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수양딸로 환생했습니다

7화: 손을 잡은 밤
카시안이 비켜선 틈으로 에일린은 침대 난간을 붙들었다.
회랑 끝의 검은 문 아래에서 안개 같은 기운이 번졌다. 촛불은 바람도 없는데 한쪽으로 길게 휘었다. 불꽃이 흔들릴 때마다 벽에 드리운 사람들의 그림자도 비틀렸다.
"안 돼."
카시안이 다시 에일린 앞을 막았다. 낮에 시녀를 몰아낼 때보다 얼굴이 더 창백했다.
"아버지께서 저러실 때는 누구도 들어가면 안 돼. 기사장도 기다려."
마리안이 에일린을 품에 꼭 안았다. 리세는 문고리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 울음을 삼켰다. 방 밖을 지키던 기사들조차 회랑 끝으로 가까이 가지 못하고 서로의 얼굴만 살폈다.
에일린은 검은 문만 바라봤다. 안쪽에서 낮고 끊긴 신음이 들릴 때마다 품 안의 방울이 차가워지는 것 같았다.
전생의 기억 속에도 아픈 사람은 있었다. 야근하다 쓰러진 동료의 구급차를 보며 모두가 걱정한다고 말했지만 다음 날 업무는 고스란히 남았다.
하지만 저 문 너머의 사람은 업무가 아니었다. 자신을 황녀로 만든 황제였고 목을 조를 수 있었던 손으로도 결국 자기 손을 놓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까까지 그 문 너머에는 혼자 들어가 있지 말라고 말하던 사람이었다.
"아빠."
에일린이 문 쪽으로 팔을 뻗었다.
카시안의 눈이 흔들렸다.
"나도 처음엔 그랬어."
소년은 거의 들리지 않게 말했다. 평소에는 단단히 눌러 두던 목소리가 밤의 소음 사이로 새어 나왔다.
"들어가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버지는 나를 보지도 못했어. 가까이 오지 말라고만 하셨어."
카시안의 손이 검집 위에서 움츠러들었다. 어른들이 황제의 침전 앞에서 고개를 숙일 때 어린 황태자도 함께 물러나야 했던 밤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도요."
마리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서 아기씨를 보시면 더 놀라실 겁니다. 지금은 기다리시는 편이..."
그 말 끝에 안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리세가 짧게 비명을 삼켰다. 검은 문틈으로 흘러나온 기운이 복도 바닥을 훑었다. 닿은 자리의 은 장식이 서리 낀 것처럼 희게 변했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품에서 더 세게 버둥거렸다.
카시안은 이를 악물었다. 그러다 회랑을 지키던 기사에게 손짓했다.
"기사장께 알려. 의관도 부르고."
"황태자 전하. 폐하의 허락 없이 문을 열 수는..."
"내가 책임진다."
카시안의 말은 높지 않았다. 하지만 망설이던 기사가 즉시 달려갔다.
소년은 에일린을 내려다봤다. 푸른 눈 안에 두려움이 선명했지만 이번에는 그녀의 앞을 완전히 막지 않았다.
"내 뒤에서만 와. 네가 겁나서 울면 바로 데리고 나올 거야."
에일린은 울지 않았다. 대신 마리안의 옷깃을 잡은 손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검은 문이 열리자 뜨거운 열기가 밀려 나왔다.
황제의 침전은 엉망이었다. 탁자는 옆으로 넘어져 있었고 유리잔은 바닥에서 검은 가루처럼 부서져 있었다. 벽난로의 불은 꺼져 있었는데도 공기는 화상처럼 뜨거웠다.
서랍에서 쏟아진 서류들은 바닥을 뒹굴었다. 가장자리 몇 장은 불에 닿지 않았는데도 새까맣게 그을려 있었다. 침전의 벽에 걸린 검은 휘장은 보이지 않는 손에 잡힌 듯 천천히 흔들렸다.
레오하르트는 침상 옆 바닥에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다.
