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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시한부 명예교수가 되었다8화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08화 [남겠다는 말]

강의실 문 아래로 흰 봉투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침 햇빛을 받아 종이 가장자리가 희게 빛났다. 하리는 바닥에 그려 둔 세 개의 원을 바라보다가 봉투의 붉은 인장을 알아보았다.

로젠가의 문장이었다.

그녀의 손끝이 멎었다. 세 번째 원 위에서 겨우 유지되던 작은 보호막도 얇게 흔들렸다.

“하리 폰 로젠 영애님께.”

문 앞에 서 있던 중년의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짙은 회색 외투에는 로젠가 사용인의 은실 문양이 달려 있었다.

“에드윈입니다. 본가의 명을 전하러 왔습니다.”

카이드는 목검에서 손을 뗐다. 루나는 공책을 덮지 않은 채 봉투와 사용인을 번갈아 보았다. 에신만 창가 의자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었다.

“읽어.”

하리는 봉투를 집었다. 밀랍을 뜯는 손끝이 생각보다 쉽게 떨렸다.

편지는 짧았다. 공개 관찰 기록에 영애의 불안정한 마력 반응과 F-Class 소속이 함께 남을 우려가 있다. 퇴학 권고가 검토되기 전에 본가로 돌아와 치료와 재교육을 받을 것. 오늘 해가 지기 전 마차에 오를 것.

마지막에는 부친의 이름 대신 가문의 인장만 찍혀 있었다.

“치료요?”

루나가 물었다.

에드윈은 말을 고르듯 잠시 고개를 숙였다.

“영애님의 마력은 섬세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본가에는 안정 치료사와 전담 교사가 있습니다. 더는 불필요한 공개 기록을 남길 이유가 없지요.”

불필요한 공개 기록.

하리는 그 문장을 속으로 한 번 더 읽었다. 첫 번째 보호막을 스스로 해제한 순간도, 세 번째 막까지 줄기를 유지한 순간도 저 문장 속에서는 같은 것이었다. 가문의 이름 아래에 놓기 부끄러운 기록.

“돌아가면 보호막 훈련은 어떻게 됩니까?”

하리가 물었다.

에드윈은 곧장 답하지 않았다.

“무리한 시도는 중단하셔야 합니다. 영애님이 다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말은 틀리지 않았다. 하리는 그래서 더 싫었다.

본가의 치료실은 늘 따뜻했고 침대의 시트는 부드러웠다. 실패한 날에도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다만 다음 날이면 실드의 크기가 더 작아져 있었고 손을 들 이유도 하나씩 사라져 있었다.

망가지지 않게 해 주겠다는 말은 결국 아무것도 해 보지 말라는 말이 되었다.

하리는 편지를 접었다. 종이 모서리가 손바닥에 얇게 파고들었다.

에신이 눈을 뜨지 않은 채 물었다.

“가고 싶냐.”

하리는 입을 열었다가 다물었다.

가면 편할 것이다. 오늘 안에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복도에서 상급생들이 수군대는 소리도 듣지 않아도 된다. 공개 관찰의 기록이 어떻게 적힐지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그런데 바닥의 세 번째 원이 보였다.

그 원 안에서 마지막 보호막은 무너지지 않았다.

“지금 대답하긴 어렵습니다.”

하리가 겨우 말했다.

에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답하기 전까지는 아무 데도 안 가면 되겠네.”

에드윈의 표정이 아주 조금 굳었다.

“명예교수님. 본가의 명입니다.”

“알아. 종이에 그렇게 적혀 있잖아.”

에신은 하품을 참듯 입가를 문질렀다.

“그래도 학생이 아직 대답을 안 했는데 마차부터 태우면 귀찮아져.”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점심 뒤에 본관으로 와. 그때까지 생각해.”


에드윈이 복도로 물러난 뒤에도 하리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작은 보호막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바닥의 원만 세 개 남았다. 그녀는 다시 손을 들지 못하고 무릎 위의 편지만 만지작거렸다.

카이드가 목검의 끈을 묶었다 풀었다 하다가 말했다.

“전 아직 대련을 받지 않았습니다.”

하리가 그를 돌아보았다.

“마르첼 보조교관이 사람들 앞에서 요구했잖아요.”

“요구했다고 제가 받는 건 아니니까요.”

카이드는 짧게 대답했다. 말끝은 딱딱했지만 목검을 쥔 손은 전보다 느슨했다.

