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10화: 시스템 오버라이드
화물 배수로의 입구 바깥에서 붉은 빛이 일정한 박자로 콘크리트 벽면을 훑고 지나갔다.
북쪽 자동 초소의 외벽 감시등이 기동하면서 좁은 배수관 틈새마다 차가운 조명이 주등처럼 흘러들었다. 지한은 배수관 벽에 등을 바짝 붙인 채 아르케의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화면 중앙에는 잔상처럼 붉은 문자가 점멸하고 있었다.
[신규 감시 대상 등록.]
[정비사 강지한.]
[초소 추적 프로토콜: 2단계 활성화.]
[광역 검색 주파수 동기화 중...]
"친절하게 이름까지 적어 줬군." 지한이 나지막하게 혀를 찼다.
천장 통신선에 접속해 있던 카이론의 목소리가 이어폰으로 흘러들었다.
"사용자, 감탄하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현재 초소의 감시 레이더는 황야 방면 반경 2킬로미터를 밀폐식으로 주시하고 있습니다. 정비소 방향으로 발을 떼는 순간 탐지 미사일이나 자율 추적 드론이 튀어나올 겁니다."
"알고 있어. 그래서 그냥 갈 수는 없지."
지한은 손목의 저릿한 통증을 눌러 참으며 배수로 입구 옆의 보조 환기 덕트를 가리켰다. 녹슨 철망 뒤편으로 초소 내부의 보조 터미널로 이어지는 굵은 전력 케이블이 지나가고 있었다.
에바가 그 뒤에서 차분하게 보고했다.
"우측 보조 상지 냉각률 42퍼센트. 고출력 방어 전개는 불가능하지만 기본 제어선 및 견인 케이블은 작동 가능합니다."
"팔을 무리하게 쓰지 마." 지한이 에바의 어깨 소켓과 상반신을 살피며 말했다. "출력은 얼마나 남아 있지?"
"이십육 퍼센트입니다. 현재 소모율 기준 작전 지속 시간은 약 이십 분입니다."
"충분해. 초소 메인 코어를 부수는 게 아니라 감시망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내부 지도만 빼낼 거니까."
에바의 푸른 렌즈가 지한을 정면으로 직시했다.
"보안 시스템의 추적 기록을 우회 삭제하는 것은 고위험 작업입니다. 실패 시 추적 등급이 사살 대상으로 즉시 격상됩니다."
"우릴 감시 대상으로 등록한 시점부터 이미 넉넉한 대접은 물 건너갔어."
지한은 가방에서 전자기 해머와 절연 회로 집게를 꺼냈다. 손목에 쌓인 피드백 부작용 때문에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지만 그는 주저 없이 환기 덕트의 낡은 볼트를 풀기 시작했다.
환기 덕트 내부의 비좁은 통로는 쇳가루와 찌든 타이어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지한과 에바는 어깨를 조인 채 둔탁한 금속관을 따라 느리게 기어 올라갔다. 에바의 임시 의족이 덕트 바닥을 밟을 때마다 스쳐 지나가는 마찰음이 났지만 에바는 충격 완화 실린더를 미세하게 보정하며 소음을 최소화했다.
"전방 삼 미터 지점에 보조 보안 터미널이 위치합니다." 에바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유압식 격벽은 열려 있으나 자동 감지 센서 두 개가 삼각 모드로 가동 중입니다."
지한은 덕트 끝의 창살 사이로 조용히 고개를 내밀었다.
넓은 정비용 통로 중앙에 회색 금속 제어반이 단단히 서 있었다. 붉은 빛의 스캐너가 제어반 주변을 소용돌이치듯 훑고 있었다.
"카이론, 센서 교란 펄스를 보낼 수 있나?"
"가능은 합니다만 삼 초가 한계입니다." 카이론이 대답했다. "삼 초 안에 아르케를 물리 접점에 물리지 못하면 사용자는 초소의 고전압에 그대로 구워질 겁니다."
"삼 초면 과하게 넉넉하지."
지한은 덕트 창살을 집게로 끊어 낸 뒤 깊게 숨을 참았다.
카이론의 신호음과 함께 붉은 스캐너의 빛이 순간적으로 흐려졌다.
[보조 센서 수신 오류.]
[재동기화 대기: 03초.]
지한은 망설임 없이 덕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젖은 바닥에 착지함과 동시에 아르케의 커넥터를 보조 터미널의 수동 단자에 박아 넣었다.
손가락 끝으로 차가운 전율이 강하게 뻗어 나왔다.
[보안 터미널 접속 감지.]
[비인가 장치 차단 프로토콜 작동.]
[방화벽 과부하 펄스 방출.]
"지한!"
에바가 덕트에서 뛰어내려 지한의 뒤쪽 통로를 가로막았다. 아직 다 식지 않은 보조 팔을 펼쳐 주변의 전기 스파크를 몸으로 받아냈다. 금속 장갑 표면에서 자쟠거리는 불꽃이 튀었다.
지한의 아르케 화면이 새붉은 경고로 물들었다. 보안 AI의 억제 펄스가 신경계를 타고 올라와 손목과 어깨를 찌르는 통증을 퍼뜨렸다.
지한은 이를 악물었다. 그는 보안 AI의 방화벽을 억지로 부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스승에게 배운 구식 유지보수 인코딩 체계를 떠올렸다.
"너희는 백 년 전에도 똑같았어. 침입자를 막을 때 항상 정비 루틴을 1순위에 뒀지."
지한의 손가락이 아르케의 키패드를 찰나의 속도로 두드렸다.
[정비 명령 우회 코드 입력.]
