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눈에만 배우들의 스탯이 보인다

13화: 빛 뒤에 도사린 그림자
서울 강남구 역삼동. 빌딩 숲 사이로 쏟아지는 찬란한 아침 햇살이 넓은 통창을 통과해 깨끗하게 닦인 대리석 바닥 위로 눈부시게 흩어졌다.
마포구 구석진 골목에 있던, 벽지가 들뜨고 바닥이 삐걱거리던 낡은 임대 사무실과는 공기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40평 규모의 번듯한 공간에는 세련된 검은색 가죽 소파와 최신 사무용 PC들이 자리를 잡았고, 복도 안쪽으로는 방음 시설을 완비한 전용 연습실과 불투명 유리로 분리된 아늑한 회의실까지 갖춰져 있었다.
“대표님! 진짜 꿈만 같아요. 우리 사무실에 진짜 회의실이랑 바 테이블이 있다니요!”
유나린이 가죽 의자를 빙글빙글 돌리며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녀의 머리 위로 명멸하는 스타메이커 시스템의 알림창이 현재의 높은 사기와 성취감을 선명하게 증명해 보였다.
[유나린의 루미너스 기획 신뢰도: 100% (맹신)]
[소속 배우 유나린의 스타성: A+ (급속 성장 중)]
“여기가 진짜 우리 연습실 맞습니까? 한가운데에 이렇게 커다란 전신거울이 있다니…….”
최지환 역시 연습실의 두꺼운 방음문을 조심스레 만져보며 벅차오르는 가슴을 주체하지 못했다. 대학로의 곰팡이 냄새 나던 차가운 지하 연습실에서 대관 시간이 끝나 쫓겨나듯 방황하던 시절을 생각하면, 역삼동의 이 공간은 그에게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지환은 비로소 자신이 진짜 대접받는 배우가 되었다는 실감을 했다.
강시우는 소속 배우들의 상기된 얼굴을 보며 나직이 미소를 지었다.
“이건 아직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 기획실 직원도 더 뽑고, 우리 루미너스의 이름을 단 사옥을 강남 한복판에 올릴 때까지 갈 길이 멉니다. 두 사람 모두 들뜨지 말고 다음 일정 준비하세요.”
“넵! 대표님 말이라면 무조건이죠!”
나린이 장난스레 거수경례를 붙이며 지환의 어깨를 툭 쳤다. 두 배우가 웃으며 안쪽 개인 락커룸으로 들어가 짐을 정리하기 시작하자, 시우는 천천히 창가로 걸어갔다.
4층 사무실 유리창 너머로 역삼동 번화가의 골목길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시우는 창문 아래, 건물 맞은편 이면도로 그늘진 곳에 주차된 낡은 검은색 카니발 차량을 시선으로 쫓았다. 차량 선팅이 워낙 짙어 안쪽이 보이지 않았지만, 벌써 세 시간째 시동만 켠 채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꼴이 여간 수상한 게 아니었다. 가끔 선팅 필름의 틈새로 카메라 망원렌즈의 금속 반사광이 번뜩이기도 했다.
시우는 눈을 가늘게 뜨며 마음속으로 시스템을 호출했다.
‘스캔 작동. 저 차량 조수석의 인물 타겟팅.’
지잉-
순식간에 시야 위로 황금빛 인터페이스가 떠오르더니, 선팅 뒤에 숨어 망원렌즈 카메라를 조정하고 있던 사내의 상태창이 선명하게 노출되었다.
[이름: 오기태 (38세)]
[직업: 사설 조사원 (오성탐정사무소 대표)]
[상태: 표적(강시우 및 루미너스 배우들) 밀착 감시 및 정보 수집 중]
[의뢰인: 신성 엔터테인먼트 1본부장 김도식]
[기타 정보: 사채 채무로 인한 자금난 (미변제 잔액 4,200만 원). 의뢰인 김도식의 안하무인 격 갑질과 잦은 정산 지연에 깊은 불만 축적 중]
‘김도식 본부장 짓이군.’