“받더라도 제가 정한 조건으로 받을 겁니다. 손목이 망가질 때까지 휘두르라는 식이면 안 합니다.”

그 말은 하리에게 낯설었다. 카이드는 늘 상대가 던진 말에 먼저 검을 들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빈 서명란을 남겨 둔 채 자기 손을 보고 있었다.

루나가 공책을 하리 앞으로 밀었다.

“여기 봐요.”

공책에는 관찰 기록이 빼곡했다. 첫 번째 보호막의 요동, 해제 시각, 둘째 막으로 옮겨 간 줄기의 밀도, 세 번째 막이 유지된 시간. 숫자는 크지 않았고 줄마다 지운 흔적도 많았다.

“이건 가문에 보여 줄 성적표는 아닐 거예요.”

루나가 말했다.

“그래도 하리가 한 건 맞아요. 첫 번째 막이 흔들렸을 때 밀어 넣지 않았고 둘째 막을 터뜨리지 않았고 세 번째까지 갔어요.”

하리는 기록의 마지막 줄을 바라봤다.

완료.

그 한 단어가 낯설었다. 본가에서 듣던 말은 대개 부족하다거나 아직 이르다거나 다음에는 더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완성된 것도 아닌데요.”

“아니지.”

에신이 말했다.

그는 언제부터 듣고 있었는지 모를 얼굴로 창밖만 보았다.

“완성 안 됐어.”

하리의 어깨가 아주 조금 내려갔다. 그 말이 확인처럼 들렸다.

“그럼 남을 이유도 없잖아요.”

“왜 없어.”

에신이 고개를 돌렸다.

“완성 안 된 걸 배우려고 학교에 있는 거지.”

하리는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보호막이 무너질 때마다 가문 사람들은 같은 얼굴을 했다. 실망한 얼굴. 그러니 떠나는 편이 모두에게 낫다고 말하는 얼굴.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생각을 하면 속이 조여 왔다.

“제가 남아서 또 실패하면요?”

“그럴 수 있지.”

에신의 대답은 이상할 만큼 단순했다.

“성공한다고 적힌 편지는 아니잖아.”

“그럼 교수님은 제가 뭘 하길 바라는데요?”

하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날이 서 있었다.

에신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는 누구의 인생을 대신 정해 주는 데 익숙하지 않은 사람처럼 보였다.

“내가 바라는 건 없어.”

마침내 그가 말했다.

“네가 가고 싶은지 남고 싶은지만 정해. 나머지는 그다음에 귀찮아하면 되니까.”

강의실이 조용해졌다.

하리는 편지를 내려다봤다. 가문은 안전을 말한다. 아카데미는 기록을 말한다. 둘 다 그럴듯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말들 사이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는 사람은 없었다.

세 번째 원을 바라보자 손끝이 다시 뜨거워졌다. 완성하지 못한 보호막. 그러나 그날 처음으로 자신이 멈춘 자리까지 가져간 보호막.

하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남겠습니다.”

카이드가 끈을 묶던 손을 멈췄다. 루나는 펜을 들었다가 적지 않았다.

하리는 숨을 한 번 더 골랐다.

“실패하지 않겠다고는 못 하겠습니다. 그래도 제가 그만둘 때까지는 여기서 해 보고 싶어요.”

에신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본관 가자.”


본관 행정실은 강의실보다 훨씬 조용했다.

서기관은 로젠가의 편지와 잔류 신청서를 나란히 놓았다. 종이 한 장에는 귀가 명령이 적혀 있었고 다른 한 장에는 학생의 의사가 적힐 빈칸이 있었다.

“후견 가문이 귀가를 요구한 경우입니다.”

서기관이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학생이 이의를 제기하려면 본인의 자필 의사와 대리 교육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합니다. 담당 교수 또는 학과 책임자가 안전 관리 책임을 함께 지는 방식입니다.”

에드윈이 낮은 숨을 내쉬었다.

“영애님은 아직 판단을 내리기에는 불안정한 상태입니다. 본가는 아카데미의 결정도 존중해 왔습니다. 다만 공개 관찰까지 거친 지금은 치료를 우선해야 합니다.”

그는 하리를 보며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본가에는 영애님을 탓할 사람이 없습니다. 돌아오시면 됩니다.”

하리는 그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본가의 사람들은 대놓고 그녀를 미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대답하기 어려웠다.

그들은 자신이 보호막을 포기하면 안심할 것이다. 더는 기대하지 않아도 되니까.

