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26화: 흔들리지 않는 축
화요일 오전 9시, 서울 역삼동 루미너스 기획 501호 대표실.
투명한 창문 너머로 옆 호실인 502호의 인테리어 마무리 소음이 아득하게 들려왔다. 벽을 트고 유리 가벽을 세우는 공사는 이미 막바지였다. 페인트 향과 새 목재 냄새가 복도까지 옅게 감돌고 있었다.
강시우는 모니터에 떠 있는 <블랙 아웃> 티저의 실시간 지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공개 열두 시간 만에 조회수는 120만을 넘어섰고, 안전 감독의 검수 장면이 포함된 메이킹 영상은 인기 급상승 동영상 3위에 안착했다.
그때 오기태가 태블릿을 들고 빠르게 들어왔다. 그의 평소처럼 덤덤하던 얼굴에 이례적인 경계심이 서려 있었다.
“대표님, 한성 캐피탈 쪽 움직임이 수상합니다.”
시우가 시선을 모니터에서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김성태 대표님 계좌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계좌 자체보다 채권단 쪽입니다.”
오기태가 태블릿 화면을 시우의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복잡한 금융 거래선과 채권 은행 명단이 빽빽하게 이어져 있었다.
“신성홀딩스의 우회 사모펀드인 블루스톤 파트너스가 한성 캐피탈의 주력 채권 은행 두 곳을 압박했습니다. 한성 테크 부도 위기 소문을 명분으로 150억 원 규모의 단기 채권 조기 상환을 요구하고 나섰습니다.”
뒤이어 윤서연이 서류 봉투를 들고 대표실로 따라 들어오며 설명을 덧붙였다.
“만기는 원래 이번 달 말까지였습니다. 당장 상환 조치가 들어오면 한성 캐피탈은 유동성에 직격탄을 맞습니다. 담보로 잡힌 루미너스 지분 일부나 <블랙 아웃> 공동 제작 수익권을 강제로 시장에 넘겨야 하는 상황으로 몰립니다.”
시우의 눈앞에 반투명한 푸른빛의 시스템 안내창이 떠올랐다.
[금융 리스크 및 자금 흐름 분석]
- 대상: 한성 캐피탈 ↔ 블루스톤 파트너스 연계 채권단
- 위협 요소: 단기 채권 조기 회수를 통한 자산 강제 매각 유도
- 핵심 변수: SBS <블랙 아웃> 협찬·광고 선집행금 및 <낙화> 최종 정산금
- 해결 가능성: 루미너스의 에스크로 계좌 자금 보증 시 채권단 압박 92% 무력화 가능
시우는 공중에 뜬 시각 정보를 조용히 지웠다.
차형준은 현장에서 장비와 보험을 건드렸다가 법적 기록이 남는 낭패를 보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기록이 덜 남는 금융과 소문으로 한성 캐피탈의 목을 죄어 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김 대표님이 담보권을 넘기도록 압박해서 루미너스의 공동 제작 권리와 지분을 헐값에 뺏겠다는 뜻이군요.”
“맞습니다.”
오기태가 고개를 끄덕였다.
“금융권 특성상 소문이 퍼지면 다른 채권자들도 동요합니다. 김성태 대표가 오늘 오전 11시에 여의도 본사에서 긴급 이사회를 엽니다.”
시우는 벽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9시 40분이었다. 여의도까지 이동하기에 부족하지 않은 시간이었다.
“서연 씨, <낙화> 정산금 입금 입증 서류와 SBS 제작비 지급 보증 증빙을 준비해 주세요.”
윤서연이 서류 봉투를 꽉 잡으며 대답했다.
“이미 준비해 두었습니다. 루미너스 법인 에스크로 계좌의 잔고 증명서와 입금 예정 보증서도 함께 묶었습니다.”
“좋습니다. 여의도로 이동합니다.”
오전 11시, 여의도 한성 캐피탈 본사 12층 대표실.
김성태 대표는 창가를 향해 서서 불 꺼진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찌르고 있었다. 그의 넓은 책상 위에는 주력 채권 은행에서 보낸 채권 조기 상환 청구서와 이사회 긴급 안건지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문이 열리고 강시우가 걸어 들어왔다. 그 뒤를 윤서연과 오기태가 든든하게 받쳤다.
김성태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강 대표. 하필 이런 초라한 모습을 보여 주게 됐군요.”
“신성 측 블루스톤 파트너스가 채권단을 움직였습니까?”
김성태가 쓰라린 미소를 지으며 담배를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맞소. 한성 테크 부도설을 빌미로 채권단이 갑자기 150억 원 상환을 독촉하고 있어요. 오늘 이사회에서 루미너스의 공동 제작 수익 지분과 한성 캐피탈 보유 자산을 조기 매각하지 않으면 당장 신용 등급을 하강시키겠다고 협박 중입니다.”
그는 자책하듯 머리를 짚었다.
“나 때문에 또 루미너스에 불똥이 튈 판입니다. 강 대표가 사준 자사주 10% 덕분에 숨통은 틔웠지만 금융권 놈들이 집단으로 밀어붙이니 당장 현금이 모자라요.”
