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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25화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25화: 꺼지지 않는 조명

월요일 새벽, SBS 드라마센터 액션 세트장.

조명은 이미 켜져 있었다. 그런데 폐쇄된 계단 세트에는 발자국 하나 나지 않았다.

민재호가 빈 철제 난간 앞에서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 장면에 필요한 충돌 방지 패드와 분리형 소품 총은 여섯 시 반까지 반입돼야 했다. 소품이 없으면 계단을 따라 범인을 쫓는 장면 자체를 찍을 수 없었다.

대여업체 직원은 난처한 얼굴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제작사에서 취소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보험 확인도 보류됐다고 했고요. 그래서 트럭을 돌렸습니다.”

문세진 CP의 눈썹이 단번에 내려갔다.

“우리가요? 누가 취소했다는 겁니까?”

화면에는 제작사 도메인과 한 글자만 다른 주소가 떠 있었다. 첨부된 확인서에는 <블랙 아웃> 촬영 보험의 증권 번호와 현장 책임자 이름까지 적혀 있었다.

신우진은 비어 있는 계단을 바라봤다. 바로 옆에서 아역 배우가 대사를 외우다 말고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장비가 없으면 동선을 줄이면 됩니다. 제가 난간을 넘지 않고 바로 아래로 내려가면….”

“안 됩니다.”

강시우의 대답은 짧았다.

“오늘은 장비가 없어서 배우가 몸으로 메우는 날이 아닙니다.”

우진의 입이 다물렸다. 그는 말끝에 붙어 있던 변명을 삼켰다. 촬영이 밀릴 때마다 몸부터 내놓던 습관이 먼저 튀어나왔다는 걸 자신도 알았다.

윤서연은 이미 노트북을 켜고 권한표를 확인하고 있었다.

“취소 요청은 제작총괄과 안전 감독, 운영 담당의 이중 확인이 있어야 유효합니다. 이 메일에는 승인 번호가 없습니다.”

그녀가 보험 확인서를 확대했다.

“증권 번호 끝 두 자리가 기존 문서와 다릅니다. 보험사 담당자에게 지금 바로 확인하겠습니다. 대여업체도 취소 요청을 철회하지 말고 통화 녹음과 메일 원본을 보관해 주세요.”

대여업체 직원이 망설였다.

“저희도 손해가 걸린 일이라서요. 현장에 장비를 다시 보내려면….”

“결정은 제가 합니다.”

시우가 말했다.

“가짜 요청이었다는 사실이 확인되면 취소 수수료는 제작 쪽에서 정산합니다. 지금은 트럭 위치만 알려 주세요.”

직원이 고개를 끄덕이며 전화를 걸었다.

우진이 조용히 물었다.

“제 영상 때문에 이런 일까지 오는 겁니까?”

시우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우진 씨를 흔드는 일이 목적일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촬영이 우진 씨 혼자 감당할 빚이 되는 건 아닙니다.”

그는 세트 입구에 붙은 콜시트를 가리켰다.

“여기 적힌 사람 모두가 현장을 만드는 겁니다. 배우가 무리해서 한 컷을 살리면 나머지 약속도 같이 무너집니다.”

우진은 아역 배우 쪽을 보았다. 아이는 어른들의 말은 듣지 않는 척하면서도 빈 계단을 자꾸 흘끔거리고 있었다.

“그럼 저는 뭘 하면 됩니까?”

“대기하세요. 그리고 장면을 다시 확인하십시오. 그게 지금 배우님 몫입니다.”


세트장 뒤 임시 사무실에서 오기태는 태블릿 두 대를 번갈아 보았다.

“가짜 계정입니다. 주소만 제작사처럼 만들었고 실제 발신 서버는 외부 중계 계정입니다.”

그가 화면을 넘겼다.

“그런데 접속 기록에 브릿지미디어 외주 편집실에서 쓰던 장비 식별값이 또 나왔습니다.”

윤서연이 고개를 들었다.

“과거 영상 조작본에 남았던 값과 같은 겁니까?”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같은 장비 묶음에서 나온 번호입니다. 그리고 신성 협력사 직원 계정이 이틀 전 그 중계 계정에 접속한 기록이 있습니다.”

강시우의 눈앞에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위협 연결 분석]

- 신성 협력사 직원 ↔ 외부 중계 계정: 고위험 연결
- 브릿지미디어 외주 편집 장비 ↔ 취소 메일 발신 서버: 연관 정황 확보
- 권장 대응: 장비·보험 기록 분리 보존 후 공식 채널 확인

시우는 창을 조용히 지웠다.

“차형준 본부장 지시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외주 직원 개인의 일탈이라고 빠져나갈 여지는 있습니다.”

“그럼 그 선을 지킵시다. 이건 누가 화를 냈느냐가 아니라 누가 어떤 문서를 보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는 문 CP에게 시선을 돌렸다.