시우의 입꼬리가 차갑게 올라갔다.
백현우의 낙하산 캐스팅이 무산되고 지환이 ‘낙화’의 단독 주연을 거머쥐자마자 곧바로 사설 탐정을 붙였다. 자금줄을 캐내어 뒤가 구린 투자자가 있는지 확인하거나, 배우들의 과거 사생활을 털어 약점을 쥐겠다는 비열한 속셈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보낸 사냥개는 치명적인 약점을 품고 있었다. 사채 빚으로 인한 자금난, 그리고 고용주인 김도식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
‘사냥개의 목줄을 쥔 손을 바꾸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지.’
시우가 생각을 정리하고 있을 때, 사무실 입구의 벨이 거칠게 울렸다.
문을 열고 들어선 인물은 독립영화 ‘낙화’의 민지훈 감독이었다. 불과 이틀 전에 오디션장에서 지환의 연기를 보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극찬을 쏟아내던 그의 얼굴은, 지금 마치 흙빛처럼 어둡게 질려 있었다. 손에는 찌그러진 종이 커피 컵이 아슬아슬하게 들려 있었다.
“민 감독님?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십니까?”
시우가 안락의자를 권했으나 민 감독은 앉지도 못한 채 머리를 감싸 쥐었다.
“강 대표님…… 큰일 났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영화, 촬영을 미루거나 최악의 경우 아예 엎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소리에 짐을 정리하던 지환이 깜짝 놀라 다급하게 다가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감독님? 캐스팅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고 촬영 준비도 다 마쳤는데 갑자기 엎어지다니요?”
민 감독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회의 테이블을 짚었다.
“신성의 김도식 본부장…… 그 독종 놈이 기어이 사달을 냈습니다. 우리 영화에서 지환 씨가 연기할 주인공 ‘태성’과 가장 격렬하게 대립하는 라이벌이자 빌런인 ‘동하’ 역에 캐스팅됐던 한준우 배우 아시죠? 방금 전 준우의 소속사 대표에게서 하차 통보가 왔습니다.”
“하차요? 갑자기 왜요?”
지환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공식적인 핑계는 준우의 건강상 이유라지만, 실상은 뻔합니다. 신성 쪽에서 소속사 대표에게 압박을 넣은 겁니다. 루미너스 배우가 주연으로 나오는 저예산 독립영화에 계속 협조했다간, 앞으로 신성 1본부가 제작하는 모든 대작 드라마와 상업영화 캐스팅에서 소속 배우들을 전부 배제하겠다고요. 대기업의 체급을 무기로 양아치 짓을 한 겁니다.”
민 감독의 목소리가 억울함과 분노로 부들부들 떨렸다.
“독립영화는 일정과 자본이 극도로 타이트해서 다음 주부터 바로 촬영에 들어가야 합니다. 빌런 캐릭터인 ‘동하’는 주인공 태성의 내면 속 죄책감을 극대화하고 극의 전체 서사를 지탱하는 핵심 인물입니다. 동하 역할이 펑크가 난 상태로는 단 한 씬도 카메라에 담을 수 없어요. 지금 당장 어디서 연기력 확실하고 신성의 압박에도 흔들리지 않을 배우를 구한단 말입니까…….”
민 감독은 절망 어린 눈으로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신성이라는 거대 공룡의 그림자가 그들의 작은 스크린을 통째로 짓밟고 있었다.
지환의 어깨가 다시 미세하게 굳어졌다. 자신 때문에 영화가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죄책감이 다시 그의 목줄을 조여오려 했다.
탁.
그때, 시우가 지환의 어깨를 가만히 짚었다. 단단하고 따뜻한 온기가 지환의 내면으로 스며들며 요동치던 심박수를 진정시켰다.
“민 감독님, 걱정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시우의 음성은 지나치게 차분했다. 마치 이 모든 상황을 미리 내다보고 손바닥 위에 올려두고 있었던 것처럼.
