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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시한부 명예교수가 되었다9화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09화 [정직한 검]

오후의 훈련 도구 창고는 묵은 톱밥과 둔탁한 쇠 기름 냄새로 가득했다.

카이드는 헐거워진 목검 선반을 벽에 바짝 붙이며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근로 장학생에게 주어진 일은 오후 내내 수십 자루의 연습용 목검을 분류하고 낡은 자루를 삼끈으로 묶는 작업이었다. 손바닥의 굳은살이 껍질째 뜯겨 나가 통증이 쓰라렸지만 그는 쉬지 않았다.

“이것 봐라. F-Class의 자랑거리 아닌가.”

창고 입구의 햇빛을 가리며 푸른 견장을 단 정식 훈련생 둘이 들어왔다. 앞장선 인물은 검술부 2학년 베른이었다. 그의 허리에는 반짝이는 제식 훈련검이 매여 있었고 손에는 마르첼 보조교관의 인장이 찍힌 대련 신청서 복사본이 들려 있었다.

베른은 발끝으로 목검 더미를 슬 슬 건드리며 비웃었다.

“종이 조각이나 흩날리며 마법을 썼다고 우기더니 결국엔 여기서 빗자루나 쥐고 있었군. 로젠가의 영애는 가문 망신시키고 겨우 잔류 신청서나 썼다지?”

카이드의 손가락이 목검 자루에 닿았다. 굳은살이 뜯긴 자리가 찌릿하게 아파왔지만 그는 목검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 예전이었으면 벌써 검을 고쳐 쥐고 고함을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바닥의 세 원 앞에서 멈추어 서던 하리의 눈빛과 제 손목이 꺾이기 전에 검을 거두었던 자신의 감각이 먼저 떠올랐다.

“할 일이 남았으니 나가 주시죠.”

카이드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담담했다.

베른의 눈썹이 찌푸러졌다. 상대가 펄쩍 뛰며 덤벼들기를 바랐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른은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 카이드의 가슴팍에 던지듯 내밀었다.

“마르첼 교관님이 내린 대련 통지서다. 빈 서명란에 네 이름을 적어라. 일주일 동안 도망치며 F-Class의 가짜 교육을 칭송받을 생각은 버려라. 정식 검술부 마력 측정석 앞에서 네 헐거운 검로가 얼마나 비웃음거리인지 증명해 줄 테니까.”

종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 종이에는 마력 부착량 측정, 표준 보호막 타격 횟수, 3분간의 연속 교차 대련이라는 검술부의 정규 규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칼날에 마력을 억지로 붙여 압력을 겨루는 판이었다. 그 방식대로 싸운다면 카이드의 미세한 잔류 검로는 검을 맞부딪치는 순간 찌그러져 터질 것이 분명했다.

베른은 거만하게 턱을 들었다.

“왜, 겁이 나나? 찌꺼기 마력으로 잔상을 흉내 내는 것은 쉬워도 진짜 마력검과 부딪치면 그 손목부터 부러질 테니까.”

카이드는 바닥에 떨어진 대련 신청서를 집어 들었다. 접힌 종이를 털어 품에 넣으며 그가 베른을 직시했다.

“서명은 내가 한다.”

베른이 비웃음을 띄웠다.

“그럼 지금 적지 그래?”

“내가 적을 때 적는다. 조건도 내가 정해서.”

카이드는 베른을 지나쳐 창고 구석으로 걸어갔다. 베른이 뒤를 돌아보며 혀를 찼지만 카이드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억지로 싸움을 걸어 남의 판에 끌어들이려는 도발에 반응할 이유가 없었다.


본관 뒤편, 낡은 석조 아치 아래에는 볕이 잘 드는 나무 벤치가 있었다.

에신은 그늘과 햇빛이 딱 반씩 걸친 자리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행정실에서 하리의 대리 교육 보호자 서명을 마친 뒤 밀려든 피로감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마력을 일절 쓰지 않았음에도 흉부 안쪽에서 묵직한 열감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그가 막 잠에 들려던 찰나, 쿵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흙먼지가 날아왔다.

“...시끄럽군.”

에신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낮게 읊조렸다.

카이드는 목검 궤짝을 바닥에 내려놓다가 멈칫했다. 벤치에 사람이 누워 있는 줄 몰랐던 것이다.

“아... 죄송합니다, 교수님. 기척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카이드는 땀에 젖은 이마를 닦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어깨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호흡은 불필요하게 가빴다. 품속에는 베른이 던지고 간 대련 신청서가 볼록하게 솟아 있었다.

에신은 눈을 슬그머니 떠 카이드를 바라보았다.