시우는 김성태의 맞은편 가죽 의자에 조용히 앉았다.
“김 대표님, 채권단이 노리는 건 한성 캐피탈의 파산이 아닙니다. 루미너스가 쥔 <블랙 아웃> 제작권과 수익 지분을 헐값에 뺏는 겁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장 오늘 오후까지 상환 입장을 밝히지 않으면 자산 압류 절차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상환할 필요 없습니다. 대신 채무 구조를 완전히 바꿔 버리죠.”
시우가 윤서연에게 신호를 보냈다. 서연이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 세 권을 김성태의 책상 위에 올렸다.
“이게 뭡니까?”
“첫째는 영화 <낙화>의 최종 입금 확인서입니다. 이번 주 금요일 루미너스로 12억 6천만 원이 완납됩니다. 둘째는 SBS <블랙 아웃> 티저 공개 후 몰려든 메인 협찬사 3곳의 계약 확정서입니다.”
김성태가 눈을 크게 뜨며 서류를 펼쳤다.
“협찬사 계약 확정서?”
“티저가 터지면서 자동차, 금융, 아웃도어 브랜드 3곳이 선집행 협찬금을 내걸었습니다. 총액 35억 원입니다. 이 중 루미너스의 에스크로 계좌로 들어오는 선집행금만 20억 원에 달합니다.”
시우는 김성태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루미너스가 이 20억 원을 한성 캐피탈의 신규 당일 지급 보증금으로 에스크로에 묶겠습니다. 그리고 채권단에게 전달하십시오. 조기 상환 요청은 정당한 유예 기간 조항을 위반했으므로 법적 대응을 진행할 것이며 한성 캐피탈의 유동성은 루미너스 법인 자금과 공동 제작 수익으로 이미 차고 넘친다고요.”
김성태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강 대표. 그 20억 원은 루미너스의 차기 제작 자금 아닙니까? 그걸 날 위해 보증으로 묶겠다고요?”
“김 대표님은 이미 루미너스의 우호 지분 80%를 완성해 준 혈맹입니다.”
시우의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단단했다.
“저들이 흔드는 건 숫자와 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실재하는 작품과 현금 흐름으로 대답합니다. 김 대표님이 흔들리지 않으면 저들의 공격은 그대로 자해 공작이 됩니다.”
김성태는 멍하니 서류를 바라보다가 이내 가슴을 크게 부풀려 숨을 깊게 내쉬었다. 그의 눈에 다시 팽팽한 열정이 돌아왔다.
“내가 주판알만 튕기던 금융꾼이라 강 대표의 깊이를 몰라봤군요. 좋습니다. 오늘 이사회에서 채권단 놈들 목을 단단히 꺾어 놓겠습니다.”
수요일 오후 2시, SBS 드라마센터 4층 대회의실.
대형 프로젝터 화면에는 <블랙 아웃> 메인 광고주 미팅 자료가 떠 있었다.
회의실 안에는 문세진 CP, 백도현 감독, 그리고 국내 최대 자동차 브랜드와 금융사의 마케팅 이사들이 앉아 있었다. 그 맞은편에 강시우와 신우진, 윤서연이 자리했다.
신성 엔터 1본부 쪽에서 비공식으로 광고주들에게 전달했던 '신우진 리스크' 및 '제작사 자금 불안' 투서 건으로 미팅이 열린 것이었다.
자동차 브랜드 마케팅 이사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강 대표님, 솔직히 신성 쪽에서 들어온 소문 때문에 우려가 컸습니다. 주연 배우의 이미지나 제작사의 유동성에 문제가 있다면 협찬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습니다.”
문 CP가 난처한 표정으로 시우를 바라보았다.
시우는 당황하는 기색 없이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넘겼다.
화면에는 지난 월요일에 촬영된 신우진의 액션 장면 원본과 SBS 공식 계정에 올라간 메이킹 영상의 반응 분석표가 나타났다.
[프로젝트 흥행 가치 및 광고 가치 분석]
- <블랙 아웃> 주태건 캐릭터 호감도: 94.8% (상승세)
- 타깃 시청층(2049) 브랜드 상기율: 기존 대비 +42% 예상
- 광고주 브랜드 적합도: 거친 전사와 따뜻한 보호자 이미지의 조화로 최상급
“소문은 말로 만들어지지만 결과는 데이터로 증명됩니다.”
시우가 명확한 톤으로 설명했다.
“익명의 조작 영상이 떠돌았을 때 저희 배우와 현장은 거짓 해명 대신 안전 검수 과정과 제대로 된 연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결과 24시간 만에 댓글의 90% 이상이 신우진 배우의 진정성과 주태건 캐릭터에 호응하고 있습니다.”
이어 윤서연이 제작비 에스크로 계좌 관리표를 공유했다.
“루미너스와 SBS는 제작비의 모든 집행을 이중 승인 에스크로 계좌로 운영합니다. 외부 금융 소문과 상관없이 제작비는 단 1원도 유용될 수 없는 구조입니다. 오늘 오전 한성 캐피탈 채권단 역시 이 구조를 확인하고 조기 상환 요청을 전면 철회했습니다.”
