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8화: 깨어난 안식
새벽빛이 검은 성벽 너머에서 스며들 때 레오하르트는 눈을 떴다.
그것은 수년 만에 맞이하는 낯선 아침이었다.
언제나 눈을 뜨면 관자놀이를 짓누르던 핏빛 통증이 없었다. 귓가에서 끊임없이 울려 퍼지던 환각과 고대의 거친 소음도 깨끗이 사라져 있었다. 머릿속이 수면에 잠긴 호수처럼 차분하고 서늘했다.
레오하르트는 잠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못한 채 창밖의 어둠이 옅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가락에 남아 있는 작은 온기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레오하르트가 천천히 시선을 내리자 침상 위에서 고르게 숨을 쉬는 아기가 보였다. 에일린이었다. 분홍빛 금발을 어지럽게 늘어뜨린 아이는 황제의 오른손 검지를 두 손으로 꼭 쥔 채 깊이 잠들어 있었다.
레오하르트는 손가락을 살며시 빼내려 했다.
그러자 에일린이 작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웅얼거렸다.
"음... 아빠..."
아이는 황제의 손가락을 가슴 쪽으로 당기며 더 세게 끌어안았다. 힘도 없는 아기 손이었지만 레오하르트는 차마 손을 털어내지 못했다.
침전 한쪽 의자에 앉아 있던 마리안이 깜빡 잠이 들었다가 놀라 고개를 들었다. 문가에 기대어 서 있던 황태자 카시안도 지친 기색으로 눈을 떴다.
카시안은 아버지가 침상에서 조용히 고개를 들고 있는 모습을 보자 숨을 멈추었다.
폭주가 지나간 다음 날 아침의 황제는 늘 검은 살기를 뿜어내며 가까이 오는 모든 것을 거부했었다. 그러나 지금 레오하르트의 적안에는 핏빛 광증 대신 낯선 침묵과 아득한 당혹감이 서려 있었다.
"아버지... 괜찮으십니까?"
카시안이 조심스럽게 다가오며 물었다.
레오하르트는 대답 대신 자기 손가락을 붙든 에일린의 작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머리가... 울리지 않는다."
그 목소리는 평소처럼 차가웠지만 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카시안의 푸른 눈이 크게 흔들렸다.
황실의 혈통에 새겨진 마력의 폭주는 제국의 어떤 대마법사도 어떤 성수도 멈추게 하지 못했던 저주였다. 그런데 어젯밤 이 작은 아이가 손을 잡은 순간 거짓말처럼 모든 폭주가 멈추고 아침까지 안식이 이어진 것이다.
레오하르트는 남은 왼쪽 손을 들어 에일린의 뺨을 조심스럽게 가다듬었다. 손끝에 닿는 피부는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전쟁터를 누비며 칼날과 피에 젖었던 그의 단단한 손에 아기의 뺨은 너무나 위태롭고 가벼웠다.
"이 아이가 내 곁에서 잠든 내내 소음이 멈췄다."
레오하르트가 낮게 중얼거렸다.
날이 밝자 문 밖에서 대기하던 의관이 레오하르트의 명에 따라 침전 안으로 들어왔다.
레오하르트는 의관이 에일린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도록 손을 들어 거리를 제한했다.
"세 걸음 뒤에서 봐라. 아이를 놀라게 하지 마라."
의관은 식은땀을 흘리며 조심스럽게 에일린의 안색과 호흡을 살폈다. 아이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으나 평소보다 숨소리가 얕고 손끝이 조금 차가웠다.
"폐하, 소공녀 전하께서는 열이나 상처는 없으십니다."
의관이 무릎을 꿇으며 보고했다.
"다만 체내의 기력이 완전히 바닥나 있습니다. 마치 온몸의 기운을 한꺼번에 쏟아낸 것처럼 극심한 피로 상태입니다."
레오하르트의 눈매가 날카롭게 좁아졌다.