카이드의 자세는 엉망이었다. 근육을 과도하게 긴장시킨 채 남의 시선과 도발을 온몸으로 받아낸 사람의 형상이었다. 그 모습은 에신에게 옛 연구소 시절, 타인의 평가에 쫓겨 자기 몸이 타들어 가는지도 모르고 공식을 쥐어짜던 무의미한 나날을 떠올리게 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기시감이었다.

“너, 검 쥘 때만 딱딱한 게 아니었구나.”

에신이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 건조하게 말했다.

카이드가 멍하니 에신을 보았다.

“예?”

“생각도 딱딱하고 숨쉬는 것도 딱딱해. 남이 정한 궤적에 맞춰 검을 휘두르려니 검이 너무 정직하지.”

“정직하다고요...?”

카이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검술부에서는 늘 그의 검을 두고 기교에 치우친 변칙이라거나 기초가 없는 속임수라고 비난했다. 그런데 에신은 도리어 그의 검이 너무 정직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에신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상대가 마력을 크게 불러일으키면 그 앞을 정면으로 막아서려고 하잖아. 마력이 지나간 뒤에 생기는 빈자리는 보지도 않고 무조건 부딪쳐서 깨부수려 드니까 검로가 곧 직선밖에 안 되는 거다. 멍청하게 정직한 검이지.”

에신의 말은 단순했다. 소음 때문에 잠을 깨운 카이드의 거친 호흡과 굳은 어깨가 귀찮았고 남의 도발에 휘둘려 무리하게 힘을 넣는 꼴이 보기 싫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카이드의 뇌리에는 그 말이 거대한 충격으로 꽂혔다.

상대가 마력을 내뿜은 뒤에 생기는 빈자리.

카이드는 정식 훈련생들과 대련할 때마다 늘 상대의 화려한 마력검을 정면에서 꺾으려고만 했다. 마력 적성이 낮다는 열등감 때문에 상대의 칼날에 제 검을 부딪쳐 이기는 것만이 진짜 인정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이드의 잔류 검로는 칼날 자체에 마력을 부착하는 기술이 아니었다. 검이 지나간 궤적 뒤 공기 여백과 마력 흐름의 결손을 이용하는 기술이었다. 상대가 마력을 크게 끌어올려 공격할수록 그 마력이 지난 뒤의 배후에는 거대한 마력 빈틈이 생겨난다.

정직하게 상대의 칼날을 맞받아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정직하게 부딪칠 필요가 없었던 거군요.”

카이드의 목소리가 얇게 떨렸다. 굳어 있던 어깨의 긴장이 스르르 풀려나갔다.

에신은 카이드가 또 혼자 이상한 깨달음을 얻어 눈을 반짝이는 것을 보고 속으로 신음했다.

아니, 그냥 멍청하게 힘주지 말라는 소리였는데.

하지만 이미 늦었다. 카이드는 품에서 대련 신청서를 꺼내 들더니 벤치 옆 돌상 위에 펼쳐 놓고 깃펜을 집어 들었다.

“교수님. 대련 조건은 제가 정하겠습니다.”

“...내가 무슨 상관이라고.”

에신은 옷자락을 덮어쓰며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해 질 녘, 검술부 중앙 집무실.

마르첼 보조교관은 서류를 검토하던 중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카이드가 걸어 들어와 책상 위에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마르첼의 눈이 가느다랗게 찌푸러졌다.

“대련 신청서에 서명해 왔나 보군. 늦지 않게 판단해서 다행이다.”

“서명만 한 게 아닙니다.”

카이드가 단호하게 말했다.

마르첼이 종이를 집어 들어 훑어보았다. 신청서 하단, 카이드의 자필 서명 위에는 검은 잉크로 새로운 조항들이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대련 조건 변경 신청]

  1. 대련은 단 1회의 교차(一回 交叉)로 제한한다.
  2. 칼날 간의 마력 부착량 및 단순 타격력 측정은 제외한다.
  3. 승패의 기준: 공격 측의 검로가 지난 뒤, 방어 측의 보호막 뒤편에 배치된 단일 종이 표식의 방향 전환 여부로 결정한다.

마르첼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무례냐! 검술부의 정규 대련 방식을 부정하고 멋대로 조건을 붙이다니!”

마르첼이 책상을 내리치며 일어섰다. 옆에 서 있던 베른도 분노한 얼굴로 카이드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겁을 먹고 대련을 장난판으로 만들 작정이냐? 검과 검이 부딪쳐 마력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대련이다!”

카이드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검술부의 대련이 오직 마력의 양을 겨루는 힘겨루기라면 그것은 마법부의 측정석과 무엇이 다릅니까? 검술은 흐름을 베고 빈틈을 제압하는 학문입니다. 상급생 베른이 제 잔류 검로를 속임수라 부른다면 단 한 번의 교차로 제 검로가 상대의 보호막 빈틈을 통과하는지 직접 확인하면 될 일 아닙니다.”

