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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9화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9화: 폐쇄 구획의 문

정비소의 작업등 아래에서 지한은 회색 양자 칩을 두 손가락으로 돌렸다.

칩 표면의 연방 문양은 절반쯤 닳아 있었다. 완전한 부품이었다면 에바의 어깨 소켓부터 손끝까지 새로 설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라가 넘긴 것은 제어 지연만 줄여 줄 부분 기능품이었다.

지한의 작업대 위에는 스크랩 견의 관절축과 절연판을 엮은 임시 보조 팔이 놓여 있었다. 팔꿈치 아래 길이였고 손가락은 세 개뿐이었다. 끝에는 집게 대신 납작한 차단판이 접혀 있었다.

에바의 오른쪽 어깨는 여전히 비어 있었다. 금속 가장자리는 깔끔하게 다듬었지만 빈 소켓은 감출 수 없었다.

“완전한 팔은 아니다.” 지한이 말했다. “차단선 안쪽까지 건드리면 네 코어가 또 잠길 수 있어.”

“제한 기능을 수락합니다.” 에바가 대답했다. “북쪽 초소의 감시 주기는 이미 단축됐습니다.”

천장 스피커에서 카이론의 목소리가 흘렀다.

“정확히는 일곱 분 간격입니다. 사용자가 차를 마시며 고민하기에는 부적절한 숫자죠. 장착 뒤 보조 팔의 고출력 방어 기동은 최대 두 번입니다.”

“두 번이면 충분할 수도 있어.”

“그 말은 정비사들이 가장 자주 하는 거짓말입니다.”

지한은 대꾸하지 않고 에바의 어깨 소켓 아래에 얇은 연결판을 댔다. 촉매는 모두 소진됐다. 정식 접속을 시도하면 새 칩의 전류를 감염 차단 프로토콜이 침입으로 오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코어 쪽 선을 건드리지 않았다. 차단 파형 바깥에서 손상된 보조 제어선만 찾아 낡은 수동선으로 하나씩 이어 붙였다. 아르케 화면에는 파란 선과 붉은 선이 얽혀 떠올랐다.

[외부 전술망 차단 파형 유지.]
[보조 상지 연결: 수동 우회.] 
[출력 제한 적용.]

에바의 흉부 청색등이 한 번 꺼졌다가 다시 켜졌다. 지한의 손목이 저리게 울렸다. 그는 손을 떼지 않고 전류를 더 낮췄다.

“지한.” 에바가 처음으로 이름을 불렀다. “피드백 수치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알아. 이 선만 잡으면 돼.”

“보조 팔 장착은 다음 기회에도 가능합니다.”

지한은 고개를 들었다. 에바의 렌즈는 언제나처럼 차분했지만 차단판 위에 놓인 왼손은 움직이지 않았다. 자신이 불완전한 팔을 원해서가 아니라 그가 다칠까 봐 멈추라고 말한 것이다.

“다음 기회가 있으려면 이번에 입구부터 찾아야 해.”

그는 마지막 접점을 눌러 고정했다. 작은 불꽃이 튀고 작업등이 흔들렸다.

[보조 상지 연결 완료.]
[방어 전개 2회 가능.]
[출력 38%.]

에바는 새 팔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관절이 뻣뻣하게 돌아갔다. 세 개의 금속 손가락이 한 번 오므라들더니 차단판을 펼쳤다. 얇은 판이지만 에바의 왼팔 장갑보다 넓었다.

“방어 전개는 충격을 분산합니다.” 에바가 말했다. “두 번째 사용 뒤에는 우측 보조선이 과열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 아래로 떨어지면 바로 나온다.”

“상호 제한 명령에 추가하겠습니다. 마스터도 코어 접속 중 위험 구간에 도달하면 철수합니다.”

지한은 못 들은 척 가방을 둘러멨다. 그러나 잠시 뒤 스스로 아르케 화면에 한 줄을 덧붙였다.

[강지한 단독 접속 금지: 에바 경고 우선.]

에바의 렌즈가 그 문장을 읽었다.

“기록 확인.”

그 짧은 말 뒤에 지한은 해머를 챙겼다. 북쪽 초소가 깨어나기 전에 움직여야 했다.

