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8화: 규격이 맞는 길
민혁은 철물점 앞에서 휴대폰 화면을 껐다.
한소희가 적어 준 치수는 짧았다. 나사산의 지름. 관 바깥 폭. 패킹의 두께.
그 숫자 몇 개가 맞지 않아서 2번 라인은 지금도 젖은 천 조각과 억지로 감은 고무 위에서 버티고 있었다. 틀린 부품 하나는 송도에서 물길 하나를 멈춘다.
민혁은 큰 간판이 달린 설비 자재점을 지나쳤다. 감정소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골목 안쪽의 작은 배관 자재점으로 향했다. 유리문이 낡아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곳이었다.
길을 건너기 전에 뒤를 한 번만 봤다.
검은 세단은 감정소 앞이 아니라 조금 떨어진 편의점 옆에 서 있었다. 짙은 유리 때문에 운전석에 누가 있는지는 보이지 않았다.
민혁은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확인하려고 멈추는 행동부터가 상대에게 답이 될 수 있었다.
자재점 안은 금속과 기름 냄새가 났다. 벽면에는 크기가 제각각인 밸브와 나사 부속이 투명한 봉투에 매달려 있었다. 민혁은 휴대폰에 저장해 둔 사진과 치수를 계산대 위에 띄웠다.
"이 관에 맞는 어댑터가 있습니까?"
주인은 화면을 가까이 들여다봤다. 돋보기 안경을 고쳐 쓴 뒤 선반 뒤편으로 들어갔다.
"오래된 산업용 라인 같네요. 나사산이 지금 쓰는 것보다 얕아요. 딱 맞는 건 없고 변환 소켓을 하나 사이에 넣어야 합니다."
그는 손톱만 한 황동 부속과 회색 금속 소켓을 꺼냈다. 민혁은 소희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던 낡은 관 끝을 떠올렸다.
"물 압력이 좀 있습니다."
"그럼 일반 패킹 쓰면 안 돼요. 내압용으로 가세요. 물이 더럽거나 열이 들쭉날쭉하면 싼 고무는 빨리 삭습니다."
주인은 검은 패킹 봉투와 스테인리스 호스 클램프를 함께 올렸다. 마지막으로 손바닥만 한 압력계를 계산대 위에 놓았다.
"이것도 달아야 하고요. 규격이 맞아도 압력을 모르고 돌리면 제일 약한 곳부터 터집니다."
민혁은 압력계의 유리판을 들여다봤다. 숫자와 바늘 하나뿐인 물건이었다. 하지만 소희가 밤새 압력계를 살피던 모습이 떠올랐다. 눈이 없으면 기계는 고장 난 뒤에야 소리를 낸다.
"어댑터 두 개. 패킹은 열 묶음. 클램프도 주세요."
"같은 작업장에 쓰는 거예요?"
민혁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여러 군데를 다녀서 예비분이 필요합니다."
주인은 더 묻지 않았다. 민혁은 상자째 받지 않고 포장을 나눠 종이봉투에 담아 달라고 했다. 물건 값보다 중요한 것은 각 봉투의 무게였다.
계산을 마친 뒤 그는 영수증을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부품 무게는 여섯 킬로그램 남짓이었다. 남은 공간에는 먹을 것을 채울 수 있었다.
그는 두 골목 떨어진 생활용품점으로 들어갔다. 생수는 작은 병으로 골랐다. 큰 묶음은 무게가 싸게 느껴져도 쉘터 통로에 내려놓는 순간 너무 많은 시선을 끈다.
참치 통조림과 즉석 죽, 건조 식량, 에너지바를 카트에 나눠 담았다. 뜨거운 물만 있으면 먹을 수 있는 컵 식량도 몇 개 넣었다. 민혁은 손을 뻗었다가 멈춘 물건을 두 번이나 선반으로 돌려놓았다.
먹을 것은 모자라다. 하지만 부품이 없으면 내일은 더 많은 사람이 물을 잃는다.
