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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9화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9화: 성황전의 작은 주인

동쪽 별궁에서 짐을 싸 내전으로 옮기는 과정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황제의 한마디가 떨어진 직후 성황전 소속 하인 수십 명이 동쪽 별궁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에일린이 손을 대었던 꿀과자 접시부터 마리안이 챙긴 작은 옷가지까지 모두 비단 보자기와 향나무 상자에 정성껏 담았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넓은 품에 푹 안긴 채 황성의 가장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동쪽 별궁도 화려하기 그지없었지만 성황전 소공녀 전용 궁은 차원이 달랐다.

높다란 돔형 천장에는 제국 건국 신화를 새긴 정교한 프레스코화가 웅장하게 펼쳐져 있었다. 바닥에는 전 대륙에서 오직 붉은 사막 가문만이 짜낼 수 있다는 폭신한 양모 카펫이 빈틈없이 깔렸다. 발이 닿는 모든 곳이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침실 한가운데 자리 잡은 아기 요람이었다.

순백의 백단향 나무를 깎아 만들고 영롱한 마력 보석을 촘촘히 박아 넣은 요람은 어지간한 귀족 가문의 한 해 예산과 맞먹을 정도였다.

"세상에... 아기씨, 이곳이 정말 저희가 머물 곳인가요?"

마리안이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함께 따라온 시녀 리세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제 손가락만 꼬물거렸다.

"전하... 아니, 아기씨. 방 안에 놓인 물건 하나하나가 황후 전하의 별궁에서도 보기 힘든 최고급 보물입니다."

'음, 전생으로 치면 지방 지사 발령에서 본사 최상층 회장님 직속 특속실로 초속 승진한 기분이군.'

에일린은 푹신한 요람에 눕혀지자마자 이리저리 구르며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목숨을 걸고 아빠 레오하르트의 마력 폭주를 가라앉힌 보람이 확실했다. 어두컴컴한 감옥이나 서늘한 인질실 대신 황성에서 가장 안전하고 화려한 황실 중심부에 둥지를 튼 것이다.

하지만 호사스러운 풍경 뒤에는 그만큼 서서히 고조되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소공녀 궁의 거대한 아치형 문 밖 회랑에는 황제 직속 성황 기사단원들이 이중 삼중으로 철통같은 경계를 서고 있었다. 창문마다 은빛 결계 인장이 겹겹이 쳐졌고 들어오는 모든 물품은 의관들의 검수를 세 번 이상 거쳐야 했다.

그야말로 황제의 눈과 귀가 24시간 철저히 밀착된 철장과도 같았다.

"아우, 맘마."

에일린은 기력이 돌아오자 앙증맞은 목소리로 소리를 냈다.

마리안이 정신을 차리고 얼른 분유 병을 챙기려던 그때였다.

성황전 소공녀 궁의 육중한 문이 열리며 낯선 발소리 여럿이 다가왔다.


"이건 황실의 규율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지팡이를 쥔 노신사가 서류 더미를 든 시종들을 거느리고 내전 회랑을 걸어 들어왔다.

그의 가슴에는 제국 궁정국의 수석 의전관임을 증명하는 다섯 장의 꽃잎 문양 금빛 인장이 빛나고 있었다. 바로 황실 의전과 족보 관리를 총괄하는 펠릭스 백작이었다.

펠릭스 백작의 뒤에는 제국 중앙 정계를 대표하는 대신 몇 명과 방계 귀족들의 첩보를 전해 들은 참모진이 어두운 안색으로 따라붙어 있었다.

"폐하께서 로엔의 아기를 거두신 것까지는 용인할 수 있습니다. 국경 안정을 위한 인질 겸 방계 귀족들을 통제할 명분이라 이해했으니까요."

펠릭스 백작이 소공녀 궁 문 앞에서 멈춰 서며 혀를 차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정식 수양딸 등록도 거치지 않은 패전국 영주의 딸을 황제 폐하의 침전과 직통으로 연결된 성황전에 거처하게 하다니요! 이는 황실 혈통의 엄숙함을 짓밟는 처사입니다!"