화물 배수로 입구는 센트럴 코어 유적의 북쪽 외벽 아래에 검은 입처럼 열려 있었다.

무너진 도로를 따라가던 두 사람은 초소의 감시등이 멀리서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빛은 외벽 위를 훑다가 폐기 장갑차 더미에서 잠시 멈췄다. 그 사이마다 녹슨 배수관 안쪽에서는 물방울이 느리게 떨어졌다.

“감시 목록에는 아직 안 들어가 있습니다.” 카이론이 이어폰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안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사용자들은 그 두 문장을 자주 혼동하더군요.”

지한은 손전등을 낮추고 배수로 안으로 몸을 넣었다. 바닥에는 철가루와 부서진 케이블이 진흙처럼 쌓여 있었다. 물은 발목 높이였지만 조금만 더 들어가면 사람 하나가 겨우 지나갈 폭으로 좁아졌다.

에바가 뒤에서 벽을 짚었다. 임시 의족의 접지판이 젖은 바닥을 밟을 때마다 낮은 마찰음이 났다.

“전방 열원 없음. 다만 수압 감지선이 활성 상태입니다.”

지한은 물에 잠긴 제어함을 찾아 덮개를 열었다. 녹이 슨 회로판 위에 희미한 글자가 떴다.

[이물질 분리.]
[유로 봉쇄.]
[금속 부하 회수.]

그는 숨을 짧게 내쉬었다.

“관수장하고 같은 수법이야. 막힌 걸 빼내라는 규칙을 사람과 금속을 가둬 두는 쪽으로 바꿨어.”

“배수로에 들어온 개체를 이물질로 분류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 여기서 문이 닫히면 초소가 우리를 씹어 삼키겠지.”

지한은 아르케 케이블을 제어함에 물렸다. 붉은 항목을 무작정 삭제하지 않았다. 금속 부하 회수 아래에 원래 기록의 흐릿한 잔재가 남아 있었다.

[역류 방지.]
[막힘 구간 우회.] 

그는 회수 규칙을 우회 항목 아래로 옮기고 수압 감지선의 기준을 물 흐름으로 되돌렸다. 회로판이 뜨겁게 달아오르자 배수로 천장에 박힌 금속 갈퀴가 덜컹이며 내려왔다.

에바가 즉시 보조 팔을 뻗었다. 케이블이 철가루 더미를 감고 당겼다. 갈퀴가 닫히기 전에 쌓인 금속이 옆 수로로 밀려났다.

“전개 사용은 아닙니다.” 에바가 말했다. “보조 견인 기능입니다.”

“고장 나면 말해.”

“고장 전 경고를 우선하겠습니다.”

물길이 다시 흐르자 갈퀴는 원래 자리로 올라갔다. 두 사람은 말없이 그 아래를 지났다. 잠입은 문을 억지로 부수는 일이 아니었다. 남이 비틀어 놓은 규칙을 제자리로 돌려놓고 지나갈 길을 찾는 일이었다.

배수로 끝의 격자문 너머로 붉은 빛이 번졌다.

17번 집결 구획은 고철 야적장이라는 말보다 선별장에 가까웠다.

원형 바닥 중앙에는 검은 기둥이 서 있었다. 그 주위로 폐기 장갑차 두 대, 정찰 드론 여섯 기, 부러진 경작기 팔과 군용 통신 안테나가 반원형으로 놓여 있었다. 모든 장비의 연결구와 센서가 기둥을 향하고 있었다.

기계들은 부서진 채 버려진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각 부품을 골라 같은 방향으로 세워 놓은 것 같았다.

에바가 낮게 말했다.

“선별 구조입니다. 중심 기둥이 인증 편린에 반응하는 부품을 분류해 안쪽으로 보냅니다.”

“문을 열 부품을 모으는 거군.”

“가능성이 높습니다. 초소 방어망은 보통 인증 대상과 비인증 대상을 분리합니다. 그러나 이 구획은 장비 자체를 열쇠 재료처럼 다루고 있습니다.”

카이론이 지도의 흐린 선을 띄웠다.