“오히려 잘됐습니다. 한준우는 확실히 안정적인 배우이긴 했지만, 동하 역이 가진 서늘하고 광기 어린 아우라를 담아내기엔 마스크가 너무 부드럽고 고왔습니다. 저 역시 시나리오 매칭률 면에서 조금은 아쉽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네? 하, 하지만 대안이 없지 않습니까. 신성의 눈치를 보느라 이름 있는 기획사의 배우들은 다 몸을 사릴 텐데요.”
민 감독이 답답한 듯 묻자, 시우가 미소를 지었다.
“이름이 알려진 배우 중에서 찾으니까 대안이 없는 겁니다. 연기력은 그들을 압도하지만, 기회가 없어 어둠 속에 묻혀 있는 진짜 광기가 대학로에 있습니다. 제가 3일 안에 한준우보다 열 배는 더 뛰어난 완벽한 ‘동하’를 찾아오겠습니다.”
“3일이요? 그게 정말 가능합니까?”
“저를 믿고 딱 3일만 기다려 주십시오. 지환 씨는 예정대로 태성의 독백 씬 연습에만 매진하세요. 흔들릴 시간 없습니다.”
시우의 눈빛에서 뿜어 나오는 압도적인 확신에 민 감독은 멍하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지환 또한 흐트러졌던 마음을 추스르며 대표의 지시에 고개를 깊이 끄덕였다.
다음 날 목요일 오후, 서울 혜화동의 낙후된 빌딩 뒤편 이면도로.
시우는 허름한 중식당 배달 오토바이들이 줄지어 주차된 인도 옆에서 묵묵히 서 있었다. 매캐한 담배 연기와 기름 냄새가 뒤섞인 좁은 골목 안으로, 빨간색 오토바이 한 대가 요란한 배기음을 내뿜으며 멈춰 섰다.
배달 헬멧을 벗은 사내의 얼굴은 20대 후반 특유의 파릇함이 무색할 정도로 피로와 반항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와 살짝 각진 턱선. 그냥 길에서 마주치면 움찔하며 시선을 피하게 만들 정도로 거칠고 서늘한 기운을 풍기는 마스크였다.
그가 바로 시우가 대학로의 무명 극단 아카이브와 예전 스캔 기록을 뒤져 찾아낸 원석, 신우진이었다.
시우는 망설임 없이 우진의 앞으로 걸어가 시스템을 작동시켰다.
[이름: 신우진 (29세)]
[재능: 연기 (S) - 특화: 악역, 사이코패스, 광기 표출]
[잠재력: 94 / 100]
[상태: 만성적인 생활고(월세 3개월 연체), 배우 은퇴 결심 완료 및 생계형 배달 알바 전념 중]
[시나리오 '낙화' 캐릭터 '동하' 매칭률: 97% (극상)]
S급 악역 특화 재능. 게다가 잠재력은 94에 달했다.
한준우가 가졌던 60%대의 얄팍한 캐릭터 매칭률과는 차원이 다른,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동하’가 눈앞에 서 있었다.
“신우진 씨.”
시우가 이름을 부르자, 오토바이 뒤편의 배달 가방을 정리하던 우진이 짜증 가득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세요? 배달 주문은 식당 안으로 가셔서 말씀하세요.”
“배달이 아니라, 배우 신우진을 캐스팅하러 왔습니다. 루미너스 기획 대표 강시우입니다.”
우진은 시우가 건넨 명함을 힐끗 보더니, 코웃음을 터뜨렸다.
“루미너스? 아, 그 유나린 키웠다는 요즘 핫한 기획사? 근데 사람 잘못 찾아오셨네요. 나 연기 접었습니다. 마지막 연극 끝난 지가 벌써 1년이 넘었어요. 오디션 갈 때마다 내 마스크가 범죄자 같네 어쩌네 하면서 떨어지는 것도 지긋지긋하고, 당장 이번 달 월세 밀려서 오토바이 타기도 바쁩니다.”
