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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9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9화: 필터가 돌아가는 밤

2번 라인의 물은 흐르고 있었지만 한소희는 출수관을 보지 않았다.

그녀는 필터 통 양쪽에 붙은 압력계를 번갈아 살폈다. 입구 쪽 바늘은 붉은 제한선 아래에서 느리게 떨렸다. 출구 쪽 바늘은 어제보다 한 칸 더 내려가 있었다.

소희가 관측병을 들어 보였다. 투명한 병 바닥에 젖은 검은 가루가 층층이 가라앉아 있었다.

"필터가 막히고 있어."

민혁은 보일러실 입구를 바라봤다. 천막 너머에는 빈 물통들이 이어져 있었다. 출수관이 조금만 늦게 울려도 통로의 눈들이 먼저 움직였다.

"압력은 아직 괜찮지 않습니까?"

"관 압력은 괜찮아. 필터 전후 압력이 문제야. 지금 더 틀면 안쪽 망이 찢어져. 그러면 걸러지던 찌꺼기까지 다 넘어가."

소희는 손톱으로 두 압력계 아래 적어 둔 숫자를 두드렸다. 어제 붙인 종이는 습기를 먹어 가장자리가 말려 있었다.

민혁은 밸브 손잡이를 잡았다. 물을 반으로 줄이면 줄에 선 사람들은 오늘 못 받는 몫이 생긴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대로 두면 내일은 물줄기 자체가 끊긴다.

그는 손잡이를 천천히 반 바퀴 잠갔다.

관 안의 진동이 낮아졌다. 통로에서 누군가 작게 욕을 했다. 장재복의 목소리도 그 틈에 섞였다.

"또 물이 약해졌네."

소희는 대답하지 않고 필터 통 아래의 배출 밸브를 열었다. 탁한 물이 양동이 바닥을 두드리며 쏟아졌다. 물 냄새 속에 오래 젖은 천 냄새가 섞였다.

"예비 연결부로 역세척은 할 수 있어. 막힌 걸 조금 밀어내는 정도지. 이 상태면 오늘 밤 안에 다시 차올라."

그녀가 작업대 아래에서 낡은 카트리지 하나를 꺼냈다. 주름진 여과막은 갈색으로 굳어 있었다. 손가락으로 눌러도 탄력이 돌아오지 않았다.

"새 카트리지가 있어야 해. 바깥 지름이 이거고 길이는 이만큼. 패킹도 같이 맞춰야 하고."

소희는 공책 한 귀퉁이에 치수를 적었다. 숫자 옆에는 화살표와 짧은 선이 빽빽했다. 민혁은 종이를 받아 접었다.

"두 개면 됩니까?"

"하나는 넣고 하나는 남겨야 해. 이 라인은 필터 하나에 목숨을 걸면 안 돼."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주머니에서 만져지는 것은 몇 장의 지폐와 이진우의 연락처가 적힌 종이였다. 지금은 광석을 확인할 때가 아니었다. 물이 멎으면 그보다 먼저 무너질 것이 너무 많았다.

"점검표는 계속 붙여 둬요. 돌아오면 바로 갈죠."

소희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다만 종이를 건네던 손을 거두며 낮게 말했다.

"정확한 걸 가져올 수 있으면. 이번에는 제발 비슷한 거 말고."

"비슷한 걸로 버티게 만든 건 나도 싫습니다."

열두 시간이 차자 민혁은 비상 계단의 어둠 속에서 청동 문고리가 풀리는 감각을 기다렸다. 어깨에 멘 빈 가방이 가벼운 만큼 마음은 가라앉았다.

푸른 균열을 넘은 뒤 마포의 공기는 너무 깨끗해서 오히려 낯설었다. 민혁은 휴대폰에 소희가 적은 치수를 띄운 채 골목의 설비 자재점으로 들어갔다.

점원은 종이를 한참 들여다보더니 선반 안쪽에서 흰 원통 두 개를 꺼냈다. 포장 비닐 위에는 작은 글씨와 화살표가 빼곡했다.

"구형 하우징에 쓰던 규격이네요. 요즘은 잘 안 나가는데 아직 남은 게 있습니다. 이 패킹이 맞고요."

민혁은 카트리지를 손에 올려 봤다. 하나씩은 가벼워 보여도 두 개와 패킹 봉투를 합치니 묵직했다. 그는 점원에게 포장 상자를 빼 달라고 부탁했다.

"필터 두 개면 되겠어요?"

"당장은요."

점원이 진열대 옆의 정수용 알약 통을 가리켰다.

"물색이 이상한 곳이면 전처리도 해야 합니다. 필터는 흙이나 녹 같은 걸 거르는 거지 안 보이는 것까지 해결해 주진 않아요."