계산대 옆에서 그는 봉투를 바닥에 내려놓고 손으로 들어 봤다. 부품 여섯 킬로그램. 물 열여섯 킬로그램. 식량과 포장까지 합쳐 스물여섯 킬로그램.
합계는 마흔여덟 킬로그램을 조금 넘었다.
가슴 안쪽의 청동 문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래도 민혁은 물 한 병을 더 넣지 않았다. 한도 가까이에서 남겨 두는 여유는 겁이 아니라 다음 움직임을 위한 값이었다.
생활용품점 유리문을 나서자 검은 세단의 엔진 소리가 들렸다.
차는 이번에는 길 건너가 아니라 골목 입구 쪽에 있었다. 민혁은 짐을 든 채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정류장 광고판 뒤를 돌아 반대편 인도로 건넌 뒤 다시 골목으로 들어갔다.
세단은 천천히 앞으로 나왔지만 좁은 골목 앞에서 멎었다. 민혁이 비상 계단이 있는 낡은 빌딩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 차는 더 따라오지 않았다.
쫓는 차인지 단정할 수는 없었다. 우연히 같은 길을 지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우연이라면 두 번이나 같은 방향을 볼 이유가 없다. 이진우가 말한 냄새 맡는 사람은 돌 하나만 따라다니지 않는 모양이었다.
민혁은 계단참에 짐을 내려놓고 시간을 확인했다. 청동 문이 열릴 때까지는 아직 조금 남아 있었다. 그는 종이봉투 하나를 열어 어댑터의 나사산을 다시 만져 봤다.
이 작은 부품은 누구도 빼앗기지 않게 숨길 수 있다.
하지만 물이 흐르기 시작하면 숨긴 물건만으로는 아무것도 지킬 수 없다. 결국 누가 열고 누가 닫을지 정할 사람도 필요해진다.
열두 시간이 찼을 때 가슴 안쪽에서 문고리가 풀리는 감각이 왔다.
민혁은 짐을 어깨에 걸었다. 푸른 균열이 계단참의 어둠을 조용히 갈랐다.
송도의 보일러실에 발을 디디자 축축한 공기가 목구멍을 훑었다. 현대의 세제 냄새와 따뜻한 조명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대신 녹슨 철과 고인 물, 오래 씻지 못한 옷 냄새가 밀려왔다.
한소희는 2번 라인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젖은 작업복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은 채 낡은 이음새를 보고 있었다.
그녀는 균열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고개를 들었다.
"늦었네. 아직 안 터졌어. 대신 패킹이 울기 시작했어."
"울어요?"
"압력 걸릴 때 미세하게 밀린다는 말이야. 소리 나기 시작하면 곧 찢어져."
민혁은 종이봉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번에는 맞는 걸 가져왔습니다."
소희의 손이 멈췄다. 그녀는 어댑터를 꺼내 기존 관 끝에 대 봤다. 한 번 돌리자 나사산이 걸렸다. 두 번 더 돌리자 금속이 헛돌지 않고 깊이 들어갔다.
소희가 아주 작게 숨을 내쉬었다.
"맞아."
그 한마디에 민혁의 어깨가 조금 내려갔다.
소희는 내압 패킹 봉투를 뜯고 압력계를 들었다. 눈빛이 다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까지 있으면 예비 이음새도 만들 수 있어. 다음에 필터 갈 때 관을 잘라 낼 필요가 없어."
"그럼 바로 합시다."
"네가 물부터 퍼. 바닥 마르면 관 받칠 자리부터 잡아야 해."
민혁은 양동이를 들고 바닥 홈에 고인 물을 퍼 냈다. 얼음처럼 찬 물이 장갑 안으로 스며들었다. 소희는 낡은 밸브 옆 관을 분리하고 황동 소켓을 끼웠다.
"빛 왼쪽. 아니 더 위. 네 그림자 때문에 나사산이 안 보여."
"말을 한 번에 해 주세요."
"지금 한 번에 하고 있거든."