[연방 47구역 보조 설비 점검 프로토콜 발동.]
[경보 등급 조정: 침입자 경보 -> 정비 요원 접속.]
붉은 빛으로 넘쳐나던 터미널 화면이 순간 흔들리더니 차분한 푸른색으로 변했다.
[인증 확인: 구시대 3급 정비 자격.]
[시즌 정기 점검 모드로 전환.]
[신규 감시 대상 기록: 보류 처리.]
지한은 가쁜 숨을 내쉬며 손목을 감싸 쥐었다. 식은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카이론이 감탄 섞인 냉소를 보냈다.
"보안 AI의 멍청한 권한 계층 구조를 훌륭하게 이용했군요. 아주 야만적이지만 효율적인 오버라이드였습니다."
"말 가려 써라." 지한이 중얼거렸다. "지도나 빨리 꺼내."
아르케가 보안 터미널의 깊은 데이터베이스로 파고들었다. 센트럴 코어 유적 전체의 복잡한 3차원 구조도가 파란 선으로 화면에 떠올랐다.
17번 집결 구획 너머의 닫힌 문, 즉 제1 접근문 뒤편의 지형이 선명하게 나타났다.
"이건 단순한 초소가 아니야." 지한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하 보급로를 통해 센트럴 코어 본체와 궤도 엘리베이터 기지까지 이어져 있어."
에바가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백검 보조망의 전술 통로입니다. 100년 전 연방 특수작전부대가 마더 노드의 1차 오염을 차단하기 위해 사용했던 지하 보급선입니다."
"그 말은 네 기억 속에 있던 그 작전과 직접 연결된다는 뜻이군."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한은 지도의 세부 데이터를 아르케 칩에 빠르게 복사했다. 17번 구획의 제1 접근문을 우회할 수 있는 비상 수동 해제 코드의 박자 패턴까지 모두 담았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풀려가고 있다고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터미널의 데이터 전송률이 99퍼센트에 도달했을 때 화면 중앙에 황색 경고창이 튀어 올랐다.
[고급 전술 지도 해금 요구 조건.]
[연방 군용 전술 자산 식별자 동기화 필요.]
[근접 3미터 이내 군용 코어 자동 스캔 실시.]
"뭐?" 지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르케가 멈추기도 전에 터미널의 광학 센서가 지한의 뒤에 서 있던 에바의 흉부 코어를 강렬하게 훑었다.
에바의 몸이 순간 굳어졌다. 흉부 커버 안쪽의 청색등이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군용 식별자 감지: E.V.A.-004.]
[소속: 연방 특수작전부대 제4전술대.]
[상태: 미승인 이탈 개체 / 손상률 70% 초과.]
[화이트 소드 비상 작전 규정 44조 적용.]
터미널의 스피커에서 찢어지는 듯한 기계음 경보가 터져 나왔다. 푸른색이던 조명이 기괴한 붉은빛과 노란빛으로 번갈아 바뀌었다.
[경보: 이탈 전술 자산 발견!]
[백검 계열 통제권 강제 회수 및 파괴 프로토콜 발동.]
[지하 격리 구획 03번 해제.]
"에바!" 지한이 소리쳤다.
에바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손상된 기억 코어 속에서 봉인되어 있던 100년 전의 군용 명령들이 뇌리를 때리는 것 같았다.
"마스터... 시스템이... 저를 회수 대상으로... 분류했습니다." 에바의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졌다. "이 경보는 단순한 침입 경보가 아닙니다. 이탈한 병기를 처분하기 위한... 비상 정단 프로토콜입니다."
"지도 복사는 끝났어! 당장 빠져나간다!"
지한은 아르케를 물리 단자에서 억지로 뽑아냈다.
하지만 이미 늦어 있었다.
쿵! 쿵! 쿵!
터미널 너머의 중장갑 두꺼운 격벽들이 하나씩 위로 올려졌다. 바닥 아래의 유압 라인이 폭발하듯 팽창하며 진동이 발끝을 통해 전달됐다.
카이론의 경고음이 이어폰을 찢었다.
"사용자! 하부 격리고에서 엄청난 수의 중형 열원이 부화하고 있습니다! 단순한 드론이 아닙니다!"
정비 통로 양쪽의 검은 어둠 속에서 수십 개의 붉은 안구가 일제히 켜졌다.
육중한 금속 발소리가 통로 전체를 울렸다. 스크랩 견이나 개조된 농업 로봇과는 차원이 다른 완벽하게 제련된 군용 장갑의 묵직한 마찰음이었다.
높이 2미터가 넘는 체구에 사각형 억제 방패와 파동 충격봉을 든 기체들이었다. 100년 전 연방의 주요 군사 시설을 지키던 3세대 보안 안드로이드 대대였다.
"이탈 자산 E.V.A.-004 파괴 명령 수신."
"협력 유기체 강제 제압 프로토콜 개시."
보안 안드로이드들의 건조한 기계음이 통로를 가득 채웠다. 맨 앞줄의 안드로이드 셋이 동시에 억제 방패를 내세우며 밀착 대형을 갖췄다.
지한은 전자기 해머를 고쳐 쥐었다. 퇴로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었다.
에바가 과열된 보조 팔을 다잡고 지한의 앞을 막아섰다. 렌즈의 푸른 빛이 결연하게 타올랐다.
"마스터. 전투 준비를 명령해 주십시오."
지한은 입술을 짓씹으며 아르케를 가방에 구겨 넣었다.
"명령이다. 살아남아서 저 지도대로 들어간다!"
수십 개의 붉은 눈빛이 두 사람을 향해 좁혀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