우진은 거칠게 명함을 시우에게 돌려주려 했다. 하지만 시우는 명함을 받아두지 않은 채, 준비해 온 ‘낙화’의 시나리오 서류 봉투를 우진의 품에 턱 안겨주었다.
“당신 마스크가 범죄자 같다고 거절한 감독들은 눈이 먼 멍청이들입니다. 그건 악역으로서 관객들을 단숨에 공포로 몰아넣을 수 있는 신이 내린 최고의 축복이니까요. 봉투 안에 든 대본, 딱 5분만 읽어 보세요.”
“바쁘다니까요…….”
“5분 시간 내주는 대가로 시급 10만 원 드리죠.”
시우가 품에서 신권 5만 원권 두 장을 꺼내 오토바이 계기판 위에 올려놓았다. 우진은 황당하다는 듯 시우를 쏘아보았으나, 돈의 필요성과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연기에 대한 지독한 갈증에 이끌려 천천히 대본을 꺼냈다.
우진이 대본을 넘기기 시작했다. 빌런 ‘동하’가 주인공 태성을 흙더미 속에 버려두고 홀로 탈출하며 차갑게 비웃는 장면이었다.
스륵, 스륵.
종이가 넘어가는 소리만 들리던 골목길의 공기가 미세하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대본을 읽어 내려가는 우진의 찢어진 눈동자가 순식간에 기괴할 정도로 차갑게 변해갔다. 그의 입술 틈새로 뱀처럼 스산한 읊조림이 새어 나왔다.
“태성아. 너무 원망하지 마라. 어차피 산 사람은 살아야지. 네가 거기 묻혀서 비료가 돼 줘야, 내가 밖에서 빛을 볼 거 아니냐.”
단 한 줄의 대사였으나,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라면 등골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잔인하고 설득력 있는 목소리였다.
[신우진의 캐릭터 몰입도: 96%]
[S급 악역 특화 아우라 방출 중]
[시나리오 싱크로율: 97%]
시우의 심장이 작게 고동쳤다.
완벽했다. 껍데기뿐인 기성의 한준우 따위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진짜 심연의 어둠을 품은 괴물이 골목길에 우뚝 서 있었다.
우진은 대본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억눌려 있던 배우로서의 피가 혈관 속에서 뜨겁게 역류하고 있었다.
시우가 우진의 어깨를 잡으며 힘주어 말했다.
“평생 오토바이 핸들만 잡고 남의 배고픔이나 해결해주며 살 겁니까, 아니면 이 대본으로 스크린 위에서 관객들의 심장을 쥐고 흔들 겁니까? 선택은 당신 몫입니다.”
우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본을 가슴에 터지도록 꼭 껴안았다. 그의 눈동자에 잃어버렸던 열망의 불꽃이 다시 맹렬하게 타올랐다.
“……하겠습니다. 이 역할, 반드시 내가 해야겠습니다.”
같은 날 저녁, 역삼동 루미너스 사무실 뒷골목의 한적한 지하 주차장.
하루 종일 루미너스 건물 주변을 맴돌며 감시하던 오성탐정사무소 대표 오기태는 피로에 절어 카니발 운전석에 몸을 기댄 채 담배를 물고 있었다.
“에휴, 신인 광고 정산금 받아 이사한 거 말고는 자금줄에 별다른 흔적도 없고…… 김도식 그 대머리 영감탱이는 매일 전화해서 닥달만 해대고. 돈도 제때 안 주는 인간이 바라는 건 오질나게 많아요.”
기태가 투덜거리며 라이터 불을 켜려던 찰나였다.
찰칵.
조수석 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부드럽게 열렸다. 기태가 소스라치게 놀라 고개를 돌린 순간, 그곳에는 오늘 하루 종일 카메라 렌즈로 감시했던 바로 그 사내, 강시우가 조용히 조수석에 올라타고 있었다.
“어, 억!”