“이놈이...!”

베른이 검 자루에 손을 얹으려 하자 집무실 문가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좋은 제안이군요.”

아르만 보조교수가 서류 더미를 들고 들어서고 있었다. 아르만은 카이드가 제출한 조건지를 받아 읽어보더니 안경을 고쳐 썼다.

“지난번 공개 관찰에서도 표준 측정석은 관찰된 흐름을 읽지 못했습니다. 카이드 학생이 제안한 단일 표식 검증법은 검로 뒤 마력 잔류 현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합리적인 조건입니다.”

마르첼이 이빨을 짓씹었다.

“아르만 교수! F-Class 낙제생의 궤변에 동조하시는 겁니까?”

“궤변이 아닙니다, 마르첼 교관.”

아르만이 건조하게 답했다.

“검술부가 F-Class 학생의 특수 검로를 정식으로 검증하겠다고 공지한 이상 검술부의 기준만 강요하는 것은 공정성 논란을 부를 수 있습니다. 만약 이 조건을 거절하신다면 검술부가 낙제생의 변칙 검로를 두려워해 피했다는 소문이 아카데미에 퍼질 텐데요.”

마르첼의 손가락이 떨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창밖에서 정식 훈련생들과 청강생들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집무실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미 거절할 수 없는 판이 짜여 버린 것이다.

마르첼은 카이드를 차갑게 노려보며 펜을 집어 들었다.

“좋다. 단 1회의 교차. 네놈이 원하던 그 조건으로 짓밟아 주마.”

마르첼은 수락 도장을 강하게 찍었다.

“대련은 내일 정오, 검술부 보조 훈련장이다. 베른, 네가 나선다. 저 헐거운 종이 조각이 흩날리기도 전에 칼날의 진짜 마력이 무엇인지 똑똑히 보여 줘라.”

“예, 교관님!”

베른이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카이드는 도장이 찍힌 신청서를 확인한 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돌아섰다.


밤이 깊어가는 F-Class 강의실.

책상 위에는 단일 관찰식이 그려진 루나의 종이들과 하리가 가라앉힌 작은 얼음 결정들이 놓여 있었다.

루나는 깃펜을 바쁘게 움직이며 대련장의 배치도를 그리고 있었다.

“베른의 마력 스타일은 정직한 중거리 충격파예요. 첫 동작에서 마력을 검에 과하게 몰아넣는 습관이 있죠. 카이드가 제안한 1회 교차 조건이라면 베른이 마력을 폭발시키는 순간 그 뒤편에 반드시 0.5초 이상의 마력 진공 상태가 생겨요.”

루나의 눈이 반짝였다.

“단일 관찰식 표식은 대련장 중앙 뒤편 3미터 지점에 놓을 거예요. 카이드의 검로가 베른의 마력장을 해치지 않고 그 진공 상태를 통과하면 표식은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뒤집힐 거예요!”

하리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보탰다.

“제가 대련장 주변의 불필요한 바람 마력을 억제해 둘게요. 루나의 표식이 외부 영향 없이 카이드의 검로만 기록할 수 있도록요.”

세 제자는 스스로 역할을 나누어 내일의 대련을 준비하고 있었다. 누군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그들의 호흡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강의실 뒤편, 의자 세 개를 붙여 만든 임시 침대에서 에신이 몸을 뒤척였다.

“...시끄러워.”

제자들이 멈칫하며 에신을 돌아보았다.

에신은 눈을 가린 옷자락을 살짝 치우며 카이드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내일 정오라고 했나?”

“예, 교수님.”

카이드가 정중하게 답했다.

에신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내일 정오면 한창 가장 따뜻할 때라 옥상에서 낮잠을 잘 예정이었다. 그런데 훈련장이 시끄러워지면 잠은 다 잔 셈이었다.

“이기겠다고 나대다가 손목 부러뜨리지나 마라. 병원비 청구 서류 들어오면 귀찮으니까.”

에신은 다시 옷으로 얼굴을 덮었다.

카이드는 그 말을 들으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스승은 이미 승패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직 제자의 몸이 상하지 않는 것만을 걱정하고 계신 것이다. 이기겠다고 무리하지 마라라는 말은 힘을 빼고 빈자리를 베라는 스승의 마지막 가르침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

카이드의 목소리에는 단단한 확신이 차 있었다.

창밖의 밤하늘 아래, 내일 정오에 펼쳐질 1회의 교차를 향해 F-Class의 밤이 조용히 깊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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