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악보는 대마법이 된다

9화: 보관탑의 침묵
제라드의 검증실에는 해가 기울어 만든 긴 그림자가 걸려 있었다.
탁자 한가운데 놓인 관리 구역 출입 인장 조각은 조금 전까지 잠잠했다. 그러나 하진이 제1중앙 실기실에서 가져온 복사본을 가까이 두자 탑 문양의 가장자리가 가늘게 떨기 시작했다.
짧은 저음이 한 번 울렸다.
하진은 손을 멈췄다. 둘째 음은 오지 않았다. 대신 조각에서 피어난 은빛 실 하나가 창문 너머 보관탑을 향해 뻗었다가 아래쪽으로 꺾였다.
“지하 열람고입니다.”
제라드가 곧장 복사본 위에 손바닥을 덮었다.
“원본은 내 검증 봉인 안에 있다. 저런 잔향 하나만으로 보관탑 봉인을 열 수는 없다.”
“원본을 훔치러 가는 게 아닙니다.”
하진은 인장 조각에 닿지 않은 채 문양 끝을 가리켰다.
“원본을 들을 자리를 만들러 가는 겁니다.”
엘레나의 지휘봉 끝에 박힌 푸른 공명석이 희미하게 빛났다.
“중앙 실기실의 빈 받침대와 같은 원리인가?”
“네. 검은 박자는 먼저 비어 있는 성부를 잡습니다. 그다음 가장 크게 반응하는 선율에 길을 이어요. 보관탑에 비어 있는 열람함이나 끊긴 봉인이 있다면 원본은 그 끝에서 들릴 겁니다.”
루카스가 들고 있던 청동 고리를 내려다봤다. 실기실에서 열이 식지 않은 고리였다.
“보관탑에는 교수님들 원본만 있잖아. 누가 빈칸 하나를 만들었다고 그게 진짜 원본까지 닿을 수 있어?”
“보관 기록은 악보보다 먼저 길을 엽니다.”
하진은 복사본 가장자리의 은빛 선을 짚었다.
“원본을 직접 건드리면 제라드 교수님의 봉인에 걸리겠죠. 하지만 열람함 하나를 비워 두고 그 자리에 보정 습관을 흉내 낸 잔향을 넣으면 달라집니다. 배열은 악보가 아니라 길을 먼저 듣습니다.”
제라드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자네 초안의 보정 습관까지 읽고 있다는 뜻인가?”
하진은 대답하지 못했다.
복사본을 불태우거나 접어 버리면 잠깐은 조용해질 수 있다. 자신의 선율을 따라온 길도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빈자리를 먼저 찾는 배열은 다른 길을 고를 뿐이다. 다음에는 실기실에 들어오는 학생의 보조구나 합주실 단원의 마력핵을 붙잡을지도 모른다.
하진은 악보지에서 손을 떼었다.
“제 악보를 노리는 쪽이 있는 건 맞습니다. 그러니 그 귀가 어디에 붙어 있는지 확인해야 합니다.”
검증실이 조용해졌다.
제라드는 인장 조각과 복사본을 차례로 보았다. 그는 원본이 든 검증 봉인 상자를 끌어당겨 은색 자물쇠를 하나 더 채웠다. 그제야 탁자 아래에서 둥근 인장을 꺼냈다.
“열람고에는 들어가되 내 임시 인장이 닿는 범위에서만 움직인다. 발견한 흔적은 손대기 전에 기록한다. 원본 봉인이 반응하면 내 명령 없이 즉시 물러난다.”
엘레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통로의 공명막을 유지하겠다.”
문가에 기대 있던 에드릭은 말없이 손가락을 굽혔다. 손끝에서 아주 작은 불꽃이 피었다가 사라졌다.
“첫 박자가 내 선율을 흉내 낸다면 그 박자만은 붙잡을 수 있다.”
그의 목소리에는 협력의 온기보다 불쾌함이 더 짙었다. 하진은 그게 오히려 믿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문턱은 넘지 마세요.”
