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에서 추방당한 명예교수가 되었다

010화 [빈자리를 베다]
정오의 직사광선이 검술부 보조 훈련장의 모래바닥을 하얗게 달구고 있었다.
훈련장 주위는 아침 일찍부터 몰려든 관중으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중앙 본관에서 소문을 듣고 달려온 청강생들은 물론이고, 푸른 견장을 차고 턱을 높이 든 검술부 정식 훈련생들이 줄을 서서 나무 펜스를 둘러싸고 있었다. F-Class의 평민 낙제생이 검술부 2학년의 실력자 베른에게 대련을 신청했다는 소식은 아카데미의 가장 뜨거운 화젯거리였다.
"목검 한 자루 달랑 들고 정식 대련장에 서다니 미친 것 아닌가."
"게다가 대련 조건을 단 한 번의 교차로 제한해 달라고 졸랐다지? 칼날에 마력도 못 붙이는 놈이니 도망칠 핑계를 만든 게 분명해."
"정식 검술부의 마력검 앞에서 그 허술한 속임수가 얼마나 하찮은지 오늘 똑똑히 보게 되겠군."
관중석 사방에서 쏟아지는 비웃음과 빈정거림 속에서도 루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훈련장 중앙 뒤편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루나의 손에는 얇은 마력 종이로 제작된 단일 관찰 표식이 들려 있었다.
루나는 베른이 들어설 방어막 예상 지점에서 정확히 3미터 뒤쪽 바닥에 관찰 표식을 단단히 고정했다. 종이의 수평과 지면과의 각도를 세 번이나 확인한 루나는 공책을 펴고 측정 시작 시각을 기록했다.
훈련장 외곽 벤치 옆에 자리를 잡은 하리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녀는 가슴 깊은 곳에서 숨을 골라내며 손끝에 미세한 마력 줄기를 끌어올렸다.
하리가 바닥으로 흘려보낸 차가운 마력은 훈련장 주변의 모래알을 따라 얇게 퍼져 나갔다. 관중석의 어수선한 입김과 아카데미 상공을 흐르는 불필요한 바람 마력을 가라앉히는 정밀한 보조 작업이었다. 카이드의 검로 뒤에 남을 희미한 공기 여백이 외부 노이즈에 의해 일그러지지 않도록 바닥의 흐름을 일정하게 정돈하는 손길이었다.
"표식 검증 완료했습니다."
아르만 보조교수가 직인을 든 서기관과 함께 장내로 들어와 루나가 설치한 종이 표식을 다각도에서 검사했다. 종이 표식의 면은 정면을 향해 평평하게 그늘을 만들고 있었고 외부 바람에도 일절 흔들리지 않았다.
아르만은 안경을 고쳐 쓰며 펜스 옆의 마르첼 보조교관을 돌아보았다.
"단일 표식의 초기 고정 상태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카이드 학생이 제출하고 검술부가 승인한 대련 조건에 따라 대련을 진행합니다."
마르첼의 턱 근육이 툭 튀어나왔다. 마르첼은 펜스 안쪽에서 은빛 제식 훈련검을 들고 대기 중인 베른에게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베른. 헛수작이나 잔재주에 휘둘릴 필요 없다. 첫 합에 네 마력을 최대로 뿜어내어 마력검의 압도적인 격차를 똑똑히 각인시켜 줘라."
"걱정 마십시오, 교관님. 낙제생의 목검이 바스러지는 데는 1초도 걸리지 않을 테니까요."
베른이 거만하게 웃으며 제식검을 검집에서 뽑아 들었다.
은빛 칼날 위로 푸른 마력이 굵은 뱀처럼 얽혀 들며 묵직한 공명음을 냈다. 검술부 2학년 중에서도 손꼽히는 3서클 수준의 강렬한 마력 부착이었다. 푸른 빛이 모래바닥에 일렁이자 관중석에서 기세등등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카이드는 낡은 목검 자루를 거머쥐고 훈련장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의 어깨는 전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지 않았다. 굳은살이 껍질째 뜯겨 나간 손바닥의 쓰라린 통증도,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수백 명의 조롱 어린 시선도 더 이상 카이드의 중심을 흔들지 못했다. 카이드는 어제 본관 뒤편 창가 벤치에 누워 짜증스럽게 중얼거리던 에신의 목소리를 되새겼다.
'너, 검 쥘 때만 딱딱한 게 아니었구나. 생각도 딱딱하고 숨쉬는 것도 딱딱해. 남이 정한 궤적에 맞춰 검을 휘두르려니 검이 너무 정직하지.'
