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망한 세계의 인공지능 정비사

시놉시스
나노봇 폭주로 문명이 붕괴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 주인공 '지한'은 고대 문명의 유산인 전투용 안드로이드와 드론을 수리하고 커스텀하는 유일한 '인공지능 정비사'다. 황야를 떠돌며 버려진 정밀 부품을 주워 쓸모없는 고철 안드로이드를 강력한 아군으로 개조하고, 생존자 요새를 지키며 자의식을 가진 불량 AI들과 나노 로봇 괴수들을 해킹하고 퇴치해나간다. 기계 군단을 이끌고 황무지를 개척하며 세계가 멸망한 날의 비밀에 접근해가는 SF 메카닉 생존기.
1화: 황야의 수집
후우웅-.
회색빛 모래바람이 황야의 표면을 쓸고 지나갈 때마다, 고철 무덤들은 묘한 금속성 울음소리를 냈다. 하늘은 납빛이었고, 붉은 황산 비를 잔뜩 머금은 구름이 언제 쏟아질지 모른다는 경고처럼 낮게 깔려 있었다.
강지한은 방독면의 숨구멍에 손을 대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필터의 수명이 다 되어 가는지, 입안에서 까슬까슬한 필터 재와 비릿한 구리 냄새가 섞여 맴돌았다.
“제길, 구시대의 칩셋 하나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군.”
지한은 손목에 찬 구식 태블릿 단말기, ‘아르케’의 화면을 톡톡 댔. 녹색 불빛이 약하게 가물거리며 주변의 금속 밀도를 스캔하기 시작했다. 화면에 표시된 것은 온통 잡음 섞인 붉은 점들뿐이었다. 가치 없는 합금 조각이나 낡은 강철 프레임들.
이곳은 100년 전 일어난 ‘그레이 구(Grey Goo)’ 재앙의 현장 중 하나인 중서부 연방 군사 기지 폐허였다. 나노 로봇들의 폭주로 기지의 절반 이상이 금속 가루로 변해 흩어졌고, 남은 것은 변이된 나노 물질이 엉겨 붙어 만들어진 해괴한 모양의 고철 언덕들뿐이었다.
지한은 뒤쪽에 메어 둔 정밀 전자기 해머를 고쳐 잡았다. 나노 좀비들이나 굶주린 들개 메카닉들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구역이었다. 이 황야에서 믿을 것은 오직 자신의 손재주와 등 뒤의 해머뿐이었다.
삐- 삐- 삐-.
그때, 가라앉아 있던 아르케의 센서가 신경질적인 비프음을 토해냈다. 지한의 눈이 방독면 고글 너머로 크게 떠졌다.
[신호 감지: 고밀도 나노-바이오 셀 포착.]
[에너지 잔량: 0.02%. 유형: 연방군 규격 특수 제어 모듈.]
“단순한 부품이 아니야. 바이오 셀이라고?”
바이오 셀은 나노 재앙 직전 연방군이 극소수 정예 전투 안드로이드에만 탑재했던 초고가 에너지원이다. 현재 황무지에서는 그 셀 하나만으로도 아이언 헤이븐 요새의 1년 치 전력을 살 수 있을 정도의 가치를 지녔다.
지한은 비프음의 진원지를 향해 발걸음을 서둘렀다. 쓰러진 장갑차의 해치 아래, 거대한 콘크리트 잔해가 도랑을 메우듯 덮여 있는 곳이었다. 그는 해머의 탐지모드를 켜고 조심스럽게 돌무더기를 헤쳤다.
한참을 파내려가자, 회색빛 모래 밑에서 기묘한 실루엣이 드러났다.
인간의 형상이었다. 하지만 차갑고 매끄러운 화이트 티타늄 합금으로 만들어진 어깨 라인, 그리고 찢어진 인공 피부 사이로 노출된 복잡한 카본 파이버 다발과 은빛 도금 배선들이 그것이 인간이 아닌 기계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안드로이드.”
지한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냥 안드로이드가 아니었다. 찢어진 인공 가죽 슈트의 가슴팍에는 희미하게 군용 일련번호가 각인되어 있었다.
[E.V.A. - 004]
“에바 시리즈인가? 4세대 특수 작전용 안드로이드…… 미친, 이게 왜 여기에 묻혀 있는 거지?”
연방군이 자랑하던 최강의 병기. 한 대가 보병 중대를 전멸시킬 수 있다던 전술 기체였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우측 팔은 완전히 떨어져 나가 배선 뭉치만 너덜거리고 있었고, 왼쪽 다리 역시 무릎 이하가 소실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메인 동력원인 흉부의 바이오 셀 커버에는 붉은빛의 나노 감염 흔적이 결정처럼 굳어 있었다.
지한은 조심스럽게 아르케의 리더선을 인출해 그녀의 목덜미 뒤쪽에 있는 디버그 포트에 꽂았다.
화면에 수천 줄의 오류 코드가 폭포수처럼 쏟아져 내렸다.
[Warning: 시스템 무결성 파괴율 87%]
[Warning: 메모리 코어 물리적 손상 감지]
[Warning: 나노 감염 차단 프로토콜 작동 중 (잔여 동력 소진 중)]
“코어 시스템이 살아있어. 나노 감염을 스스로 억제하면서 버틴 건가? 100년 동안?”
소름이 돋았다. 보통의 기계였다면 진작에 나노봇에 침식되어 형태도 남지 않은 괴물이 되었거나 동력이 방전되어 영원히 침묵했을 터였다. 하지만 이 기체는 아주 미세한 전류를 순환시키며 핵심 AI 모듈과 바이오 셀의 오염을 스스로 막아내고 있었다.
스스스스-.
그때, 고철 더미 너머에서 기분 나쁜 마찰음이 들려왔다.
지한의 귀가 본능적으로 쫑긋 세워졌다. 그는 아르케의 연결을 유지한 채 머리를 들어 올렸다.
붉게 타오르는 안광 두 개가 어두운 콘크리트 틈새 사이에서 나타났다.
“쳇, 스크랩 견들인가.”
황야의 청소부. 나노봇에 감염되어 자아를 잃고 오직 금속만을 찾아 헤매는 불량 탐사 드론들이었다. 네 발로 기어 다니는 늑대 형상을 한 기계 야수들이 으르렁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등 뒤에 달린 보조 기관총 포탑이 회전하는 소리가 윙윙 소리를 내며 지한의 고막을 때렸다.
마릿수는 세 마리.
한 마리만으로도 평범한 인간은 뼈도 못 추릴 살인 기계들이었다.
“이 귀한 걸 눈앞에 두고 물러날 순 없지.”
지한은 허리춤에서 오버클럭 렌치를 뽑아들고, 오른손의 전자기 해머의 트리거를 당겼다. 해머의 헤드 부분에 푸른 전자기 불꽃이 스파크를 일으키며 튀었다.
“에바, 잠깐만 기다려라. 금방 고쳐줄 테니까.”
지한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오는 강철 야수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것이 황야의 유일한 정비사와 멸망한 세계의 검이 만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