"거기까지 하시지요."

그때 문가에서 단호한 음성이 펠릭스 백작의 말을 막아섰다.

검은 연습용 제복을 차려입은 황태자 카시안이 검집을 다잡은 채 회랑 중앙에 서 있었다. 푸른 눈동자가 차갑게 식어 있었다.

"시상 펠릭스 경. 내전 소공녀 궁 앞에서 감히 누구의 목소리를 높이는 거냐."

펠릭스 백작은 황태자를 보자 황급히 허리를 숙였다.

"황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소인은 그저 황실의 오랜 격식과 법도를 걱정하여..."

"법도?"

카시안이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열두 살 어린 소년이었지만 아버지를 빼닮은 서서늘한 기상이 회랑을 눌렀다.

"아버님의 명보다 우선하는 법도가 아스카니아 제국에 존재했던가?"

"그, 그것은 아니오나..."

"이곳은 아버님께서 직접 지정하신 에일린의 거처다. 네놈들이 혈통을 운운하며 왈가왈부할 장소가 아니다. 더 이상 무례를 범하면 내 검으로 그 입을 닫게 만들겠다."

카시안의 단단한 태도에 펠릭스 백작과 대신들이 주춤거렸다.

요람에 누워 문틈으로 그 광경을 살피던 에일린은 눈을 반짝였다.

'호오, 우리 츤데레 오빠가 제법인데? 동생이라고 아주 확실하게 방어막을 쳐 주네.'

전생의 회사 생활에서도 악성 민원인이나 꼰대 상사가 찾아왔을 때 중간 관리자가 깔끔하게 커버해 주면 그렇게 든든할 수 없었다. 카시안은 이미 훌륭한 라인 형성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펠릭스 백작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국경 지대의 에드릭 경 세력과 황태후 파벌 귀족들의 압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하, 소인도 황제 폐하의 권위를 모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로엔 백작의 혈통을 검증하지도 않은 채 내전 깊숙이 들이는 것은 국경 방계 귀족들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최소한 조사를 진행하는 동안만이라도 별궁으로..."

"누가 누구를 별궁으로 보낸다고?"

회랑 깊은 곳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회랑을 지키던 성황 기사단원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검을 바닥에 내렸다.

검은 제복에 붉은 망토를 늘어뜨린 레오하르트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칠흑 같은 흑발 아래 빛나는 적안에는 정복자의 살기가 가득 차 있었다.

수년 만에 마력 폭주의 통증에서 벗어난 황제의 얼굴은 매서울 정도로 냉혹하고 선명했다.

"폐, 폐하!"

펠릭스 백작과 대신들이 억눌린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레오하르트는 펠릭스 백작의 머리 위로 차가운 시선을 내리꽂았다. 그가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대리석 바닥에 묵직한 중압감이 스며들었다.

"펠릭스."

"예, 예! 폐하!"

"네놈이 언제부터 내 침전 옆 거처의 주인을 정하는 권한을 가졌지?"

"황송하옵니다! 소인은 그저 제국의 격식과 방계 귀족들의 상소를..."

"상소?"

레오하르트가 차갑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피비린내 나는 폭군의 광기가 서려 있었다.

"에드릭 놈이 보낸 첩자들의 주둥아리를 상소라 부르는 모양이군. 내 딸의 혈통을 문제 삼아 감히 내 눈앞에서 거처를 옮기라 마라 논해?"

레오하르트가 손을 살짝 쳐들자 곁에 서 있던 기사장이 즉시 검을 반쯤 뽑아들었다.

펠릭스 백작의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리기 시작했다.

"한 번만 더 내 딸의 거처나 신병을 두고 헛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있다면 그 혀를 뽑아 황성 문에 걸 것이다. 에드릭이든, 황태후든, 아니면 제국 전체의 귀족들이든 상관없다."

황제의 음성은 소공녀 궁 전체에 울려 퍼졌다.

"에일린은 내 딸이다."