'상대가 마력을 크게 불러일으키면 그 앞을 정면으로 막아서려고 하잖아. 마력이 지나간 뒤에 생기는 빈자리는 보지도 않고 무조건 부딪쳐서 깨부수려 드니까.'
정직하게 부딪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상대가 더 거대한 마력을 불러일으킬수록 그 마력이 휩쓸고 지나간 배후에는 그만큼 거대하고 완전한 빈자리가 열리는 법이었다.
마르첼이 붉은 대련 깃발을 높이 들어 올렸다.
"단 1회 교차! 대련 시작!"
깃발이 공기를 가르며 내려오는 순간 베른의 신형이 모래를 걷어차며 튕겨 나갔다.
"죽어라!"
베른은 첫 합에 승부를 끝내겠다는 욕망으로 허리를 비틀며 검을 내질렀다. 은빛 칼날에서 뿜어져 나온 강렬한 푸른 마력이 파쇄형 충격파가 되어 카이드의 정면을 덮쳐 왔다. 훈련장의 모래바닥이 폭발하듯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묵직한 마력 압력이 주변 공기를 찢발겼다.
상대의 전력을 꺾어 놓으려는 정직하고 과도한 마력 폭발이었다.
관중석의 상급생들이 승리를 확신하며 벼락같은 고함을 질렀다. 저 정도 무시무시한 마력 폭풍이라면 헐거운 목검 따위는 부딪치는 순간 자루째 터져 나갈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카이드는 눈을 감지 않았다.
카이드는 자신을 향해 덮쳐오는 푸른 마력의 장벽을 직시하며 숨을 나직하게 내쉬었다. 시야가 차갑게 조여드는 순간, 에신이 지적했던 '빈자리'가 선명하게 궤적을 드러냈다.
베른이 전력을 다해 마력을 전방으로 뿜어낸 바로 그 0.5초.
베른의 칼날 뒤편, 방어막과 마력장 사이의 공간에 거대한 마력 진공이 만들어졌다. 마력을 정면으로 죄다 쏠아 넣은 탓에 정작 자신의 배후와 측면 마력 회로가 텅 비어 버린 것이다.
카이드는 발끝을 엇갈려 찍으며 몸을 낮췄다.
검을 정면으로 부딪쳐 막아설 필요가 없었다. 카이드는 베른의 마력 폭풍이 비껴가는 결손의 틈새로 슬라이딩하듯 유연하게 몸을 밀어 넣었다.
스악!
카이드의 목검이 공기를 갈랐다.
목검의 칼날에는 단 한 줄기의 푸른 마력도 감겨 있지 않았다. 그러나 목검이 지나간 궤적 뒤편으로 공기가 기이하게 차올랐다. 검이 뚫고 지나간 여백을 따라 주변 마력 흐름이 거꾸로 끌려 들어가는 잔류 검로였다.
카이드의 목검은 베른의 은빛 칼날을 단 1밀리미터도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베른이 뿜어낸 마력 폭풍의 결손 지점을 정확히 관통하며 그 배후의 방어막 틈새를 스쳐 지나갔다.
쿠웅!
베른의 마력 충격파가 카이드가 서 있던 바닥을 짓눌러 놓으며 폭발했다.
거대한 흙먼지가 솟구쳐 오르고 훈련장은 순간 정적에 빠졌다. 베른은 쇄도하던 기세를 멈추지 못하고 세 걸음 앞으로 더 나아가 멈춰 섰다. 그는 자신의 전력 충격파가 카이드를 온전히 덮쳤다고 확신했다.
"하! 봤느냐! 이것이 정식 검술부의 진짜 마력이다!"
베른이 거만하게 턱을 들며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흙먼지가 서서히 걷힌 자리에는 카이드가 아무렇지도 않게 서 있었다. 카이드의 낡은 옷자락에는 모래알 하나 튀어 있지 않았고, 그의 목검은 이미 조용히 검집 위치로 내려와 있었다.
베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뭐, 뭐야...? 너 왜 멀쩡한 거냐? 무슨 마법이라도 부린 거냐?"
"피하기만 한 것이다!"
펜스 뒤의 마르첼 교관이 얼굴을 험악하게 구기며 소리쳤다.
"검과 검이 부딪치지 않았다! 공격을 비껴서 도망친 것은 대련의 승리가 아니다!"
관중석의 정식 훈련생들도 카이드가 단순히 회피했을 뿐이라며 야유를 보낼 준비를 했다.
그때 아르만 보조교수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정적."
