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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10화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아포칼립스에서 평화로운 지구로 출퇴근합니다

10화: 안개 너머의 지도

보일러실 수증기 너머로 윤대섭의 목소리가 묵직하게 쳐들어왔다.

"오늘 아침 배급 회의 안건은 분명합니다. 쉘터 울타리 안으로 유입된 모든 물자는 출처를 불문하고 공통 관리 장부에 올려야 합니다."

대섭은 모서리가 다 닳은 배급 장부를 가슴 앞으로 바짝 당겨 쥐었다. 그 뒤에 선 장재복이 통로 쪽에 줄을 선 주민들을 향해 끊임없이 눈짓을 보냈다. 어제 2번 정화 라인에서 맑아진 물을 받아 갔던 생존자 몇몇이 불안한 기색으로 발끝을 굴렸다.

민혁은 2번 라인 옆 축축한 시멘트 벽에 걸린 점검표를 천천히 정돈하며 대섭을 마주 보았다.

"정화 라인에 설치된 변환 소켓과 패킹 그리고 남은 예비 카트리지는 이미 소희 씨의 정비 기록부에 정확히 올려 두었습니다. 정비 물자까지 배급 장부에 합쳐서 창고로 옮기면 다음 고장 때 제때 관을 고칠 수 없습니다."

"적어 두는 것과 관리 주체는 전혀 다른 문제지."

대섭이 장부 첫 장을 탕 소리가 나게 덮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도 밝히지 못하는 물건을 특정 개인 둘이서 쥐고 흔드는 건 쉘터 전체를 위협하는 일이다. 주민들은 여전히 식량이 모자라 하루 한 끼로 버티는데 혼자 물자를 쥐고 선심 쓰듯 나누는 건 쉘터의 오랜 질서를 무너뜨리는 행위다."

통로를 가득 채운 공기가 묘하게 일렁였다. 만성적인 굶주림과 오염수 공포에 지친 생존자들에게 '공평한 배급'이라는 단어는 언제나 강렬한 환각으로 다가왔다. 재복이 대섭의 말을 기회 삼아 주민 선동을 시도하려던 바로 그때였다.

묵직한 군화 발소리가 보일러실 입구의 고인 물을 바싹 짓밟았다.

"글자 몇 줄 장부에 적는다고 빈 곡간에 쌀가루가 가득 차나?"

낡은 전술 조끼에 손때 묻은 산탄총을 비스듬히 걸친 남자가 천막을 거칠게 밀어제쳤다. 송도 지하 쉘터의 방위대장이자 스캐빈저 현장 팀을 총괄하는 박태우였다. 굵직한 화상 흉터가 관자놀이를 지나는 태우의 얼굴은 거친 바위처럼 단단했다.

태우의 서늘한 시선이 대섭이 쥐고 있는 배급 장부를 무겁게 훑었다.

"대섭 씨. 지금 중앙 창고에 남은 게 뭔지 진짜 몰라서 이러는 거요? 곰팡이 뒤덮인 건포도 몇 알이랑 흙물 섞인 배급수가 전부잖아. 강민혁이가 목숨 걸고 부품 구해 오지 않았으면 어제 밤부터 이 쉘터는 오염수 마시고 피 뿜었어."

대섭의 미간이 깊게 파였다.

"박 대장. 방위대도 쉘터 합의 규칙 안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오? 물자 출처와 정체를 모르면……."

"출처보다 중요한 건 내일 당장 입에 넣을 식량이랑 쉘터 정화 필터야."

태우는 대섭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렸다. 그는 민혁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억센 손으로 민혁의 어깨를 툭 쳤다.

"민혁이 너. 이번 구 송도 신도시 중심부 탐색대에 합류해라."

보일러실 내부가 순간 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구 송도 신도시 중심부는 붉은 독 안개가 가장 짙게 웅덩이처럼 고여 있는 최악의 고위험 오염 구역이었다.

대섭이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중심부 탐색이라니? 거기는 스포어 변종 둥지나 다름없소! 방위대 정예 대원만 가기로 한 원정 아니었소?"