“에드윈.”

하리가 불렀다.

사용인이 고개를 들었다.

“본가에서는 제가 실드 마법을 그만두길 바라는 겁니까?”

“영애님이 다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질문의 답이 아니에요.”

하리의 손이 신청서 위에서 떨렸다. 그래도 손을 거두지는 않았다.

“제가 돌아가면 제 마력은 작게 나눠서 평생 무너지지 않게만 쓰게 될 거예요. 그건 알아요.”

에드윈의 입술이 굳었다.

“그 길도 영애님을 위한 길입니다.”

“알아요.”

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무서웠어요. 그 길로 가면 누구도 저를 나무라지 않을 테니까요.”

그녀는 펜을 들었다. 잉크 끝이 빈칸 위에서 잠깐 멈췄다.

“하지만 저는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서기관의 시선이 하리에게 머물렀다. 에드윈도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다음 평가에서 좋은 결과를 낸다고 약속하지는 못합니다. 대신 제가 만든 보호막이 왜 흔들리는지는 알고 싶어요. 제가 멈추는 순간도 제가 고르고 싶습니다.”

하리는 자기 이름을 적었다.

하리 폰 로젠.

글씨 끝이 조금 흔들렸지만 번지지는 않았다.

서기관이 두 번째 칸을 에신 쪽으로 돌렸다.

“서명자는 평가 기간 중 학생의 훈련 계획과 안전 관리에 대한 책임을 집니다. 사고가 발생하면 후견 가문과 아카데미 양쪽에 경위를 제출해야 합니다.”

에드윈이 에신을 향해 말했다.

“명예교수님께서 감수하실 일은 아닙니다. 영애님의 선택이 잠시의 반발일 수도 있습니다.”

에신은 서류를 내려다봤다. 문장마다 책임이라는 말이 붙어 있었다. 가문과의 서신, 평가 기록, 안전 사고 보고.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그가 원한 것은 조용한 의자와 낮잠뿐이었다.

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붙잡아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쓴 이름 옆에 손을 올려 두고 있었다.

에신이 물었다.

“생각 바뀌면?”

하리는 그를 바라봤다.

“그때는 제가 말하겠습니다.”

“가문이 뭐라 해도?”

하리는 잠시 눈을 감았다가 떴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에신은 펜을 들었다.

“그럼 됐네.”

그는 대리 교육 보호자 서명란에 이름을 적었다.

에신 루드윅.

종이 위에 잉크가 번지는 짧은 동안 행정실은 이상할 만큼 조용했다.

에드윈은 서명을 오래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본가에 그대로 보고하겠습니다. 다음 정기 평가까지 결과를 보여 달라는 뜻도 함께 전하겠습니다.”

“전해요.”

하리가 답했다.

목소리는 아직 작았다. 그래도 이번에는 편지 뒤에 숨지 않았다.

“제가 직접 보이겠다고는 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여기 남겠다고는 말했어요.”

에드윈은 더 말하지 않고 물러났다. 그의 발소리가 복도 끝으로 사라진 뒤에야 하리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강의실로 돌아온 하리는 곧바로 바닥의 원 앞에 섰다.

에신은 의자에 앉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서명 하나를 했을 뿐인데 피로가 목덜미까지 밀려왔다. 마력을 쓰지 않았는데도 손끝이 미지근했다.

“오늘은 세 번만 해.”

하리가 돌아보았다.

“세 번이요?”

“서류 쓰느라 피곤하잖아.”

그 말에 하리의 입가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그녀는 첫 번째 원 앞에서 손을 들었다. 작은 보호막이 나타났다가 흔들렸다.

이번에도 막은 완벽하지 않았다.

하리는 억지로 밀어 넣지 않았다. 흐름이 거칠어지는 순간 손가락을 펴고 첫 번째 막을 조용히 해제했다. 남은 줄기는 두 번째 원으로 옮겨 갔다.

루나는 공책에 시각과 방향을 적었다. 카이드는 창가에서 목검을 닦다가 하리의 손끝을 한 번 보았다.

책상 위에는 그가 받아 온 대련 신청서가 놓여 있었다.

마르첼의 도장이 찍힌 종이 아래에 참가자의 이름을 적는 칸이 비어 있었다. 카이드는 한참 그 빈칸을 내려다봤다.

하리의 두 번째 보호막이 가늘게 떠올랐다.

카이드는 펜을 집었다.

이번에는 남이 던진 싸움에 끌려갈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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