툴툴거리는 목소리와 달리 소희의 손은 빨랐다. 새 패킹이 자리를 잡자 그녀는 클램프를 조이고 압력계를 옆 관에 고정했다. 바늘이 아직 영점에 붙어 있었다.
"이 선을 넘으면 멈춰요. 내가 없을 때도요."
소희가 붉은 펜으로 유리판 옆에 짧은 선을 그었다.
"누가 와도요?"
"누구라도. 특히 장부 들고 와서 물 더 틀라는 사람."
바로 그때 보일러실 입구에서 헛기침이 들렸다.
장재복이 천막을 젖히고 서 있었다. 그 뒤에는 윤대섭이 낡은 장부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대섭의 눈은 민혁의 젖은 장갑이 아니라 아직 열지 않은 식량 봉투를 향했다.
"새 상자가 또 들어왔네."
대섭이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
"이번에는 공용 창고에 넣자. 물은 다 같이 쓰는 거고 식량도 다 같이 먹어야지."
민혁은 봉투 하나를 발끝으로 뒤로 밀었다.
"지금 설치할 부품입니다."
"설치하고 남는 건?"
"다음에 고장 나면 다시 쓸 겁니다."
대섭은 장부를 펴지 않은 채 말했다.
"그건 네 판단이고. 쉘터에 들어온 물자는 쉘터 물자야. 그래야 누가 굶고 누가 마시는지 공평하게 정하지."
통로 쪽에 사람들이 모여든 기척이 났다. 물통을 든 손들이 천막 틈으로 보였다. 대섭은 그들을 의식한 목소리였다.
민혁은 대섭의 말을 바로 부정하지 않았다. 배급이 공평해야 한다는 말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문제는 대섭의 장부에 적히는 순간 고장 난 관을 고칠 부품까지 배급표와 맞바꿔야 한다는 점이었다.
한소희가 렌치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공용이면 당신이 이거 조립할 수 있어요?"
대섭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조립은 네가 하지. 나는 관리하겠다는 거야."
"관리하려면 고장 났을 때도 여기 있어야지. 패킹 하나 없어서 라인이 멎으면 장부가 물을 만들어 줘?"
통로 밖이 조용해졌다. 사람들은 대섭보다 2번 라인이 멎었던 밤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섭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서 숨기겠다는 거냐?"
민혁이 펌프 옆에 쌓인 새 부품을 가리켰다.
"숨기는 게 아닙니다. 정비 물자로 따로 기록하자는 겁니다. 소희 씨가 필요 목록을 적고 설치한 수량도 적습니다. 물이 나오는 이유까지 장부에 남겨야 다음에도 고칠 수 있으니까."
"그 기록을 누가 쥐는데?"
"고칠 줄 아는 사람이요."
대섭의 입가가 굳었다. 그는 민혁에게서 소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소희는 압력계 아래에 점검 시간과 멈출 눈금을 적은 종이를 붙이고 있었다.
민혁은 식량 봉투를 열었다. 에너지바와 통조림, 즉석 죽이 차례로 바닥에 놓였다. 통로 밖에서 누군가 숨을 삼켰다.
"이건 오늘 나눕니다."
대섭이 곧바로 손을 내밀었다.
"그럼 장부에 올려. 내가 배급할게."
민혁은 통조림 하나를 집어 들었다.
"먼저 여기서 물 퍼 내고 관 받친 사람들 몫을 빼겠습니다. 그다음 줄 선 사람들에게 같은 수량으로 나눠요. 남는 건 다음 작업 때 쓸 식량으로 소희 씨 목록에 적습니다."
"일한 사람만 먹겠다는 소리로 들리는군."
"오늘 일한 사람부터 먹고 내일도 일할 수 있게 하겠다는 말입니다. 줄 선 사람 몫을 없앤다는 뜻은 아니에요."