민혁은 알약 통을 잠시 보다가 내려놓았다. 소희가 말한 소독 단계에는 이미 다른 약품과 시간이 필요했다. 모르는 물건을 급하게 섞는 것은 필터가 막힌 것보다 위험할 수 있었다.

"필요한 건 따로 있습니다."

계산을 마친 그는 식료품점으로 가지 않았다. 가방 속 무게와 소희의 공책에 적힌 ‘하나는 남겨야 해’라는 말이 저울처럼 버텼다. 에너지바 몇 개만 계산대 옆에서 집었다.

유리문을 나서자 길 건너 주차선에 검은 승용차가 서 있었다.

앞 유리에 비친 하늘 때문에 안쪽은 보이지 않았다. 감정소 근처에서 봤던 세단과 같은 차인지 민혁은 확신하지 못했다. 번호판까지 확인하려고 길을 건너는 순간 상대는 자신이 들켰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민혁은 가방 끈을 고쳐 잡고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편의점 앞에서 생수 한 병을 산 뒤 계산대 옆 쓰레기통에 영수증을 버렸다. 이어 사람들이 많은 버스 정류장을 지나 낡은 상가의 계단으로 들어갔다.

계단참 창문 너머로 도로를 보았을 때 검은 차는 처음 자리에 없었다.

사라진 차가 자신을 따라온다는 증거는 없었다. 그렇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넘길 수도 없었다. 민혁은 카트리지 포장을 다시 눌러 가방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이 물건이 누군가의 눈에는 단순한 필터가 아니라 자신이 어디까지 준비할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표식일지 모른다.

송도의 보일러실로 돌아왔을 때 출수관은 가느다란 실처럼 물을 흘리고 있었다.

소희는 필터 통 앞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양동이에는 역세척한 검은 물이 절반쯤 차 있었다. 그녀는 균열이 닫히자마자 민혁의 가방만 보았다.

"맞아?"

민혁이 포장을 꺼냈다. 소희는 비닐을 뜯지 않은 채 카트리지의 길이와 고정 홈을 살폈다. 굳어 있던 입술이 아주 조금 풀렸다.

"맞아. 두 개나 가져왔네."

"하나는 남겨야 한다면서요."

소희는 대답 대신 렌치를 집었다.

"그러면 물부터 끊어. 이건 누수 나기 전에 해야 해."

민혁이 메인 밸브로 다가가자 보일러실 천막이 들렸다. 윤대섭이 장부를 품에 안고 들어왔다. 뒤에는 장재복이 서 있었다.

대섭의 시선은 새 카트리지 포장에서 멈췄다.

"또 새 상자네. 이런 건 창고에 넣고 기록부터 하는 게 순서 아니야?"

"기록은 합니다. 설치 수량부터요."

"그 기록을 네가 쥐겠다는 거지. 공용 물자면 공용 장부에 들어가야 해."

통로의 주민 몇 명이 천막 틈으로 안을 들여다봤다. 물이 약해진 이유를 모르는 얼굴들이었다. 대섭은 그 시선을 향해 일부러 말을 높였다.

"누군가는 물을 가져오고 누군가는 물을 기다려. 그러면 들어온 물자가 몇 개인지는 다 알아야 공평하지 않겠어?"

민혁은 대섭을 보다가 필터 통을 보았다. 지금 말싸움에 시간을 쓰면 안 됐다. 물길을 멈추는 손은 장부를 든 손보다 먼저 움직여야 한다.

"공용 장부에 적으세요. 다만 이 카트리지는 설치 전에는 창고로 안 갑니다. 지금 빼면 라인이 멎습니다."

"내가 멎게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그럼 옆에서 보십시오. 사용한 수량과 남은 수량을 소희 씨가 읽어 줄 겁니다."

소희가 필터 통 위의 잠금쇠를 풀었다. 민혁은 메인 밸브를 닫고 배출 밸브를 열었다. 통 안에 남은 물이 발등을 적셨다.

낡은 카트리지가 빠져나오는 순간 검은 진흙 같은 찌꺼기가 손등에 묻었다. 소희는 역세척 연결부를 붙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세게 밀면 안쪽이 찢어져."

민혁이 수동 펌프를 눌렀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두 번째 압력을 넣자 배출 호스가 꿈틀거렸고 검은 물덩이가 양동이 안으로 밀려 나왔다.

장재복이 한 걸음 다가왔다. 소희가 즉시 말했다.

"선 넘지 마. 호스 빠지면 네 발등부터 젖어."

