쉬지 못했다. 손에는 아직 덜 익은 컵라면이 들려 있었다.
남자는 유리문으로 다가왔다. 도진은 카운터 아래에서 바닥만 노려봤다. 문이 열리면 도망칠 곳이 없었다.
그러나 센서등은 켜지지 않았다.
“전기는 다 죽었는데 뭘 봤다는 거야.”
다른 목소리가 투덜거렸다.
“가자. 두철 형님이 시체 찾으랬지 귀신 찾으랬냐?”
발소리가 멀어졌다.
도진은 한참 뒤에야 고개를 들었다. 자동문은 처음처럼 닫혀 있었다. 바깥의 두 사람은 바로 앞을 지나갔는데도 문을 보지 못한 듯했다.
우연일 수 있었다. 그래도 그는 유리문을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소유자 외의 접근 대상이 감지되었습니다.]
[기본 구역 은폐 상태가 유지됩니다.]
“은폐?”
도진은 글자를 되뇌었다. 무슨 뜻인지 다 알 수는 없었다. 다만 자신이 숨어들어 온 이 장소가 아무에게나 보이는 곳은 아니라는 뜻 같았다.
그는 더 묻지 않았다. 지금은 라면이 먼저였다.
뚜껑을 완전히 젖히자 김이 피어올랐다. 도진은 젓가락을 찾아 헤맬 필요도 없었다. 컵 옆에 나무젓가락이 놓여 있었다.
면발을 입에 넣는 순간 혀가 데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맵고 짰다. 너무 뜨거워서 눈물이 났다. 그는 훌쩍이는 대신 국물을 들이켰다.
썩은 통조림 냄새도 피비린내도 아니었다. 뜨거운 국물 냄새였다. 사람답게 살던 시절의 냄새였다.
한 컵을 다 비운 뒤에야 도진은 생수병을 열었다. 투명한 물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한 모금만 마시려 했는데 반 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빈 용기를 내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울음은 나오지 않았다. 대신 어깨가 한 번 크게 떨렸다.
누군가가 주는 배급을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누군가의 기분에 따라 오늘 먹을 몫이 정해지지 않아도 된다.
그 사실이 무서웠다. 너무 좋은 일은 대개 빼앗기기 마련이었으니까.
도진은 컵라면이 있던 진열대로 갔다.
비어 있던 자리에 같은 붉은 뚜껑이 다시 놓여 있었다.
그는 손끝으로 새 컵라면의 가장자리를 눌러 봤다. 따뜻한 환상이 아니었다. 단단한 플라스틱 감촉이었다.
“진짜로 채워졌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아주 작았지만 분명히 웃는 소리였다.
도진은 매장을 천천히 둘러봤다. 생수와 라면만 있는 곳이 아니었다. 손전등, 건전지, 비누, 수건, 통조림이 구역마다 정리돼 있었다. 벽에는 텅 빈 가격표가 걸려 있었다.
가격을 정하는 사람.
그 말이 문득 떠올랐다.
그동안 도진은 누군가가 정한 가격을 몸으로 냈다. 통조림 하나를 받기 위해 하루 종일 짐을 날랐고 물 한 모금을 얻기 위해 욕을 삼켰다.
이제 카운터의 반대편에 설 수 있다면 어떨까.
그는 카운터 위의 영수증을 한 번 더 만졌다.
“공짜는 없다.”
목소리는 아직 갈라져 있었다.
“하지만 빼앗지도 않아.”
그 말이 규칙이 될지는 알 수 없었다. 마트가 내일도 여기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도진은 출입문 쪽으로 걸어갔다. 더는 쫓기는 짐꾼처럼 카운터 밑에 숨고 싶지 않았다.
첫 손님
자동문 앞에 섰을 때 바깥에서 약한 기침 소리가 들렸다.
도진은 몸을 굳혔다. 또 약탈단일지 모른다. 그는 진열대에서 손전등을 집어 들었다. 무기로 쓰기에는 형편없지만 맨손보다는 나았다.
[방문자 1명이 기본 구역 경계에 접근했습니다.]
새 글자가 떠올랐다.
[입장을 허가하시겠습니까?]
도진의 손가락이 멈췄다. 화면 아래에는 낯선 사람이 웅크린 모습이 비쳤다. 낡은 우비를 뒤집어쓴 사람이 문 앞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물….”
유리문 너머의 목소리는 너무 작아서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다.
“물 한 모금만 있으면 돼요.”
도진은 상대의 손을 봤다. 비에 젖은 손바닥 위에 흐릿한 빛을 내는 하급 코어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는 카운터와 생수 진열대를 번갈아 봤다.
물 한 병의 가격은 2포인트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물 한 병의 값은 숫자만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도진은 처음으로 계산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