“메일 원본과 확인서, 대여업체 통화 기록을 각각 보존해 주세요. SBS 법무에는 사실 확인과 증거 보존만 요청합니다. 기사부터 내지 않습니다.”

문 CP는 한 번 세트 쪽을 돌아봤다. 오전 촬영을 넘기면 아역 배우의 학교 일정과 세트 철거 시간이 겹친다. 오늘을 놓치면 다음 주까지 액션 파트 전체가 밀릴 수 있었다.

“장비는요?”

윤서연이 새로운 표를 띄웠다.

“예비 공급사가 있습니다. 지난주에 장비 변경 권한표를 만들 때 두 곳을 후보로 넣었습니다. 한 곳은 같은 규격 장비를 보유하고 있고 보험사 직통 확인도 가능합니다.”

“두 시간 안에 들어옵니까?”

“긴급 배차를 쓰면 가능합니다. 다만 예산이 늘어납니다.”

문 CP가 제작비 표를 내려다봤다. 오늘 하루의 세트 비용, 스태프 연장 수당, 아역 배우 재소집 비용을 합치면 긴급 배차비보다 훨씬 컸다. 문제는 공동 제작 예비비를 지금 쓰면 이후 홍보비의 여유가 줄어든다는 점이었다.

시우는 표의 숫자를 잠시 보았다.

“예비비에서 처리하죠.”

문 CP가 놀란 얼굴로 올려다봤다.

“강 대표, 그 돈은 티저 공개 뒤에 쓸 돈 아닙니까?”

“티저는 안전하게 찍은 장면이 있어야 쓸 수 있습니다. 오늘 촬영이 깨지면 나중에 쓸 홍보비도 의미 없습니다.”

시우는 윤서연에게 말했다.

“예비 공급사와 계약하고 보험사 확인은 서연 씨가 직접 받으세요. 이후 장비 변경은 제작사와 루미너스 양쪽 승인표를 거친다는 문구도 넣고요.”

“알겠습니다.”

서연은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걸었다. 몇 분 뒤 제작사 단체 메신저에 새 승인표와 비상 연락망이 올라갔다.

문 CP가 화면을 보며 낮게 웃었다.

“표 하나가 촬영을 살리네요.”

“표가 살린 게 아닙니다.”

시우가 답했다.

“누군가 확인할 수 있게 만든 게 살린 겁니다.”


두 시간 뒤, 검은 장비 케이스가 세트장 안으로 들어왔다.

민재호는 케이스마다 일련번호를 대조하고 충돌 방지 패드의 고정 상태를 손으로 눌러 봤다. 보험사 담당자는 영상 통화로 장비 목록과 증권 번호를 다시 확인했다.

아역 배우는 계단 아래 의자에 앉아 있었다. 우진이 그 앞에 쪼그려 앉았다.

“무섭니?”

아이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저씨가 진짜로 저 사람을 세게 밀어요?”

우진은 범인 역 배우와 패드가 붙은 벽을 번갈아 보았다.

“세게 보이게만 할 거야. 아저씨가 멈추는 자리가 있고 저 형도 멈추는 자리가 있어.”

그는 바닥에 붙은 노란 테이프를 가리켰다.

“네가 여기서 재킷을 잡으면 돼. 잡기 싫으면 손만 올려도 되고.”

아이는 한참 고민하다가 우진의 재킷 끝을 살짝 잡았다. 우진은 웃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아이가 쑥스러워하지 않도록 기다려 주는 표정이었다.

민재호가 다가와 팔꿈치 보호대를 건넸다.

“계단 세 칸을 내려온 뒤 난간에서 멈춥니다. 범인에게 뛰어내리는 대신 피해자 쪽으로 몸을 틀어요. 제 신호가 들리면 바로 멈추고요.”

조감독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추격의 맛이 약해지지는 않을까요?”

백도현 감독은 모니터에 세워 둔 카메라 구도를 가리켰다.

“주태건은 빨리 달리는 형사가 아닙니다. 누가 다치기 전에 방향을 바꾸는 형사죠. 멈추는 순간이 더 빠르게 보여야 합니다.”

우진은 계단 위에 섰다. 아래에는 가면을 쓴 범인 역 배우와 웅크린 아역 배우가 있었다.

예전 같으면 난간을 넘는 쪽을 골랐을 것이다. 몸을 던져야 화면이 산다고 믿었다. 다친 뒤에도 촬영을 이어 가는 것이 프로라는 말도 오래 믿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뒤에는 매트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 안전 감독이 있었다. 옆에는 아이가 잡을 재킷 끝을 고쳐 주는 의상팀이 있었다. 누군가의 일은 배우가 대신 견딜 몫이 아니었다.

“레디. 액션!”

우진은 계단을 세 칸 내려왔다.

범인이 아이 쪽으로 몸을 돌리는 순간 그는 난간에서 멈췄다. 한 박자 늦은 것처럼 보인 정지는 곧 단단한 방향 전환이 됐다.