에드릭이 눈썹을 찌푸렸다.
“명령하는 건가?”
“첫 박자가 강하게 튀면 화염도 함께 물릴 수 있습니다. 안에서 할 일보다 밖에서 할 일이 더 커요.”
에드릭은 잠시 하진을 노려봤다. 그러고는 낮게 대답했다.
“내가 잡은 음을 놓치지 마라.”
기록 보관탑 지하 열람고로 이어지는 계단은 예상보다 깊었다.
등불은 푸른 불꽃을 거의 내지 못했고 돌벽 사이에는 오래된 종이와 차가운 금속 냄새가 배어 있었다. 제라드가 계단 끝의 인장판에 손을 얹자 층층이 겹친 문양이 천천히 풀렸다.
마지막 문이 열리자 좁고 긴 통로가 나타났다.
양쪽 벽에는 사람 키보다 높은 금속 열람함이 빽빽하게 늘어서 있었다. 각 문에는 보관 번호와 악보 제목이 새겨져 있었다. 오래전에 폐기된 연습곡부터 교수들의 연구 초안까지 빽빽한 글자가 이어졌다.
그런데 통로 중앙의 한 칸만 아무 글자도 없었다.
금속 문은 비어 있었다. 번호판이 붙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얇게 긁힌 흔적만 남아 있었다.
하진은 걸음을 멈췄다.
“저겁니다.”
루카스가 숨을 삼켰다. 빈 열람함 아래 바닥에는 실기실에서 본 것과 닮은 검은 가루가 떨어져 있었다.
가루 한 알이 떨렸다.
쿵.
낮은 첫 박자가 열람고 전체에 울렸다.
철컥.
양쪽 열람함이 동시에 잠겼다. 통로 끝에 박힌 검증석이 푸른 빛을 뿜으며 보관탑 상층을 향한 은선을 드러냈다. 그 선은 제라드가 든 봉인 상자와 같은 방향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원본 봉인을 부르고 있어요.”
하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라드의 상자가 낮게 진동했다.
엘레나가 지휘봉을 세웠다. 푸른 선이 통로를 가로질러 일행 뒤에 얇은 막을 만들었다. 강한 충격을 막는 결계가 아니었다. 안쪽의 소리가 바깥 공명석에 닿지 못하게 하는 얇은 악보선이었다.
“첫 박자만 고정해.”
에드릭이 문턱 밖에서 손을 들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통로 바닥에 내려앉았다. 결투장에서 보였던 거친 화염은 아니었다. 짧고 낮은 첫 음만 붙들기 위한 불꽃이었다.
검은 가루가 불꽃을 향해 꿈틀거렸다. 그러나 바깥으로 뻗지는 못했다.
“루카스.”
하진이 빈 열람함을 가리켰다.
“아래쪽 걸쇠를 봐줘.”
루카스가 고개를 끄덕이고 쪼그려 앉았다. 그는 작은 연금술 램프를 꺼내 걸쇠 틈을 비췄다. 금속판 아래에는 둥근 고리를 걸 수 있는 홈이 있었다.
“실기실 받침대랑 같은 모양이야.”
“고리가 빠진 흔적은?”
“있어. 그런데 여기 홈은 더 깊어.”
루카스가 손끝으로 검은 가루를 건드리려 하자 제라드가 날카롭게 말했다.
“만지지 마라.”
루카스는 손을 멈췄다. 대신 램프 각도를 바꾸었다. 빛이 비스듬히 들어가자 홈 안쪽에 가는 은선이 드러났다. 학생 통행패에 새겨지는 얕은 문양이 아니었다. 금속을 여러 번 덧그어야 남을 깊은 선이었다.
제라드의 표정이 굳었다.
“시설 정비 인장이다.”
“관리 인장 조각과 이어집니까?” 엘레나가 물었다.