"정예만 가기에는 거기가 너무 깊고 위험해."

태우 허리춤의 단도를 고쳐 매며 민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중심부 국립 바이오 연구소 파지에 멸망 전 사용되던 고농도 마력 코어랑 밀폐 보존된 군용 의료 자원이 남아 있다는 첩보가 들어왔다. 그 마력 코어 하나만 확보하면 우리 쉘터 정화기 전체를 한 달 넘게 무보수로 가동할 수 있어. 민혁이 녀석은 몸이 빠르고 귀한 부품을 알아채는 눈이 있다. 같이 간다."

민혁은 태우의 눈빛에서 단단하고 냉정한 계산을 읽었다. 윤대섭이 배급 장부를 핑계로 자신을 죄어오는 상황에서 외부 원정 탐색은 위험하지만 확실한 돌파구였다. 스캐빈저 정예 팀과 함께 오염 구역 깊숙이 들어가 고가치 자원을 확보한다면 쉘터 내부의 발언권은 물론이고 현대 서울에서 거래할 마석 자산도 비약적으로 늘어날 것이 분명했다.

민혁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합류하겠습니다."

대섭은 차가운 눈으로 민혁과 태우를 번갈아 보았지만 더는 반대 명분을 찾지 못하고 장부를 쥔 채 발길을 돌렸다.


방위대 무기 정비소는 냄새부터 보일러실과 달랐다. 억센 총기 기름과 낡은 전술 가죽 냄새, 그리고 오염 구역에서 묻혀 온 씁쓸한 포자 냄새가 짙게 섞여 있었다.

박태우는 금속 작업대 위에 송도 구 시가지의 조잡한 손지도를 넓게 펼쳐 놓았다. 지도 중심부에는 붉은색 X 표시가 커다랗게 그어져 있었다.

"중심부는 안개가 바로 앞 손가락도 안 보일 만큼 덮인다. 일반 방독면 필터는 두 시간이면 포자에 막혀서 숨이 타들어 가지. 게다가 청각이 미친 듯이 발달한 스포어 울프 떼가 건물 잔해 사이를 떼 지어 돌아다닌다."

태우가 민혁의 낡은 군장과 허리춤의 대검을 눈으로 까다롭게 살폈다.

"너 물건 줍는 솜씨는 들었다만 오염 구역 깊은 곳은 일반 쓰레기장이 아니다. 총소리 한 번 잘못 내면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변종 마수들이 몰려들어. 살아남는 실전 감각이 없으면 너부터 버리고 튄다."

민혁은 말없이 가방 주머니에서 굵은 야전 로프와 소희가 다듬어 준 세라믹 절단 대검을 꺼내 작업대 위에 놓았다. 그리고 로프 끝을 이중 매듭으로 신속하게 묶어 고리를 만든 뒤 주위 철제 구조물에 단단히 걸어 보였다.

"소리 안 나는 도구부터 씁니다. 시야가 막히면 섣불리 뛰지 않고 무조건 건물 잔해 벽면을 따라 이동하겠습니다."

태우의 굵은 눈썹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민혁의 손놀림에는 쓸데없는 군더더기가 전혀 없었다. 사선을 수없이 넘어본 스캐빈저 특유의 침착함이 손끝에 묻어났다.

"좋다. 매듭 묶는 손이 안 떨리는 걸 보니 헛소문은 아니었군."

태우는 지도 한 귀퉁이를 손가락으로 묵직하게 두드렸다.

"바이오 연구소 지하 2층에 기밀 보관고가 있다. 거기 마력 코어랑 정밀 부품이 남아 있다면 쉘터의 목숨줄이 된다. 짐 정리해라. 출발은 내일 아침 안개가 약간 옅어지는 시점이다."

"알겠습니다."

민혁은 정비소를 나오며 가슴 안쪽을 가만히 느꼈다. 차원 문고리가 느슨하게 풀리는 감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푸른 균열이 조용히 닫히고 마포 비상 계단의 서늘한 조명이 민혁의 시야를 채웠다.