기태가 본능적으로 조작 레버를 당겨 차를 빼려 했으나, 시우는 이미 그의 키박스에 꽂힌 자동차 열쇠를 가볍게 뽑아 쥔 상태였다.
“놀라실 것 없습니다, 오기태 사장님.”
시우가 나직하게 웃으며 열쇠를 손가락 끝으로 돌렸다.
“신성 김도식 본부장 밑에서 일하느라 고생이 많으십니다. 세 시간 동안 시동 켜두면 기름값도 안 나올 텐데요.”
기태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어 내리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의 이름과 소속, 그리고 고용주의 존재까지 단번에 읊는 시우의 태도에서 형언할 수 없는 지독한 압박감이 풍겼기 때문이었다.
“당신…… 어떻게 나를 알고…….”
“신성이 하루에 얼마 주던가요? 일당 50만 원? 그것도 매번 정산 핑계 대며 보름씩 미룬다고 들었는데. 사채 빚 4,200만 원에 일복리 이자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힐 텐데, 그런 푼돈과 김도식의 개 같은 갑질을 견디며 일하기엔 오 사장님 능력이 아깝지 않습니까?”
기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격렬하게 흔들렸다.
자신의 사채 채무 금액과 미변제 잔액까지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이 기획사 대표는 대체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등줄기를 타고 차가운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너…… 정체가 뭐야? 내 뒷조사를 미리 해둔 건가?”
“제가 오 사장님께 제안을 하나 하죠.”
시우는 기태의 날 선 경계를 가볍게 무시하고 자켓 안주머니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대시보드 위에 올려놓았다. 선명한 0이 가득한 1,000만 원권 진짜 수표였다.
“앞으로 김도식이 주는 일당의 두 배를 매일 아침 현금으로 선입금해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제 지시를 완수하고 영화가 무사히 크랭크인하면, 오 사장님의 사채 빚 4,200만 원을 전액 대위변제해 드리지요.”
기태는 침을 크게 삼켰다. 대시보드 위의 수표가 내뿜는 광채는 가짜가 아니었다. 사채업자들의 매서운 독촉에서 단숨에 벗어날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내가…… 뭘 하면 되지?”
기태의 목소리가 떨렸다. 시우가 차가운 눈빛으로 미소를 지으며 속삭였다.
“더블 에이전트가 되십시오. 김도식에게는 매일 밤 제가 지정해 주는 허위 보고서만 올리면 됩니다. 예컨대, 루미너스가 최근 대형 기획사인 ‘초코 엔터’의 인수합병 전략팀과 극비리에 접촉해 50억 규모의 지분 매각 및 우회 투자를 유치하려 한다는 정보 같은 것 말입니다.”
초코 엔터(Choco Enter). 신성 엔터테인먼트가 가장 두려워하는 업계 최고의 공룡이었다.
김도식이 그 정보를 듣는다면, 루미너스 같은 작은 1인 기획사의 독립영화 캐스팅 펑크 따위는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대기업 간의 경영권 방어와 지분 전쟁을 막기 위해 온 모든 정보력과 인맥을 엉뚱한 초코 엔터 쪽에 쏟아붓게 될 터였다. 완벽한 연막작전이었다.
기태는 지옥 같은 빚더미와 김도식의 매서운 구박을 떠올렸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하겠어. 돈만 제때 입금된다면, 김도식의 눈과 귀를 완벽하게 먼달로 만들어 주지.”
[오기태가 협력자 상태로 전환되었습니다.]
[김도식에 대한 역정보 공작 성공률: 99%]
시우는 기태에게 차 열쇠를 돌려주며 조용히 문을 열고 내렸다.
어두운 지하 주차장 밖으로 걸어 나오자, 역삼동의 밤거리는 오색 빛깔의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휘황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신성이 파놓은 덫은 이제 도리어 그들의 발목을 꺾어버리는 날카로운 족쇄가 될 터였다. 시우는 차가운 밤바람을 맞으며 미소를 지었다.
이제 ‘낙화’의 진정한 크랭크인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