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 예정 악녀는 연금술 카페를 엽니다

7화: 증거는 향을 속이지 않는다
아델은 아몬드 껍질을 벗길 때마다 손목을 한 번씩 감쌌다.
작은 그릇 안에는 뽀얀 알맹이가 열두 개쯤 쌓여 있었다. 그 곁에는 실수로 으깨진 것들이 따로 모여 있었다. 버리지 않고 모아 둔 모양이었다.
“아프면 말해요.”
“괜찮아요. 이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엘리제는 대답 대신 아델 앞으로 미지근한 우유를 밀었다. 물에 불린 아몬드는 껍질만 벗기면 됐지만 아델의 손끝은 지나치게 차가웠다. 손목의 해진 끈 아래에서는 어젯밤보다 옅은 빛이 일정한 박자로 새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건 달라요. 열 개씩 하고 쉬세요.”
아델은 우유 잔을 두 손으로 감쌌다.
“일해서 갚는다고 했는데 쉬어도 돼요?”
“견습에게 손을 망가뜨리게 하는 점주는 손해를 크게 보는 점주예요.”
마리가 아델의 옆에 앉아 아몬드 하나를 집었다. 껍질의 끝을 살짝 눌러 밀자 알맹이가 미끄러져 나왔다.
“이렇게 하면 덜 아파요. 으깨진 건 크림에 넣으면 되니까 걱정하지 말고요.”
아델은 마리의 손을 유심히 보다가 조심스럽게 따라 했다. 두 번째 아몬드는 조금 찌그러졌지만 세 번째는 온전하게 껍질을 벗겼다. 그 작은 성공에 아델의 입술 끝이 아주 조금 올라갔다.
엘리제는 장부에 시간을 적었다. 화덕의 불꽃이 커질 때 빛이 약해졌다. 문종이 울릴 때는 한 박자 늦게 흔들렸다. 아델이 자신을 향해 웃을 때보다 누군가의 높은 목소리를 들을 때 더 크게 흔들렸다.
마력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몸이 먼저 겁을 배우면 마음보다 빨리 반응한다.
“하얀 옷을 입은 사람들이 또 오면요?”
아델의 손이 멎었다. 막 벗긴 아몬드가 그릇 가장자리에서 데굴데굴 굴렀다.
“저를 데려가겠다고 할 거예요.”
“어디로요?”
“모르겠어요. 전에 있던 곳보다 큰 데요. 거기 가면 이름을 다른 걸로 부르고 기도만 하라고 해요. 손목을 묶으면 빛이 덜 난다고도 했어요.”
아델은 말끝을 흐렸다. 해진 끈을 감싼 손가락 관절이 하얗게 질렸다.
엘리제는 펜을 내려놓았다.
“누가 와도 네가 원하지 않으면 바로 데려갈 수는 없어요. 적어도 여기서는요.”
“공녀님이 곤란해질 거예요.”
“이미 곤란한 일은 꽤 많이 겪었어요. 그래도 내 가게에서 일하는 사람의 말을 빼앗기는 건 싫어요.”
아델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 대신 아몬드를 한 알 더 집었다.
그때 문종이 거칠게 울렸다.
들어온 것은 하얀 제복의 신전 조사관 둘과 회색 망토를 걸친 영지 경비 넷이었다. 그들 사이에는 진주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있었다. 차가운 눈매 아래로 얇은 미소를 고정한 얼굴을 엘리제가 모를 리 없었다.
이사벨 드 마르셀.
밸류어 공작가의 먼 사촌이자 엘리제가 사교회를 떠난 뒤에도 끈질기게 초대장을 보내던 영애였다. 그녀는 엘리제가 카페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고작 며칠짜리 변덕이라고 웃었다.
이사벨은 카운터와 아델을 천천히 훑었다.
“역시 여기 있었군요. 공녀님은 사람을 숨기는 취미까지 생기셨나 봐요.”