“같은 계열이다. 정비 인장은 열람함을 열지 않는다. 번호판과 연결 고리를 교체할 때만 쓰지.”
하진은 빈칸을 바라봤다.
누군가는 열람함 하나를 억지로 부순 것이 아니었다. 원래부터 비어 있어야 하는 자리처럼 고쳐 놓았다. 배열이 좋아할 만큼 자연스럽고 안전한 길이었다.
반 박자 늦은 둘째 음이 통로의 어둠 속에서 움직였다.
원본 봉인 상자의 진동이 커졌다.
제라드가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인장이 밝게 타오르며 검은 은선 위로 내려앉았다.
“지금 끊으면 봉인은 지킬 수 있다.”
“그럼 이 흔적도 끊깁니다.”
“원본보다 흔적이 중요하다는 건가?”
하진은 대답하기 전에 봉인 상자를 바라봤다. 그 안에는 자신의 첫 무기형 악보 원본이 들어 있었다. 잃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상대는 이미 복사본을 듣고 있었다. 여기서 길만 자르면 다음번에는 더 조용한 빈칸을 만들 것이다. 그때는 발견조차 늦을 수 있다.
“둘 다 지키겠습니다.”
제라드의 눈매가 좁아졌다.
“방법을 말해 봐라.”
하진은 빈 열람함 앞에 악보지를 폈다.
월광식 속사 아르페지오의 음표를 옮길 생각은 없었다. 검은 박자는 빠른 음표의 모양을 훔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반복해 써 온 보정 순서와 빈 성부를 읽었다.
그렇다면 같은 길처럼 들리되 원본으로는 이어지지 않는 길을 만들면 된다.
하진은 두 줄의 보조 성부를 적었다. 첫 줄은 원본과 반대 방향으로 내려갔다. 둘째 줄은 첫 줄의 빈 틈을 3도와 6도로 메웠다. 어느 한 줄도 혼자서는 월광식의 박자를 만들 수 없었다.
둘이 겹쳐야만 익숙한 보정 순서처럼 들렸다.
“거울 성부입니다.”
엘레나가 악보를 내려다봤다.
“원본을 비추되 원본은 아닌 선율.”
“네. 저쪽은 제 보정 습관을 따라온다고 믿을 겁니다. 하지만 둘째 박자가 들어오는 순간 길이 셋으로 갈라져요. 하나는 제라드 교수님의 검증석으로 갑니다. 하나는 루카스가 잡을 고리로 갑니다. 마지막 하나만 열람함에 남습니다.”
루카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내가 잡는다고?”
“고리를 놓지 않는 것만 해주면 돼.”
“그게 제일 어려운 말인 거 알지?”
루카스는 투덜거리면서도 청동 고리를 꺼냈다. 손바닥이 땀에 젖어 있었지만 그는 고리를 홈에 걸었다. 끝까지 밀어 넣지는 않았다. 빈자리를 닫는 순간 배열이 새 주인을 고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엘레나가 지휘봉을 들었다.
“내 신호 전에 둘째 줄을 올리지 마.”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제라드는 봉인 상자를 품에 안은 채 검증석에 인장을 댔다. 그는 하진의 악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내가 봉인을 지키는 동안 자네는 길을 읽어라.”
에드릭의 불꽃이 한 번 흔들렸다.
“더 오래는 못 붙든다.”
“세 박자면 됩니다.”
첫 박자가 다시 울렸다.
에드릭의 불꽃이 바닥을 짧게 눌렀다. 검은 가루가 튀어 오르며 통로를 훑었지만 불꽃의 바깥으로 나가지 못했다.
하진은 첫 줄의 끝에 지연 기호를 눌렀다.
둘째 박자가 늦게 내려앉으려 했다.
“지금.”
엘레나의 지휘봉이 가늘게 원을 그렸다.
3도가 먼저 울렸다. 이어 6도가 빈 열람함 안쪽에서 낮게 겹쳤다. 원본과 비슷한 보정 순서가 잠깐 만들어졌다.