재복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물러났다. 대섭은 장부를 펴고도 한 줄을 쓰지 못했다. 어떤 물건이 얼마나 쓰이는지 모르는 사람이 숫자만 먼저 적을 수는 없었다.

세 번의 역세척 뒤 물빛이 옅어졌다. 소희는 낡은 카트리지를 옆 양동이에 내려놓고 새 카트리지를 하우징에 밀어 넣었다. 민혁은 새 패킹 두 장을 홈에 맞춰 눌렀다.

"비틀지 말고."

"안 비틉니다."

"지금 손에 힘 들어갔어."

소희의 말에 민혁은 숨을 한번 고르고 손목을 풀었다. 패킹 가장자리가 고르게 들어간 것을 확인한 뒤에야 덮개를 닫았다.

소희가 렌치를 돌리다 멈췄다. 그녀의 시선이 우회 밸브 쪽으로 향했다.

밸브 손잡이 아래에는 원래 끊어지지 않은 철사가 감겨 있어야 했다. 지금은 철사가 한 번 잘린 뒤 서툴게 꼬여 있었다. 녹슨 끝의 색도 다른 부분보다 밝았다.

"이거 누가 만졌어."

민혁도 몸을 낮춰 철사를 보았다. 굳이 손댈 이유가 없는 곳에 손이 갔다는 사실은 남았다.

대섭이 미간을 찌푸렸다.

"나를 보는 거야?"

"아무도 안 봅니다. 그래서 더 기록해야죠."

민혁은 작업대 위의 공책을 펼쳤다. 소희가 젖은 장갑을 벗고 옆에 섰다.

‘2번 라인. 필터 카트리지 1 설치. 내압 패킹 2 사용. 예비 카트리지 1.’

소희는 그 아래에 필터 전후 압력 숫자와 점검 시간을 적었다. 그리고 우회 밸브 칸에 짧게 덧붙였다.

‘봉인 철사 훼손 확인. 재봉인.’

"이 종이는 통로에 붙일 겁니다."

민혁의 말에 대섭이 코웃음 쳤다.

"종이 한 장 붙이면 공용이 되나?"

"누가 뭘 썼는지 모르는 장부보다 낫습니다. 물이 왜 줄었고 누가 다시 돌렸는지도 같이 적히니까."

소희가 밸브 손잡이를 잡았다.

"돌린다."

민혁은 메인 밸브를 아주 조금 열었다. 필터 통 안으로 물이 차오르는 소리가 낮게 울렸다. 입구 쪽 바늘이 먼저 움직이고 출구 쪽 바늘이 뒤따라 올랐다.

바늘이 안정선에 멈추자 소희가 출수관 아래 컵을 받쳤다. 처음 물은 희미하게 갈색이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바닥에 버렸다.

두 번째 물도 버렸다. 세 번째 물은 컵 바닥의 흠집까지 보일 만큼 맑았다.

통로에서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물통을 든 여자가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왔다. 소희는 컵의 물을 건네지 않고 출수관 아래 다른 통을 받쳤다.

"처음 열 통은 소독 단계 거친 뒤에 나가요. 줄은 그대로 서 있어요."

불만이 터질 법한 말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컵 속 물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다리는 이유가 적혀 있고 보이면 버티는 시간도 달라진다.

민혁은 통로 벽에 점검표를 붙였다. 젖은 벽이라 테이프가 바로 떨어질 듯했지만 소희가 철사로 모서리를 묶어 줬다.

대섭은 그 모습을 한참 보고 있다가 장부를 덮었다.

"좋아. 오늘은 그렇게 해."

그의 목소리는 물이 나온 뒤라 더 차분했다.

"대신 다음 배급 회의에 안건을 올리지. 쉘터에 들어오는 물자는 전부 신고한다. 식량도 부품도 예외 없이. 누가 들여왔는지와 어디에 뒀는지 공용 장부에 적게 만들 거야."

장재복은 대섭의 뒤에서 작업대 아래를 힐끗 봤다. 예비 카트리지가 든 봉투는 이미 소희의 공구함 맨 아래로 옮겨져 있었다.

민혁은 그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공구함을 잠그지 않았다. 대신 공책 마지막 줄에 보관 위치가 아닌 다음 점검 시간을 적었다.

숨길 물건만 늘리면 결국 누군가가 그 물건을 찾는다. 물자를 지키려면 누가 어떤 이유로 쓰는지 더 많은 사람이 알게 해야 했다.

다만 대섭의 장부가 출처까지 캐묻기 시작하면 그 원칙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맑아진 물이 통 안을 채우는 동안 대섭은 장부의 새 페이지 맨 위에 천천히 적었다.

‘미신고 물자.’

그 글씨가 물보다 먼저 쉘터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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