손등에는 검은 힘줄 같은 기운이 번져 있었다. 자신의 손목에는 은사슬이 감겨 있었고 사슬 끝은 돌기둥에 묶여 있었다. 사슬은 이미 몇 군데가 뒤틀려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은 평소보다 어두웠다. 에일린을 알아본 순간 그 눈동자가 더 크게 흔들렸다.
"왜 왔지."
목소리는 낮았지만 낯선 사람의 것처럼 거칠었다.
"돌아가."
레오하르트가 사슬에 묶이지 않은 손을 들어 문을 가리켰다. 손끝에서 번진 검은 기운이 침상 기둥을 스치자 나무가 삐걱이며 갈라졌다.
마리안이 에일린을 뒤로 감쌌다. 카시안의 검이 반쯤 뽑혔다.
그때 검은 기운이 바닥을 훑으며 튀어 올랐다. 깨진 잔 조각 하나가 카시안을 향해 날아왔다.
카시안이 검으로 조각을 쳐 냈다. 금속음이 침전 안에 울렸다. 소년의 손등이 떨렸지만 그는 에일린 앞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아버지. 진정하십시오."
레오하르트가 눈을 감았다. 기운은 잠깐 잦아들었다가 더 거세게 소용돌이쳤다. 그의 손가락이 사슬을 쥔 채 하얗게 질렸다.
"나가라고 했다."
명령이었다.
카시안의 어깨가 굳었다. 그가 검을 쥔 손에 힘을 준 순간 에일린은 알 수 있었다. 카시안은 아버지의 명을 어기는 것이 무서운 게 아니었다. 저 사람이 다시 자신을 밀어낼까 봐 무서운 얼굴이었다.
기사장과 의관들이 문 앞에 도착했다. 기사장은 침전의 모습을 보고 즉시 무릎을 꿇었다.
"폐하. 명을 내리시면 즉시 사람들을 물리겠습니다."
"모두 나가라."
레오하르트의 답은 짧았다.
기운이 다시 한 번 요동쳤다. 이번에는 벽 쪽에 놓인 촛대가 바닥으로 넘어졌다. 기사가 앞으로 나서려 했으나 레오하르트가 사슬을 더 세게 잡아당겼다. 날아가던 촛대가 허공에서 멈추더니 먼 곳으로 튕겨 나갔다.
자신을 묶어 둔 것도 사람들을 내보내려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자기 곁에 있는 누군가가 다칠까 봐.
에일린은 마리안의 팔을 밀었다. 힘은 약했지만 계속 버둥거리자 마리안이 울먹이며 품을 느슨하게 했다.
"아기씨. 안 됩니다."
에일린은 대답하지 못했다. 대신 방울을 쥔 손을 레오하르트 쪽으로 뻗었다.
황제의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였다. 닿으면 다칠지 모른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저 손을 잡았을 때마다 숨이 가라앉았던 것도 기억했다.
안전한 자리에서 기다릴 수는 없었다.
에일린은 마리안의 무릎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작은 발은 바닥을 제대로 딛지 못해 휘청거렸다. 차가운 대리석이 발바닥에 닿자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카시안이 붙잡으려 했다.
"에일린."
그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처음으로 다급했다.
에일린은 카시안의 손을 피하지 않았다. 다만 그의 손등을 한 번 두드리고 다시 앞으로 기어갔다.
괜찮다는 뜻이었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래도 멈출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레오하르트의 얼굴이 굳었다.
"멈춰."
명령에 가까운 말이었다. 그러나 에일린은 멈추지 않았다.
그녀가 가까워질수록 검은 기운은 날카롭게 흔들렸다. 차가운 바람과 뜨거운 열기가 한꺼번에 뺨을 스쳤다. 마리안이 울음을 터뜨리려는 순간 에일린의 손에서 방울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맑은 소리가 울렸다.
에일린은 방울을 보지 않았다.
레오하르트의 손가락은 사슬을 붙든 채 떨리고 있었다. 그 손이 아이를 밀어내지 않으려고 바닥을 향해 힘껏 버티는 것이 보였다.
에일린은 마지막으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리고 그의 손가락을 잡았다.