그는 범인의 팔을 꺾어 패드가 붙은 벽으로 밀어붙였다. 힘은 컸지만 팔꿈치는 정해진 각도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제압이 끝난 뒤에도 그는 범인의 얼굴을 확인하지 않았다.

먼저 아이를 봤다.

“다친 데 없니?”

아이가 고개를 저었다. 우진은 그제야 무전기를 들었다.

“지원 요청합니다. 피해자 확보.”

아이는 약속한 대로 그의 재킷 끝을 잡았다.

“컷!”

백도현 감독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좋습니다. 한 번만 더 갑시다. 이번에는 아이가 재킷을 잡은 뒤 우진 씨가 아이 눈높이로 자세를 낮추는 타이밍을 살려 봐요.”

우진은 재킷 단추를 하나 풀었다. 작은 손이 더 쉽게 잡을 수 있게 하려는 움직임이었다.

두 번째 테이크가 시작됐다.

범인을 제압한 우진은 무릎을 굽혀 아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의 손은 아이에게 닿지 않은 채 옆에 멈췄다. 도망갈 길도 남겨 주고 붙잡을 길도 남겨 주는 거리였다.

“괜찮아.”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이제 여기서는 내가 먼저 볼게.”

그 순간 시우의 눈앞에 창이 떠올랐다.

[배우-배역 싱크로율 분석]

- 신우진 ↔ 주태건: 98%
- 장면 몰입도: S-
- 잠재력 순간 개방: 발동

창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우진은 숫자를 알지 못했다. 다만 컷 소리가 난 뒤에도 아이가 놓지 않은 재킷 끝을 보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멈추니까 보이네요.”

시우가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뭐가요?”

“쫓아가야 할 사람보다 먼저 붙잡아야 할 사람이요.”

시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주태건입니다.”


오후 세 시, SBS 법무팀은 브릿지미디어와 관련 외주사에 증거 보존 통지를 보냈다.

문 CP는 제작진과 대여업체 담당자 앞에서 공식 공지를 읽었다.

“오늘 확인된 사칭 메일과 보험 문서는 사실관계 확인 전까지 외부 유출을 금지합니다. 장비와 보험 변경은 지정된 승인표와 공식 창구만 사용합니다. 배우 관련 홍보 자료 역시 제작사 확인 전 외부 배포를 금지합니다.”

대여업체 직원은 고개를 숙였다.

“저희도 발신 주소만 보고 급하게 판단했습니다. 원본 메일과 통화 기록은 전부 제출하겠습니다.”

문 CP는 단호했지만 목소리를 높이지 않았다.

“그게 가장 빠른 수습입니다. 오늘처럼 한 통의 메일로 현장이 멈추면 결국 다치는 건 작품입니다.”

잠시 뒤 제작사와 루미너스가 준비한 티저가 공식 계정에 올라왔다. 안전 감독 검수 장면과 장비 일련번호 확인 장면을 담은 짧은 메이킹 영상도 함께였다.

영상의 첫 장면에서 우진은 범인을 쫓지 않았다.

어두운 계단 아래에 웅크린 아이에게 재킷을 내밀고 그 앞을 막아섰다. 이어진 장면에서 그는 아이의 손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렸다. 그제야 고개를 들고 범인을 바라봤다.

댓글은 빠르게 올라왔다.

‘저 배우가 이렇게 눈빛을 쓸 줄 몰랐다.’

‘액션도 좋은데 아이를 대하는 장면이 더 기억난다.’

‘안전 확인까지 보여 주니까 오히려 믿음이 간다.’

익명 계정의 조작 영상은 아직 내려가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열두 초짜리 장면만 보지 않았다. 원본의 맥락과 오늘의 장면, 그리고 촬영장이 남긴 기록이 함께 비교되고 있었다.

우진은 화면을 보다가 시우에게 휴대폰을 건넸다.

“대표님. 오늘은 제가 멈춘 게 맞았죠?”

“맞습니다.”

“다음에도 멈추겠습니다. 누가 다치기 전에요.”

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주태건이고 우진 씨가 지킬 배우의 값입니다.”

같은 시각, 청담동 신성 엔터 1본부장실.

차형준은 티저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태블릿을 덮었다.

“외주 쪽은?”

“SBS 법무에서 통지를 보냈습니다. 메일 계정과 장비 기록 제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삭제하라고 했던 통화는?”

비서가 대답하지 못했다.

차형준의 손가락이 책상 위를 두 번 두드렸다. 현장을 멈추게 하려 했더니 현장은 더 많은 기록을 남겼다. 배우의 과거를 잘라 냈더니 사람들은 그가 지키는 장면을 먼저 보게 됐다.

그는 책상 서랍을 열었다. 안에는 루미너스의 공동 제작 수익 지분과 한성 캐피탈의 자금 흐름, 김성태가 보증을 선 계열사 만기 일정이 정리된 파일이 들어 있었다.

“현장을 건드리면 기록이 남는다.”

차형준이 낮게 말했다.

“그럼 기록이 아니라 돈을 움직이면 되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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