“손님이 많아지면 카페에는 좋은 일이죠.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앞에 선 조사관이 천으로 감싼 꾸러미를 내밀었다. 천에는 신전의 임시 봉인이 찍혀 있었다.
“라 보나의 빵을 먹은 이가 환각 증세를 보였다는 신고가 들어왔습니다. 또한 신전의 보호 대상일 가능성이 있는 소녀를 이곳에서 발견했다는 제보도 받았습니다.”
아델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손목의 빛이 흔들리자 벽의 안정석이 낮게 울었다. 마리는 본능적으로 아델의 어깨를 감쌌다.
엘리제는 아델 앞에 한 걸음 섰다.
“빵을 검사하는 건 좋습니다. 하지만 아이는 제 손님이자 오늘의 견습이에요. 본인의 말을 듣지 않고 데려갈 수는 없어요.”
“표식이 있습니다.” 조사관이 말했다. “신전의 보호가 필요한 아이일 수 있습니다.”
“가능성만으로 사람을 물건처럼 옮기겠다는 말인가요?”
조사관의 표정이 굳었다. 이사벨이 재빨리 꾸러미를 가리켰다.
“그보다 독초부터 보세요. 피안화와 비슷한 붉은 가루가 나왔다더군요. 마력에 취한 사람에게는 환각을 일으키는 약초예요. 공녀님 카페의 과자가 사람을 홀린다는 소문이 괜히 난 건 아닐 테고요.”
엘리제는 꾸러미를 열지 않았다.
“그 물건은 어디에서 나왔죠?”
“신고자가 가져왔습니다.”
“신고자는요?”
조사관이 잠시 답하지 못했다.
“신변 보호를 요청했습니다.”
“그럼 신고 물품은 라 보나의 반죽이 아니군요. 제 반죽과 분리해 놓고 검사하죠. 원료 장부와 오늘 아침 반죽도 함께 확인하고요.”
“일반적인 압수 절차로도 충분합니다.”
“일반적인 절차라면 출처가 다른 물건을 한 상자에 넣지 않겠죠.”
엘리제는 꾸러미의 봉인을 가리켰다.
“저 봉인은 여기 있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풉니다. 빵 부스러기와 가루는 각각 유리판에 올릴 거예요. 제 반죽도 베른이 직접 꺼내고 조사관님이 봉인하세요.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누구도 만지지 않는 걸로요.”
이사벨의 미소가 아주 조금 굳었다.
“공녀님이 증거를 바꾸지 않는다는 보장은요?”
“그래서 당신 손으로 봉인하라고 했잖아요.”
짧은 침묵이 매장에 내려앉았다. 베른은 이미 원료 장부와 오늘 만든 반죽 통을 꺼내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통의 뚜껑을 열어 조사관 앞으로 내밀었다.
“입고량과 사용량입니다. 붉은 약초는 매입한 적이 없습니다.”
그때 뒷문이 열렸다. 예약 시간보다 조금 이른 레온과 에드윈이었다. 레온은 현장의 경비들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에드윈은 장면을 훑은 뒤 조용히 신분 패를 보였다.
“계약된 예약 손님입니다. 절차가 공정하다면 입회인이 있는 편이 낫겠군요.”
이사벨이 그 패를 살피다가 눈살을 찌푸렸다.
“외부인은 나가 주세요. 신전의 조사입니다.”
“외부인이 아니라 현장 입회인입니다.” 엘리제가 말했다. “당신도 카페의 손님은 아니잖아요.”
레온은 말없이 카운터 옆에 섰다. 목덜미의 보랏빛 마력선은 옅어졌지만 아직 완전히 가라앉지는 않았다. 그는 아델을 힐끗 보았고 아델은 그 시선을 느끼자 손목을 감쌌다.
엘리제는 두 사람 사이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지금은 서로의 마력이 아니라 증거의 흐름을 먼저 통제해야 했다.
“작업대 비워 주세요.”
마리는 아델을 창가의 의자로 데려갔다. 엘리제는 유리판 세 장을 꺼내 각각 숫자를 적었다. 하나는 오늘 아침 반죽. 하나는 신고 꾸러미의 빵 부스러기. 마지막 하나는 붉은 가루였다.