마케팅 이사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신우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광고주들을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저는 어설픈 몸짓으로 카메라를 속이지 않습니다. 안전한 현장에서 상대 배우와 제작진을 지키며 연기할 것입니다. 귀사의 브랜드가 주태건이라는 인물 옆에 서서 부끄럽지 않도록 증명하겠습니다.”
우진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진심이 실려 있었다. 과거의 억울함이나 수치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을 믿어 주는 회사와 대표, 그리고 제작진이 뒤에 있다는 확신이 그를 주연 배우로 서게 만들었다.
자동차 브랜드 이사가 펜을 놓으며 껄껄 웃었다.
“좋습니다! 소문 따위에 흔들려 이런 배우와 작품을 놓칠 뻔했군요. 기존에 예정했던 차량 지원 외에 메인 PPL 계약까지 확정하겠습니다.”
금융사 이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도 제작지원금 15억 원 집행을 오늘 내로 승인하겠습니다. 강 대표님, 윤 팀장님, 믿음이 가는군요.”
문 CP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시우의 손을 꽉 잡았다.
“강 대표, 정말 대단합니다. 신성이 사방에서 판을 흔드는데 이렇게 깔끔하게 잡아채다니.”
“현장이 튼튼하면 외부 바람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시우가 미소를 지었다.
수요일 오후 5시, 청담동 신성 엔터테인먼트 1본부장실.
차형준은 책상 위에 놓인 두 장의 문서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첫 번째는 한성 캐피탈 채권단이 조기 상환 요청을 철회하고 루미너스의 에스크로 자금을 바탕으로 정상 만기 연장에 합의했다는 금융 보고서였다.
두 번째는 신성홀딩스 감사팀에서 날아온 공식 통지서였다.
[1본부장 차형준 상무 대상: 외주사 불법 자금 집행 및 부당 현장 개입 혐의에 대한 감사 출석 요구서]
문이 열리고 본사 감사팀 직원 세 명이 들어섰다.
“차형준 상무님. 회장님 지시로 1본부의 지난 1년간 외주 거래 내역 및 법인카드 집행 건에 대해 정밀 감사를 진행합니다. 지금 바로 감사실로 이동해 주십시오.”
차형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셔 나갔다.
“이게…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신성을 위해 일을….”
“브릿지미디어 계좌로 들어간 불법 외주 자금과 SBS 법무팀에서 접수된 증거 보존 통지서가 이미 회장님께 보고되었습니다.”
감사팀 직원의 목소리는 얼음처럼 차가웠다.
차형준은 무너지듯 의자에 주저앉았다. 루미너스를 무너뜨리려 끌어들였던 수작과 꼼수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자신을 향한 밧줄이 되어 목을 죄어 오고 있었다.
같은 시각, 역삼동 루미너스 기획.
502호의 가벽 공사가 끝나고 깔끔한 정돈이 완료되어 있었다. 확장된 사무실 입구에는 금빛으로 빛나는 새로운 현판이 걸렸다.
[주식회사 루미너스 (LUMINOUS Co., Ltd.)]
대표실에는 강시우를 비롯해 유나린, 최지환, 신우진, 윤서연, 오기태가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유나린이 현판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대표님! 이제 진짜 주식회사 루미너스네요!”
최지환도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작은 공유 오피스에서 시작했는데 어느새 이렇게 든든한 울타리가 되었군요.”
신우진은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이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차기작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 주겠습니다.”
윤서연이 정식 영입된 운영팀장의 모습으로 서류첩을 닫으며 보고했다.
“주식회사 전환 등기 절차가 완료되었습니다. 법인 계좌 분리, 내부 보안 등급 설정, 소속 배우 스케줄 관리 통제 체계도 모두 정착되었습니다.”
오기태가 시우에게 나지막이 덧붙였다.
“신성 1본부 차형준 상무는 오늘 자로 직무 정지 및 내부 감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루미너스를 향한 1본부의 견제 동력은 사실상 붕괴했습니다.”
시우는 창밖의 역삼동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초반의 절망과 누명, 그리고 1인 기획사의 아슬아슬한 생존전 끝에 루미너스는 마침내 스스로의 힘으로 바로 서는 튼튼한 축을 완성했다.
그의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업적 달성: 튼튼한 기반]
- 주식회사 전환 및 자본 경영권 안정화 완료
- 소속 배우 3인(유나린, 최지환, 신우진) 라인업 정착
- 제작·투자 연계망 확립
- 보상: 중급 스타메이커 Lv.2 안착 및 프로젝트 직접 패키징 권한 개방
시우는 밝게 웃으며 모두를 돌아보았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하지만 이건 시작일 뿐입니다.”
그의 시선이 유나린, 최지환, 신우진을 차례로 담았다.
“이제 루미너스는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우리가 원하는 작품과 최고의 연기로 연예계의 판을 바꿔 나갈 겁니다.”
소속 배우들과 직원들의 얼굴에 확신과 기대에 찬 미소가 퍼져 나갔다.
루미너스의 진짜 항해가 비로소 막을 올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