민혁은 입구의 아이를 보았다. 빈 컵을 든 아이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는 에너지바 하나를 아이에게 먼저 건넸다. 아이가 바로 포장을 뜯지 못하고 옆의 여자 쪽을 바라봤다. 민혁은 나머지 봉투를 통로 바닥에 내려놓았다.
"한 사람씩 받으세요. 물통을 들고 줄 섰던 순서대로. 대신 보일러실 안에는 들어오지 마십시오. 작업이 멎으면 내일은 이것도 못 가져옵니다."
대섭의 얼굴에서 잠깐 웃음이 사라졌다. 민혁이 주민들 앞에서 식량을 던져 주는 대신 자기 몫을 만들고 있다는 걸 알아챈 표정이었다.
소희가 밸브 손잡이를 잡았다.
"이제 돌린다."
민혁은 펌프를 천천히 밀었다. 관 안에서 오래 잠든 쇳소리가 낮게 울렸다. 압력계 바늘이 영점에서 떨리며 올라갔다.
소희는 바늘만 바라봤다.
"조금 더. 아니 거기. 멈춰."
민혁은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이음새는 젖지 않았다. 새 패킹 가장자리에 맺혔던 물방울도 더 커지지 않았다.
출수관 아래 컵을 받치자 처음에는 탁한 물이 흘렀다. 소희가 그 물을 바닥으로 버렸다. 두 번째 물줄기에는 녹빛이 옅었고 세 번째부터는 컵 바닥이 보일 만큼 맑아졌다.
소희가 예비 연결부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다음에는 여기만 풀면 돼. 필터가 막혀도 관을 자를 필요 없어."
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겨우 어댑터 하나와 패킹 몇 장이었다. 하지만 다음 고장 때 하루를 통째로 잃지 않아도 되는 길이 생겼다.
그 길은 물이 흐르는 관보다 먼저 사람들 사이에 생겨야 했다.
대섭은 장부를 천천히 덮었다.
"좋아. 오늘은 네 정비사 말대로 하지."
그는 출수관에서 떨어지는 물을 잠깐 보았다.
"대신 다음 배급 회의부터는 들어오는 물자 전부 신고하게 만들 거야. 물이든 식량이든 부품이든. 누가 무엇을 들여오는지 알아야 쉘터가 굴러가니까."
"그 규칙을 누가 정합니까?"
"줄 서는 사람들이 정하겠지. 배고픈 사람 앞에서 네가 계속 혼자 결정할 수 있을지 보자고."
대섭은 재복을 데리고 통로 밖으로 나갔다. 재복은 나가기 전에 종이봉투가 있던 자리를 한 번 더 훑었다.
소희는 대섭의 뒷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고는 압력계 아래 종이를 손가락으로 눌러 붙였다.
"저 사람은 부품을 몰라도 장부 쓰는 법은 알아."
"그래서 우리도 기록해야죠."
민혁은 젖은 장갑을 벗었다. 소희가 쓰다 만 공책을 가져와 새 페이지를 폈다.
‘2번 라인. 변환 소켓 1. 내압 패킹 2. 클램프 2. 압력계 1.’
그 아래에 소희가 작은 글씨로 덧붙였다.
‘점검 시간. 아침과 밤.’
"식량도 적을 거야?"
"오늘 나간 것만요. 남는 건 작업 식량으로 따로 적고요."
"대섭이 또 뭐라고 하겠네."
"그럴 겁니다."
민혁은 대답하며 통로의 줄을 바라봤다. 에너지바 포장을 뜯는 소리와 물통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좁은 지하에 함께 울렸다.
그는 봉투 속에 남은 어댑터 하나를 작업대 아래 빈 철통 안에 넣었다.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다음에 누군가 물을 더 달라고 관을 억지로 돌릴 때 다시 고칠 수 있게 남겨 두는 것이었다.
다만 대섭이 예고한 회의가 열리면 그 철통 하나를 지키는 일도 지금보다 어려워질 것이다.
배급 장부가 보급품의 출처를 묻기 시작하는 순간, 민혁이 열두 시간마다 오가는 길도 더 좁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