아르만의 낮고 단단한 목소리가 훈련장의 소란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아르만은 베른의 방어막 뒤 3미터 지점에 고정되어 있던 단일 관찰 표식 앞으로 다가갔다.
수백 명의 시선이 바닥의 종이 표식으로 일제히 쏠렸다.
바닥에 단단히 고정되어 있던 종이 표식이 완전히 반대 방향으로 뒤집혀 있었다.
베른의 마력 충격파는 정면을 향해 뻗어 나갔으므로 정상적인 바람이라면 종이 표식은 뒤쪽으로 누워야 정상이었다. 그러나 표식은 정확히 베른의 등 뒤에서 정면을 향해 반대로 꺾여 있었다.
카이드의 목검이 지나간 뒤 발생한 잔류 검로의 마력 흐름이 베른의 마력 진공을 관통하여 종이 표식을 앞쪽으로 뒤집어 놓은 것이었다.
아르만 교수가 안경테를 고쳐 잡으며 선언했다.
"단일 표식 방향 전환 확인. 카이드 학생의 검로가 상대 방어막 배후의 빈틈을 완벽히 관통했습니다."
"말도 안 돼...!"
베른의 손에서 제식검이 떨어질 듯 가늘게 떨렸다. 자신의 전력 마력 폭발이 도리어 거대한 구멍이 되어 상대의 목검길을 열어 주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르첼 보조교관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었다. 억지를 쓰고 싶었지만 아르만 교수가 지켜보는 앞에서 자필 도장이 찍힌 공식 대련 조건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아르만이 마르첼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판정을 내리시겠습니까, 마르첼 교관?"
마르첼은 떨리는 손으로 승인 직인을 집어 들었다. 서류 위에 붉은 도장이 쾅 소리를 내며 찍혔다.
"승자... F-Class 카이드."
훈련장이 쥐 죽은 듯 정적에 휩싸였다. 검술부 정식 훈련생들은 말을 잃었고 청강생들은 경악으로 눈을 넓혔다. 마력이 없어 낙제생이라 불리던 평민이 단 한 번의 교차로 2학년 정식 훈련생의 전력 마력을 완벽히 무력화한 것이다.
대련이 끝난 뒤 정오의 햇살이 본관 뒤편 낡은 석조 아치 아래로 기울어졌다.
에신은 나무 벤치 위에 누워 옷자락으로 얼굴을 가린 채 짜증스러운 숨을 내쉬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환호 소리와 훈련장에서 날아온 흙먼지 때문에 제대로 된 낮잠을 잘 수가 없었다. 마력 역류증으로 인한 흉부의 묵직한 열감도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교수님."
발소리가 멈추며 카이드의 정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신이 옷자락을 아주 조금 치우고 눈을 떴다. 카이드와 하리, 루나 세 사람이 벤치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카이드의 얼굴에는 이전의 조급함 대신 깊은 확신과 존경이 차 있었다.
"대련에서 승리했습니다.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신 대로 정직하게 부딪치지 않고 상대 마력이 지난 뒤의 빈자리를 베었습니다."
카이드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에신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나는 그냥 소음 때문에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했을 뿐인데...'
쉬고 싶어서 던진 무심한 불평이 또 이렇게 대단한 비급으로 포장되어 버렸다. 이 대련 승리로 F-Class의 이름은 아카데미 전체에 더 크게 퍼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을 찾아오는 청강생과 행정 서류는 배로 늘어날 터였다.
조용히 쉬려던 시한부 휴식은 완전히 물 건너간 셈이었다.
에신은 피곤함에 젖은 목소리로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시끄럽게 하지 말라고 했지 이기고 오라고 한 적은 없다."
그 말을 들은 세 제자의 눈빛이 일제히 흔들렸다.
카이드는 입술을 깨물며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승리에 도취하여 자만하지 마라. 남들의 환호에 휘둘려 마음을 시끄럽게 만들지 마라. 스승의 말은 승리 그 자체보다 스승으로서의 자세와 마음의 평정을 지키라는 숭고한 가르침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교수님! 절대로 이 승리에 자만하지 않고 마력의 빈자리를 계속 수련하겠습니다!"
하리와 루나도 존경 어린 눈으로 에신을 바라보았다.
에신은 옷자락을 다시 얼굴 위로 덮어 쓰며 속으로 눈물을 삼켰다.
'제발... 다들 나 좀 가만히 놔둬라...'
창밖의 밝은 햇살 아래, F-Class의 첫 번째 공식 승리 소식이 아카데미 전역으로 소용돌이치듯 퍼져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