차갑고 떨리는 손이었다.
"아빠."
그 한마디와 함께 손바닥 아래에서 서늘한 기운이 번졌다.
검은 안개가 손끝에서 멈췄다. 사납게 뛰던 기운이 물에 젖은 재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레오하르트의 거친 숨도 한 번 크게 흔들린 뒤 길게 빠져나왔다.
침전의 공기가 조금씩 식었다.
깨진 잔 조각들은 더 이상 떨지 않았다. 흔들리던 휘장도 천천히 제자리를 찾았다. 꺼져 있던 벽난로의 재가 소리 없이 주저앉았다.
카시안은 검을 든 채 움직이지 못했다. 마리안은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문턱에 선 기사장과 의관들도 숨을 죽였다.
레오하르트는 에일린의 손을 내려다봤다. 그의 손가락을 감싼 작은 손이 힘껏 버티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말은 추궁보다 당혹에 가까웠다.
에일린은 대답 대신 황제의 손을 더 꼭 잡았다.
잠시 뒤 레오하르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완전히 물러났다. 그의 어깨가 처음으로 크게 내려앉았다. 사슬을 끊으려 하지 않던 손이 천천히 풀렸다.
그는 남은 손으로 에일린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조금 전까지 기둥을 갈라 놓던 팔이 믿기지 않을 만큼 조심스러웠다.
"다친 곳은."
목소리는 아직 낮았지만 이전보다 또렷했다.
에일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떨어진 방울을 찾으려 손을 내밀었다.
카시안이 먼저 움직였다. 그는 검을 집어넣고 방울을 주웠다. 문양을 잠시 보던 소년은 아무 말 없이 에일린에게 건넸다.
에일린은 방울을 받아 품에 넣었다. 그러자 긴장이 풀린 듯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몸 안의 힘이 쑥 빠지는 느낌이었다. 아까까지 붙들고 있던 황제의 손가락도 손안에서 멀어지는 것 같았다.
"아기씨?"
마리안이 다가오려 했지만 레오하르트가 에일린을 더 단단히 안았다. 붉은 눈이 의관에게 향했다.
"의관을 부른다."
"이미 대기 중입니다."
기사장이 답했다.
레오하르트는 의관에게 먼저 다가오지 말라는 듯 손을 들었다. 그의 시선은 잠든 에일린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멀리서 봐라. 아이가 깨면 네 목소리부터 듣게 하지 마라."
의관은 놀랐지만 즉시 고개를 숙였다. 그는 몇 걸음 떨어진 곳에서 에일린의 안색과 호흡을 살폈다.
"놀라거나 지친 듯합니다. 열은 없습니다. 잠시 깊이 쉬게 하시면..."
"잠시가 얼마나 되지."
의관의 입술이 굳었다.
"정확히는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폐하. 다만 지금은 안정돼 보입니다."
레오하르트의 손가락이 에일린의 등을 한 번 쓸었다. 손길은 서툴렀다. 그래도 품에서 놓지는 않았다.
"아이는 여기 둔다."
카시안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버지. 소공녀실로 모시는 편이 더 익숙할 겁니다. 마리안도 곁에 있고요."
말은 조심스러웠으나 시선은 에일린에게 붙어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본 것을 아직 믿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레오하르트는 잠든 아이의 손을 보았다. 작은 손은 여전히 그의 손가락 끝을 놓지 않고 있었다.
"마리안은 남는다."
그는 잠시 뒤 덧붙였다.
"카시안도. 오늘 밤 이 방에서 본 것은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마라."
카시안의 푸른 눈이 잠깐 흔들렸다. 그는 이 명령이 입막음인지 보호인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고개를 숙였다.
"명심하겠습니다."
레오하르트는 사슬에 묶였던 손목을 풀게 한 뒤 침상 곁에 앉았다. 마리안은 가까운 의자에서 조용히 기도했고 카시안은 문가에 선 채 한참 움직이지 않았다.
에일린은 황제의 팔 안에서 깊이 잠들었다.
새벽이 가까워도 작은 손은 황제의 손가락을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