"기력이 바닥났다고?"
"예, 폐하. 소공녀 전하께서 일으키신 신비로운 현상이 어떤 방식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여파로 아이의 기력이 크게 소모된 것으로 보입니다. 당분간 무리하지 않고 충분한 휴식과 영양을 취해야 합니다."
침전 안의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레오하르트는 사슬에 묶여 있던 자기 손목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작은 손을 내밀었을 때 자신의 마력 폭주를 누르느라 아이의 작은 몸이 무리를 겪은 것이었다.
자신을 살린 손길이 아이 본인의 생명력을 갉아먹은 셈이었다.
레오하르트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알 수 없는 묵직한 죄책감과 둔탁한 통증이 솟구쳤다.
"의관."
"예, 폐하."
"오늘 이 방에서 확인한 아이의 상태에 대해 단 한 마디라도 밖으로 샌다면 너와 네 가문의 목을 베어 황성 문에 걸 것이다."
의관은 바닥에 이마를 짓찧으며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목숨을 걸고 입을 다물겠습니다!"
의관이 물러난 뒤 카시안이 레오하르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에일린의 힘은 대체 무엇입니까? 로엔 백작가의 혈통에 그런 기적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차갑게 대답했다.
"출처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아이가 내 딸이며 제국에서 유일하게 나를 안식에 들게 하는 존재라는 사실뿐이다."
카시안은 아버지가 에일린을 바라보는 눈빛이 이전과 완벽히 달라졌음을 느꼈다. 그것은 단순한 인질에 대한 보호가 아니었다. 황제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기 시작한 존재를 향한 서슬 퍼런 집착이자 과보호였다.
오전이 지나갈 무렵 에일린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고고... 온몸이 쑤시네...'
전생에 연속 사흘 밤샘 야근을 마치고 퇴근했을 때보다 몸이 더 둔하고 묵직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기력이었다.
에일린은 눈을 끔벅이며 주변을 살폈다. 높은 천장과 웅장한 대리석 기둥이 보였다. 여전히 레오하르트 황제의 침전이었다.
그리고 바로 곁에서 차가운 적안을 한 황제가 자신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에일린은 속으로 사회생활 계산기를 빠르게 돌렸다.
'어라? 아빠 표정이 왜 저러지? 어제 폭주 정화해 줬는데 나 버리려는 건 아니겠지? 아니야, 눈빛이 살짝 달라졌어. 살기가 아니라 엄청나게 묵직한 부담감이 느껴져!'
에일린은 아기 특유의 가장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녀는 짧은 팔을 뻗어 레오하르트의 옷깃을 잡으려 애쓰며 배시시 웃었다.
"아빠아... 히..."
레오하르트의 몸이 순간 굳었다.
조금 전까지 제국의 그 누구도 감히 쳐다보지 못하던 정복자 황제가 갓난아이의 앙증맞은 미소 한 번에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을 보였다.
레오하르트는 커다란 두 손으로 에일린을 안아 올려 가슴에 꼭 품었다. 손길이 너무나 조심스러워서 아이가 부러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이 느껴졌다.
"깨어났느냐."
"응... 맘마..."
에일린이 작은 배를 두드리며 웅얼거리자 레오하르트는 즉시 문 밖의 시종을 향해 고함을 쳤다.
"황실 주방에 전해라! 공주가 드실 가장 따뜻하고 신선한 분유와 부드러운 영양식을 지금 당장 가져와라! 일 초라도 늦으면 주방장부터 문책할 것이다!"
문 밖에서 시종들의 다급한 발소리가 빗물처럼 쏟아져 나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시안은 기가 차서 입을 벌렸다. 평소 음식이나 연회 따위에는 관심도 없던 아버지가 아기의 한마디에 황성 주방 전체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다.
카시안은 망설이다가 침상 옆에 놓인 가장 푹신한 비단 방석을 가져와 에일린의 등 뒤에 조심스럽게 받쳐 주었다.