조사관이 직접 봉인을 끊었다. 꾸러미 안에는 으깨진 작은 빵 조각과 종이 봉지가 들어 있었다. 종이 봉지 입구에는 붉은 가루가 묻어 있었다.
엘리제는 냄새를 맡지 않았다. 독성이 의심되는 물질을 코앞에 들이대는 건 검사법이 아니라 무모함이었다. 대신 얇은 은 집게로 아주 적은 양을 덜어 각 유리판의 시작선에 올렸다.
“이건 다층 분리 서클이에요.”
이사벨이 비웃었다.
“과자 굽는 서클로 독을 가리겠다고요?”
“과자를 굽는 데도 성분을 알아야 하니까요.”
엘리제는 유리판 아래에 가느다란 마력선을 세 겹으로 그렸다. 첫 번째 선은 기름 성분을 끌어냈다. 두 번째 선은 식물 수지를 분리했다. 마지막 선은 마력 잔향만 남기도록 흐름을 늦췄다.
“같은 약초가 들어갔다면 같은 위치에 같은 색의 줄이 남아요. 원료가 달라서 생긴 향은 여기서 섞이지 못합니다.”
가마의 낮은 열이 유리판 아래로 스며들었다. 엘리제는 손등으로 온도를 가늠하며 서클의 끝을 눌렀다. 너무 뜨거우면 버터 성분이 먼저 번지고 너무 차가우면 수지가 움직이지 않는다.
금빛 선이 세 개의 시료를 지나자 색이 천천히 풀렸다.
첫 번째 반죽에서는 연한 초록빛 줄 하나와 옅은 노란 줄 두 개가 움직였다. 블루민트와 카모마일이었다. 아몬드 기름의 부드러운 띠가 그 아래에 남았다.
두 번째 빵 부스러기에서는 버터와 밀가루의 흔적이 먼저 보였다. 그러나 붉은 띠는 거의 움직이지 않았다. 빵 표면에 떨어진 가루가 얇게 묻었을 뿐 반죽 속에서 올라온 흔적이 아니었다.
세 번째 가루에서는 짙은 붉은 줄이 위까지 솟았다. 끝에는 검은 테두리가 분명하게 남았다. 환각초의 끈적한 수지와 그것을 억지로 마력에 녹인 흔적이었다.
엘리제가 마지막 서클을 닫았다.
“환각초의 수지 성분입니다. 빵에는 스며들지 않았어요. 가루에만 고농도로 있습니다.”
조사관이 유리판 앞으로 다가갔다. 그의 시선이 세 번째 판에서 두 번째 판으로 옮겨 갔다. 에드윈은 장부의 입고량을 확인했고 레온은 누구도 작업대에 손대지 못하게 조용히 서 있었다.
“이 결과가 틀렸을 가능성은?” 조사관이 물었다.
“동일한 가루를 신전 감정실에서 재검하면 됩니다. 다만 재검 전에는 이 물건을 이사벨 영애와 분리해 두세요.”
“무슨 뜻이죠?” 이사벨이 날카롭게 물었다.
엘리제는 그녀의 장갑 끝을 가리켰다. 진주빛 천 위에 작은 붉은 가루가 붙어 있었다.
“신고 물품과 같은 색이군요.”
이사벨은 얼른 손을 감췄다. 그 움직임에 옆에 서 있던 하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하녀의 소매에서는 같은 붉은 가루가 가늘게 떨어졌다.
레온이 한 걸음 움직였다.
하녀는 끝내 무릎을 꿇었다.
“저는 몰랐어요. 아가씨가 마차에서 받은 걸 주방 쪽에 두라고만 했어요. 빵 부스러기에도 묻히라고 한 건…….”
“입 다물어!”
이사벨의 고함에 아델이 움찔했다. 손목의 빛이 한순간 크게 번지며 안정석이 흔들렸다. 유리판 위의 금빛 잔재도 가늘게 떨렸다.