검은 선이 그 틈으로 뛰어들었다.
하진은 숨을 멈췄다.
선은 상층을 향한 은선으로 곧장 뻗는 듯했다. 그러나 거울 성부의 둘째 줄이 울리자 길이 갈라졌다. 한 가닥은 제라드의 검증석으로 꺾였다. 다른 가닥은 루카스가 쥔 청동 고리로 내려앉았다.
“뜨거워!”
루카스가 이를 악물었다. 고리에서 새어 나온 열기가 손바닥을 밀어냈다. 그는 손을 빼지 않았다.
“놓지 마.” 하진이 말했다.
“안 놓고 있어!”
셋째 박자가 터졌다.
빈 열람함 안쪽의 어둠이 한순간 뒤집혔다.
검은 선은 원본을 잡지 못했다. 대신 세 갈래로 찢어진 자기 길을 더듬으며 금속판 안쪽에 감춰진 문양을 긁어 냈다.
은빛 글자가 떠올랐다.
정비 인장 발급부 / 제4기록실
엘레나가 즉시 지휘봉을 내렸다. 푸른 공명막이 글자 주위를 감쌌다.
그러나 검은 가루가 뒤늦게 글자를 덮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남긴 흔적을 지우려는 듯 은빛 글씨가 한 글자씩 흐려졌다.
“제라드 교수님. 검증석을 한 박자만 더 열어 주세요.”
“그럼 역류가 봉인에 닿는다.”
“그래서 한 박자만입니다.”
제라드는 망설였다.
그 사이 하진은 마지막 보정 기호를 악보지에 눌렀다. 원본을 향하던 첫 줄을 거꾸로 접어 검증석 쪽으로 되돌렸다. 검은 선이 지워지기 전에 한 가닥이 역방향으로 튀었다.
제라드의 인장이 짧게 열렸다.
은선 하나가 열람함에서 빠져나와 통로 천장 속으로 달렸다. 보관탑 상층 기록실이 아니라 탑 옆의 낮은 관리동 방향이었다.
하진의 눈앞에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불협화음의 발신자를 찾아라]
[진행도: 3/5]
[다음 단서: 정비 인장의 주인을 찾아라]
검은 가루가 힘을 잃고 바닥에 떨어졌다.
열람함의 잠금 장치가 하나씩 풀렸다. 에드릭의 불꽃도 마지막에야 꺼졌다. 그는 굳은 손가락을 펴며 빈 열람함을 노려봤다.
“내 선율을 흉내 낸 놈이 정비 인장까지 만졌다는 거군.”
“정비 인장을 가진 사람일 필요는 없습니다.” 제라드가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이전보다 낮았다.
“발급 기록의 빈칸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루카스가 마침내 고리에서 손을 뗐다. 손바닥에는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지만 그는 고리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그럼 이제 발급부에 가면 범인을 잡을 수 있어?”
하진은 흐려지는 은빛 글자를 바라봤다.
“아직은 아니야. 저쪽도 우리가 여기까지 따라온 걸 알았을 겁니다.”
제라드는 빈 열람함의 번호판 자리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열람고는 오늘 밤부터 폐쇄한다. 발급 기록은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저도 봐야 합니다.”
하진의 말에 제라드가 시선을 돌렸다.
“왜지?”
“검은 박자는 문서에 남은 이름을 찾는 게 아닙니다. 누락된 박자를 먼저 찾습니다. 기록에서 지워진 한 줄이 있으면 제가 알아볼 수 있어요.”
제라드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봉인 상자를 더 단단히 품에 안았다.
“내 검증실에서만이다.”
하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를 나서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빈 열람함을 돌아봤다.
검은 박자는 멎었다. 하지만 금속판 아래에는 지워지지 않은 아주 얇은 흔적 하나가 남아 있었다.
첫 박자도 둘째 박자도 아니었다.
누군가가 아직 치지 않은 마지막 박자였다.