이번 이동은 단순히 라면이나 생수를 사러 온 것이 아니었다. 독성 안개가 자욱한 신도시 중심부 탐색은 목숨을 건 전술 원정이었다. 몸에 걸치는 모든 장비가 생명과 직결되었다.

민혁은 이진우가 경고했던 감시의 눈길을 철저히 의식했다. 마포 감정소 근처를 피하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신촌과 용산의 아웃도어 및 특수 전술 매장으로 동선을 크게 우회했다.

전술 장비 상점의 환한 조명 아래에서 민혁은 장비들을 신중하게 골라냈다.

가장 먼저 챙긴 것은 특수 내화학성 밀폐 고글이었다. 안개 속 독성 포자가 눈에 들어가면 시력을 잃는다. 그다음에는 야간 및 짙은 안개 속에서도 빛을 좁게 모아 쏠 수 있는 내충격 전술 라이트, 그리고 전술 가죽 장갑과 고강도 압박 붕대를 카트에 담았다.

화학 방제 도매 상점에서는 휴대용 방독면 교체 필터 어댑터와 정밀 부품 조립용 소형 드라이버 세트를 확보했다. 소희가 보일러실과 정화 장치를 다룰 때 유용하게 쓸 물건이었다.

마지막으로 고열량 전술 전투 식량과 깨끗한 밀봉 수액 알약을 챙겼다.

물건들의 무게를 손으로 꼼꼼히 측정했다.

'고글과 필터류 세 킬로그램. 전술 라이트와 조명류 네 킬로그램. 장갑, 로프, 압박 붕대 다섯 킬로그램. 소희용 공구 및 부품 여섯 킬로그램. 식량과 생수 묶음 스물일곱 킬로그램.'

합계 마흔아홉 킬로그램. 청동 문이 조여드는 한도 직전의 무게였다.

민혁은 짐을 든 채 무작위로 여러 골목을 건너뛰며 뒤를 확인했다. 검은 세단이나 이상한 추적자의 기척은 보이지 않았다. 준비는 끝났다.

열두 시간이 다 차자 가슴 속 청동 문이 묵직하게 열렸다.


송도 보일러실로 돌아오자 소희가 렌치를 든 채 기다리고 있었다.

민혁은 가방에서 섬세한 정밀 드라이버 세트와 내화학성 밀폐 고글을 꺼내 작업대 위에 내려놓았다.

소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드라이버의 정밀한 나사 홈과 투명한 고글 렌즈를 손끝으로 만져보는 소희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거…… 유리에 스크래치 하나 없어. 렌즈 안쪽에 김 서림 방지 코팅까지 되어 있고."

"오염 구역 탐색에 쓰려고 구했습니다. 드라이버는 2번 라인 보수할 때 쓰세요."

소희는 고글을 이마에 걸쳐 쓰고는 벽에 붙인 점검표를 턱으로 가리켰다.

"2번 라인은 내가 잘 보고 있을 테니까. 탐색대 나갔다가 괜히 무리해서 다치지 마. 살아서 돌아와서 이 점검표 다음 줄에 직접 서명해야 하니까."

투박하지만 확실한 당부였다. 민혁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보일러실을 나오자 쉘터 출입구 셔터 앞에 박태우와 스캐빈저 대원 네 명이 무장을 마치고 서 있었다. 대섭이 멀찍이 서서 민혁의 튼튼해진 전술 배낭을 차가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돌아오지 못하면 그 배낭 속에 든 물건은 모조리 공용 장부에 적힐 거다."

대섭의 중얼거림을 뒤로하고 민혁은 태우의 옆에 섰다.

태우가 쇠사슬 레버를 당기자 찌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육중한 철제 셔터가 위로 올려졌다.

셔터 너머로 피어오르는 붉은 독 안개가 혀를 핥듯 쉘터 입구까지 밀려 들어왔다. 저 멀리 구 송도 신도시 중심부의 피비린내 나는 안개 속에서 정체불명의 스포어 마수가 질지르는 기괴한 울음소리가 밤공기를 갈랐다.

민혁은 허리춤의 대검 손잡이를 굳게 쥐었다. 안개 너머의 위험하고도 풍요로운 세계를 향해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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