엘리제는 곧장 아델 앞에 놓아 둔 물컵을 잡았다.
“아델. 저를 봐요. 숨을 넷까지 세고 물을 마셔요.”
아델은 눈을 질끈 감았다. 엘리제의 손가락을 따라 천천히 숨을 들이켰다.
하나. 둘. 셋. 넷.
아델이 물을 한 모금 삼키자 손목의 빛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더 커지지도 않았다. 레온의 목덜미에 남은 보랏빛 선도 짧게 흔들렸다가 멎었다.
조사관은 이사벨과 하녀를 번갈아 보았다. 그는 아델의 손목 문양을 다시 살폈다.
“이 표식은 성녀의 확정 표식이 아닙니다. 오래전 신전 보호 시설에서 쓰던 문양과 비슷합니다. 보호가 필요할 수는 있어도 강제 동행의 근거는 되지 않습니다.”
이사벨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래도 저 아이는 위험합니다. 저런 마력을 카페에 두면 손님들이 다칠 수 있어요. 공녀님은 또 사고가 나야 멈추실 건가요?”
엘리제는 아델을 돌아보았다. 아이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했다. 도망치라고 하면 지금이라도 뛰어갈 얼굴이었다.
“아델.”
아델의 눈이 엘리제에게 향했다.
“네가 말해요. 여기 남아서 일을 배우고 싶어요?”
“제가 있어도 돼요?”
“그건 네가 결정할 일이에요. 남는다면 내 규칙을 지켜야 해요. 아프면 숨기지 않기. 무서운 사람이 오면 혼자 도망가지 않기. 마력을 다룰 때는 기록 남기기.”
아델은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껍질을 벗긴 아몬드가 담긴 그릇을 두 손으로 들었다.
“저는 여기서 일하고 싶어요.”
목소리는 작았지만 마지막 말은 흔들리지 않았다.
“도망치기만 하는 건 싫어요. 아몬드도 더 잘 벗기고 싶어요.”
마리가 눈가를 훔치며 웃었다. 베른은 장부의 새 줄을 펼쳤다.
엘리제는 조사관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들으셨죠. 치료 기록은 제가 남기고 필요하면 신전에 사본을 제출하겠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원하지 않는 동행은 허락하지 않아요.”
조사관은 잠시 침묵하다 고개를 숙였다.
“신고 물품과 관련자들은 신전 조사실로 데려가겠습니다. 소녀의 의사와 오늘의 검사 결과도 기록하겠습니다.”
이사벨은 떠나기 전 엘리제를 노려보았다.
“고작 카페 하나로 공작가의 이름을 더럽히는군요.”
“아니요. 이름을 더럽힌 건 독초를 들고 온 쪽이죠.”
문이 닫힌 뒤에야 라 보나 안에 숨소리가 돌아왔다.
베른은 신고 물품을 다시 봉인하다가 손을 멈췄다. 천 안쪽에는 지워지지 않은 은색 무늬가 남아 있었다. 잔을 맞댄 세 마리 새가 원을 그리는 문양.
중앙 사교회에서만 쓰는 봉인 문양과 닮아 있었다.
엘리제는 그 문양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사벨 혼자 준비할 수 있는 일인지 아직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사교회를 떠났다고 해서 그들이 자신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때문에 또 나쁜 사람이 올까요?”
엘리제는 새 장부를 펼쳐 아델의 이름 아래에 적었다.
견습. 아몬드 손질. 공명성 마력 관찰. 본인 동의 없는 인도 금지.
“그럼 더 정확히 기록하면 돼요.”
엘리제는 아델에게 아몬드 한 알을 건넸다.
“그리고 내일부터는 스무 개씩 벗겨 봐요. 견습 첫날이니까요.”
아델은 한참 그 아몬드를 바라보다가 작게 웃었다.
라 보나의 첫 번째 음해는 끝났다.
그러나 카운터 위에 남은 은빛 문양은 누군가가 이제 막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조용히 알려 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