"어이쿠... 너무 세게 누르지 마라. 몸도 작은데."
카시안이 툴툴거리며 방석 모양을 잡아 주었다.
에일린은 수양오빠의 서툰 다정함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카시안의 손등을 작은 손으로 톡 치며 배시시 웃었다.
"오빠아..."
카시안의 귀끝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었다. 그는 얼른 고개를 돌리며 검집을 다잡았다.
"흠... 이상한 소리 하지 마라. 내가 오빠라는 건 딱히 네가 원해서 해 주는 게 아니니까."
에일린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역시 츤데레 도련님이었어. 이 집안 남정네들은 겉은 뚝뚝한데 속은 아주 쉽게 뚫리네!'
조금 뒤 따뜻한 분유와 부드러운 과일 즙을 비운 에일린은 마리안의 품에서 기력을 조금 회복했다.
그때 기사장이 엄숙한 표정으로 침전에 들어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어제 동쪽 별궁 창가에서 발견된 검은 실 조각과 별궁 출입자들에 대한 1차 조사 결과입니다."
레오하르트의 눈빛이 순식간에 서늘한 칼날처럼 변했다.
"말해라."
"별궁 담장 외곽에서는 그 어떤 침입자의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담장의 마법 결계도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내부에 내통자가 있다는 뜻이겠군."
"예, 폐하. 별궁 내부 시녀들과 경비병들의 선을 추적 중이나 누군가 고의로 창문 잠금쇠를 풀어두고 흑마법의 흔적이 담긴 실을 남겨놓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기사장이 덧붙였다.
"또한 국경 지대의 방계 귀족 에드릭 경 세력이 로엔 백작의 신병과 수양황녀 전하의 혈통 문제를 걸고넘어지며 황성에 사람을 보냈다는 첩보가 들어왔습니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의 작은 손을 꼭 쥔 채 차갑게 웃었다.
"감히 내 딸을 엿보고 감히 내 손에 들어온 것을 빼앗으려 드는가."
황제의 몸에서 스며 나온 서늘한 살기에 기사장과 카시안마저 어깨를 펴지 못했다.
"기사장."
"예, 폐하!"
"동쪽 별궁 조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계속 진행해라. 별궁에 드나든 시녀와 기사 중 수상한 자는 즉시 하옥하고 심문해라."
"명 받듭니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을 안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지금 당장 소공녀의 침실과 거처를 동쪽 별궁에서 완전히 거둬들인다."
카시안이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그렇다면 에일린의 거처는 어디로 옮기십니까?"
레오하르트는 침전과 집무실로 바로 연결되는 내전 중심의 가장 안전하고 화려한 성황전 소공녀 전용 궁을 가리켰다.
"이 내전 바로 옆이다. 황제 직속 기사단이 이중으로 경계하고 내 눈이 밤낮으로 닿는 이 자리에 내 딸을 둔다."
마리안과 기사장은 깜짝 놀랐다. 황제 본인의 내전 바로 곁 거처는 황후나 정식 황태자조차 쉽게 머물지 못하는 제국 최고 권력의 핵심 지대였다. 수양딸에게 그 장소를 하사한다는 것은 에일린을 단순한 인질이 아니라 황제의 분신이자 제국 최우선 보호 대상으로 공식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의 뺨에 자신의 이마를 살며시 대었다.
"누구도 너를 건드리지 못하게 할 것이다. 제국 전체를 잿더미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에일린은 황제의 차갑지만 묵직한 이마의 감촉을 느끼며 속으로 주먹을 쥐었다.
'좋았어! 살벌하긴 해도 안정권에 접어들었다! 이제 맛있는 것 많이 먹고 황궁 최고 귀요미로 자리 잡는 일만 남았어!'
새벽의 차가운 안개 속에서 맞이한 아침, 폭군의 안식과 함께 아스카니아 황궁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