레오하르트의 적안이 대신들을 일렬로 훑었다.

"로엔의 핏줄이든 무덤의 흙더미든 중요하지 않다. 내가 내 딸이라 선언한 순간부터 이 아이는 아스카니아 제국에서 가장 존귀한 수양황녀다. 이에 토를 달고자 하는 자는 내 칼을 먼저 받아내라."

대신들은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한 채 숨을 삼켰다.

레오하르트는 더 이상 엎드린 무리를 돌아보지 않고 펠릭스 백작에게 명령을 내렸다.

"삼 일 뒤다."

"예, 예?"

"삼 일 뒤, 제국 전역의 귀족과 사절단을 불러 모아 에일린 드 아스카니아의 황실 수양황녀 공식 등록식을 거행한다. 조금이라도 차질이 생긴다면 네놈의 목부터 칠 테니 그리 알아라."

"명... 명 받듭니다! 폐하!"

펠릭스 백작은 이마를 바닥에 찍으며 사색이 된 얼굴로 대답했다.


대신들과 의전관이 쥐새끼처럼 도망치듯 물러나자 소공녀 궁의 거실에는 완벽한 정적이 찾아왔다.

레오하르트는 살벌했던 기운을 거두고 소공녀 궁 안으로 들어왔다.

카시안이 조용히 뒤를 따라 들어왔다.

침실의 푹신한 요람 안에서 에일린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빠 레오하르트를 바라보았다.

'크으... 역시 폭군 아빠의 스케일이란! 꼰대 대신들을 말 한마디로 깔끔하게 목 날리겠다고 위협해서 입 다물게 만드는 사이다라니!'

전생의 답답한 직장 상사들에게는 도무지 기대할 수 없었던 완벽하고 강력한 후광이었다.

레오하르트는 요람 곁으로 다가와 서툰 손길로 에일린의 작은 손을 감싸 쥐었다. 아이의 손끝이 따뜻하게 닿자 조금 전까지 피비린내 나던 황제의 적안이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놀랐느냐."

레오하르트가 낮게 물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거친 목소리에 아이가 기절하거나 울까 봐 은근히 신경 쓰는 기색이 역력했다.

에일린은 결코 울지 않았다. 오히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완벽한 딸바보 굳히기 작업에 들어갔다.

"아빠아!"

에일린은 앙증맞은 두 손으로 레오하르트의 커다란 검지를 꼭 쥐고 배시시 웃었다. 그리고 황제의 손가락에 제 뺨을 살며시 비볐다.

레오하르트의 몸이 일순간 딱딱하게 굳었다가 아주 천천히 풀렸다.

그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제국을 정복한 정복자가 갓난아이의 재롱 한 번에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그래. 내 딸이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안아 올려 가슴에 품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안이 헛기침을 하며 은근슬쩍 다가왔다.

"아버지, 삼 일 뒤 등록식 준비는 제가 성황 기사단과 함께 호위를 재점검하겠습니다."

"음. 그러도록 해라."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품에 안긴 채 카시안을 향해 짧은 팔을 흔들었다.

"오빠아, 웅!"

카시안은 순간 귀끝이 확 달아올랐다. 그는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며 짐짓 무뚝뚝하게 입을 열었다.

"흥... 까불지 마라. 등록식 때 사람들 많다고 울기만 해 봐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카시안은 에일린의 분유 병이 식지 않도록 마리안에게 따뜻한 물을 더 가져오라고 챙겨주고 있었다.

에일린은 속으로 기분 좋은 웃음을 지었다.

폭군 아빠의 절대적인 과보호와 츤데레 오빠의 든든한 호위, 그리고 제국 최상위 성황전의 호화로운 거처까지.

전생의 과로사했던 슬픈 삶은 이제 완벽히 끝났다.

'삼 일 뒤 공식 등록식만 무사히 마치면 내 탄탄대로 영생 고열량 삶은 완성이다!'

에일린은 레오하르트의 품에서 꿀과자 조각을 야무지게 오물거리며 다가올 황실 등록식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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