“중심 기둥 뒤에 내부 출입문이 있습니다. 전력 사용량은 계속 상승 중입니다. 감시망이 완전히 기동하면 두 분은 출입문보다 먼저 바닥에 붙게 되겠죠.”

지한은 격자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금속이 한 뼘쯤 열리는 순간 원형 바닥의 붉은 선이 켜졌다.

[대상 반응 감지.]
[인증 편린 수집 절차 개시.]

장갑차의 조종석 안에서 노란 점이 켜졌다. 견인팔이 바닥을 긁으며 지한 쪽으로 돌아왔다.

“태그가 공격 규칙을 적용합니다.” 카이론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견인 안전 제한이 해제됐습니다.”

지한은 해머를 쥔 채 장갑차 아래로 몸을 던졌다. 견인팔이 그가 있던 자리를 내리찍으며 콘크리트 조각을 사방으로 튀겼다. 충격이 팔꿈치까지 올라왔다.

에바는 격자문 앞에서 드론들의 움직임을 살폈다. 드론 둘이 절단선을 펼치며 지한의 뒤쪽으로 내려왔다. 나머지 드론들은 중심 기둥 주변에서 대기했다. 외부 태그는 모든 기계를 한꺼번에 쓰지 않았다. 가장 적은 움직임으로 도망길부터 닫고 있었다.

“장갑차 코어에 접근하겠습니다.” 지한이 말했다.

“저는 후방 방어를 맡겠습니다.”

“혼자 막지 마.”

에바의 렌즈가 지한을 향했다.

“혼자가 아닙니다. 마스터는 정비를 맡고 카이론은 전력을 우회합니다. 저는 제 위치를 맡겠습니다.”

지한은 말문이 막혔다. 방금 전까지는 에바에게 뒤에 있으라고 말할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코어를 고칠 사람과 통로를 지킬 사람이 동시에 필요했다.

“위험하면 바로 말해.”

“보고하겠습니다.”

지한은 장갑차 하부의 정비 패널을 걷어 냈다. 오래된 코어에는 붉은 태그가 케이블을 타고 파고들어 있었다. 화면 위에 견인 제어 규칙이 떠올랐다.

[견인 대상 고정.]
[정비 인원 보호.]
[하중 초과 시 동작 정지.]

그 아래에는 누군가 덧씌운 명령이 있었다.

[반응 대상 고정.]
[인증 방해물 제거.]

“원래는 무너진 차량을 끌어올리던 팔이야.” 지한이 중얼거렸다. “사람을 찍는 팔이 아니고.”

그는 보호 규칙의 우선순위를 올리고 하중 초과 판정에 지한과 에바의 체온 신호를 넣었다. 손목의 저림이 팔을 타고 올라왔다. 아르케가 군용 코어의 보안선을 건드릴 때마다 뜨거운 바늘이 찌르는 것 같았다.

그때 첫 번째 드론이 에바를 향해 내려왔다.

에바의 보조 팔이 돌아갔다. 납작한 차단판이 넓게 펼쳐지며 그녀의 상반신을 가렸다. 절단선이 방패판을 때리고 푸른 불꽃이 터졌다.

임시 의족이 반 뼘 밀려났다. 에바의 왼쪽 어깨 장갑이 벽에 부딪혔다.

“첫 번째 방어 전개 사용.”

“에바, 뒤로.”

“마스터는 코어에 연결돼 있습니다.” 에바가 말했다. “저는 여기에 남습니다.”

두 번째 드론이 옆 수로를 따라 낮게 날아들었다. 지한은 아직 마지막 규칙을 고치지 못했다. 장갑차의 견인팔이 떨리며 한 번 더 움직였다.

카이론이 끼어들었다.

“초소 전력선 일부 우회 성공. 장갑차에 정지 시간을 만들 수 있습니다. 십이 초입니다.”

“열어.”

원형 바닥의 붉은 선이 잠시 흐려졌다. 그 틈에 지한은 태그와 코어 사이의 마지막 접점을 절연 집게로 끊었다. 장갑차 견인팔이 허공에서 멈췄다.

그러나 두 번째 드론의 절단선이 지한의 등 뒤로 떨어졌다.

에바가 보조 팔을 바닥에 박았다. 차단판이 두 번째로 펼쳐지며 반원형 방패가 되었다. 절단선은 판 위를 긁고 옆으로 튕겨 나갔다. 드론은 균형을 잃고 장갑차의 견인팔에 부딪혔다.

에바의 청색등이 급하게 흔들렸다.

“두 번째 방어 전개 사용. 우측 보조선 과열 경고.”

“출력은?”

“이십구 퍼센트. 작전 한계 안입니다.”

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다.

“태그 뽑을게. 통로 봐.”

“수락.”

그는 중심 기둥으로 달려가 바닥 틈에 박힌 붉은 태그를 집게로 끊었다. 태그가 꿈틀거리며 검은 선을 뻗었지만 차폐통이 먼저 그것을 삼켰다.

붉은 선이 차례로 꺼졌다. 장갑차와 드론들은 움직임을 멈췄다. 구획 안에 남은 것은 물방울 소리와 에바 보조 팔의 식어 가는 금속음뿐이었다.

카이론이 숨을 고르듯 말했다.

“안전 판정은 아직 보류입니다. 하지만 즉시 공격하는 기계는 없습니다.”

지한은 장갑차 코어에서 짧은 기록을 꺼냈다. 태그가 지워지며 마지막으로 열어 둔 화면이었다.

[백검 계열 인증 편린: 부족.]
[제1 접근문: 활성화 대기.]
[WHITE SWORD 응답 대기.]

중심 기둥 뒤편의 둥근 금속문이 낮게 울렸다.

문 표면에는 오래전 지워진 연방 문장이 겹겹이 남아 있었다. 그 틈으로 에바의 흉부 차단 파형과 비슷한 푸른 빛이 한 번 스쳤다. 곧이어 WHITE SWORD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떠올랐다.

에바가 한 걸음 다가갔다. 과열된 보조 팔은 움직이지 못했지만 왼손은 흉부 커버 위에 얹혀 있었다.

“제 프레임이 인증 후보로 분류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기억나?”

“확정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문은 방어문이 아닙니다. 접근하는 개체를 고르는 문입니다.”

문 안쪽에서 잠금장치가 하나 풀리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외벽의 감시등이 붉게 변했다.

카이론의 경고음이 이어폰을 울렸다.

“문을 더 열면 북쪽 자동 초소 전체가 기동할 확률이 높습니다. 현재 에바의 출력은 이십육 퍼센트. 보조 팔은 과열. 사용자의 손목 상태도 나쁩니다.”

지한은 문 앞에 선 에바와 가방 속 차폐통을 번갈아 보았다. 이 안에 들어가면 답을 얻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지금 가진 것은 문 하나를 열 수 있을지도 모르는 불완전한 팔과 도망칠 길 하나뿐이었다.

그는 아르케를 문 표면에 갖다 댔다.

“열지 않는다. 인증 박자만 기록해.”

“사용자.” 카이론이 낮게 불렀다.

“다음에 들어올 땐 이 문이 뭘 먹는지 알고 와야 해.”

아르케가 푸른 빛의 간격과 WHITE SWORD 호출 순서를 저장했다. 문은 더 열리지 않았다. 대신 바닥에 새 문장이 떠올랐다.

[백검 보조망.]
[제1 접근문.]
[인증 대상 탐색 지속.]

에바가 조용히 말했다.

“철수를 권고합니다. 이 기록으로 인증 방식의 일부를 분석할 수 있습니다.”

“그래. 다음엔 문을 열 방법을 고치고 온다.”

두 사람이 배수로 쪽으로 물러나는 순간 외벽 위 감시등이 하나씩 켜졌다. 빛줄기가 집결 구획 바닥을 훑고 격자문 앞에서 멈췄다.

[신규 감시 대상 등록.]
[정비사 강지한.]

지한은 손전등을 끄고 에바의 왼쪽으로 붙었다. 에바는 식은 보조 팔을 끌어안듯 고정한 채 배수로 입구를 살폈다.

“철수 경로를 확보하겠습니다.”

“같이 간다.”

“수락.”

닫힌 문은 뒤에 남았다.

하지만 이제 지한은 알았다. 그 문은 고철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를 통과시키는 인증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는 안쪽에 가둘 인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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